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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무르익었던 축제의 밤.
참여인원이 나와 예은 둘 뿐이라고는 해도 파티는 파티다.
밤이 깊어질수록 달아올랐다.
특히 예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렇게 마시다간 훅 간다고 말을 해줬음에도 맥주에 소주를 두 잔씩 말아 꿀렁꿀렁 마셔댄 결과다.
결국 마지막 즈음에 가선 소주잔만 홀짝이다가 어느 순간 휙 가버렸다.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는 게 정신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 방에서 재웠다.
"깼냐?"
"으응."
광란의 밤을 뒤로 하고 늦은 아침이다.
뜨거운 햇살이 커텐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니 잠을 깨지 않을 수가 없다.
내 물음에 대답을 하려던 예은은 목이 꽤나 텁텁한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자 고개만을 끄덕였다.
"내가 그러게 작작 마시랬지?"
"......"
본인도 부끄럽다는 걸 아는지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 얼굴을 감춘다.
정말 술이 들어가면 못 말리는 녀석이다.
지금도 지금이지만 어제 술을 마시면서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너 어젯밤 기억 안 나지?"
"......"
예전에는 이 녀석 주량을 몰라서 내가 먼저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알게 된 이후로는 천천히 말 상대만 해주면서 술잔만 채워준다.
그러다 보면 이 녀석 혼자 부스터 걸려서 쭉쭉 마시고 휙 간다.
이전에도 한 번 술이 잔뜩 취했던 적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술버릇이 아주.
"징하게 엉겨 붙더라. 사람 부담스럽게시리. 딴 데서도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지?"
"너하고 말고는 취할 때까지 마신.. 콜록! 없어.."
억지로 대답을 하던 예은이 갑작스레 기침을 해온다.
모르긴 몰라도 목도 걸걸하고, 속도 메스껍고, 머리도 띵할 거다.
어젯밤 그렇게나 퍼마신 결과물이다.
언제 한 번 이 녀석 술교육은 필히 해줘야겠다는 생각.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마실라고 쟁여뒀던 아까운 대추차를 한 컵 가득히 따라 예은에게 건넸다.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술을 마신 후 처음으로 마시는 물은 달콤하디 달콤하다.
살짝 꿀까지 탄 대추차니 더욱 그러하겠지.
반 컵쯤 마시고 나서야 제 정신 차린 예은의 얼굴엔 갖은 고민이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어찌나 극성이던지.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 걸 그랬다니까."
"사, 사진?!"
대추차를 꿀떡꿀떡 마시던 예은이 깜짝 놀라서 대답한다.
하마터면 컵을 놓칠 뻔했다.
그거 놓치면 세탁 대박 귀찮아지는데.
그래도 슬슬 목이 풀리는 듯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 녀석 술도 잘 마시지만 해장 능력도 꽤나 강하다.
보통 꽐라가 될 때까지 마시면 반나절은 헤롱헤롱 해대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이다.
"정말…. 찍은 건 아니지?"
침대에 기댄 채 아직까지 이불을 끌어 안고 있는 예은이 고개를 빼꼼 밀고 조심스레 물어온다.
대답을 뭐라고 해줘야 할까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중에 이 녀석 까불 때 꺼내려고 저장해둔 게 있다.
내가 없을 때 술실수를 안 하게 하기 위함이라도 은근한 압박을 해두는 것도 괜찮을 지도.
"있으면 어떡할래?"
"......"
히죽 웃어주자 예은의 표정이 단박에 심각해진다.
갑자기 일어나서 주먹을 들진 않겠지.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일단 지르고 봤는데 후회막심이다.
나중에라도 복수해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예은의 대답은 의외로 담백했다.
"너만 볼 거면.. 괜찮아."
예은이 다소곳한 어조로 입을 열더니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 건지 이해를 하기가 힘들다.
굳이 못을 박지 않아도 내가 어디 가서 사진을 뿌릴 일은 없을 텐데.
딱히 이 녀석과의 의리 같은 게 아니라 타인의 사진을 뿌리는 것은 엄연한 초상권 침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홧김에라도 더 협박을 해봤겠지만 얘를 상대로는 더 나갈 수가 없다.
막 나가도 되는 사람이 있고 막 나가면 안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녀석은 절대로 후자다.
내가 가오가 있지, 정말로 주먹이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법이 걸려서 그런다.
이 녀석 자체도 법조계거니와 집안도 꽤나 빵빵하다.
쇠고랑 차는 일만은 사양이다.
"어디까지, 얼마나 찍었어..?"
"조금 많긴 한데.."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은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확 달아올랐다.
어젯밤 떨었던 주접이 생각난 걸지도 모른다.
예은은 내 베개를 들어서 얼굴을 파묻더니 그 상태로 쭉 변화가 없다.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줄은 몰랐네.'
아무래도 이번 경우는 본인에게 보여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래 봬도 심각한 사진은 지양하면서 찍은 편이다.
나도 그렇게 까지 악마는 아니니까.
어떤 사진을 찍혔을 거라 생각하고 얼어붙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 이하일 게 분명하다.
"자, 봐바."
"안 봐. 안 봐."
얼굴에서 베개를 떼어 놓으려 하지 않는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남자인 내가 베개를 뺏지도 못하겠다.
나는 예은이 멘탈을 회복할 때까지 옆에서 잠자코 기다려주기로 했다.
등이라도 토닥토닥 두들겨 주면서.
"살다 보면 실수 좀 할 수도 있지."
"하면.. 안되는 실수잖아."
덕담도 해주고.
위안이 될 말도 해주고.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착한 것 같다.
"그 정도 실수가지고 뭘 그러냐. 더한 애들도 많이 봤어. 나만 해도 후.. 아니다. 이건 할 얘기가 아니지."
"잠깐. 너 딴 여자도 있어?"
예은이 갑자기 고개를 휙 들더니 내 손목을 잡아 쥔다.
순간 보았던 얼굴은 앙칼지기를 넘어 귀기가 서려 있었다.
손힘도 어찌나 억센지 내 팔을 강제로 잡아당겨 핸드폰을 뺏어냈다.
숙취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라는 게 거짓말 같다.
"아이고. 기지배 손 험한 거 봐라.살가죽이 찢어졌잖아. 그냥 달라면 줄텐데 웬 난리법석이야."
"……."
핸드폰을 뺏어 그 안의 내용물을 한참 찾아보던 예은의 표정이 점점 밝아진다.
내 사생활이 담긴 마지막 사진까지 기어코 찾아보더니 뜬금없이 한숨을 푹 내쉰다.
정말 한숨을 내쉬어야 할 건 내 쪽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어젯밤에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거네..?"
"없기는 왜 없어. 침 질질 흘리는 거 내가 다 닦아줬구만. 너 코도 골더라?"
얘랑 티격태격 지대다 보니 여자에 대한 환상은 다 깨지고 뭉개지고 가루도 안 남았다.
연예인이나 걸그룹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물론 이 녀석처럼 막 나간다고 생각하면 큰 실례긴 하겠지만 이미 내 안에 선입견이 확고히 틀어박혀 버렸다.
솔직히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대체 뭐랑 착각하고 있던 거냐?"
"......"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잠깐 밝아보였던 표정도 어느새 사그라들어 이제는 어느 쪽인지도 분간이 안 간다.
기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하여튼 여러모로 속 썩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렇게 예은은 한참을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물어봐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씩 웃는다.
어느새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사람 안 따르는 고양이처럼 차가우면서도 은근히 관심을 바라는 듯한 상.
거기에 더해 알게 모르게 살짝 부풀어 있는 볼이 복잡미묘함을 더한다.
무언가 조금 삐진 부분이 있어 보이는 낌새다.
"나중에 뭐라 하지 말고 풀려면 지금 풀어."
"내가 뭐에 삐진 줄 알고?"
삐졌다고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짚어오는 것 보면 역시 쌓인 게 있다.
꼬치꼬치 캐물어봐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도 영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일까.
나는 예은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건네주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는 어젯밤에 술을 마시다가 적당히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주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완전 꽐라가 돼버린 탓에 주지 못했다.
타이밍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었지만 때마침 적기가 찾아왔다.
"그냥 너 같아서 샀는데 장식용으로라도 쓰라고."
방 한 켠을 장식하고 있던 어린 애 키만한 곰인형.
조금 못돼 보이는 눈매와 컨셉이 딱 예은같아 보여서 오는 길에 구입했다.
그것을 들어 예은에게 건네자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이 빨간 목도리는.. 인형 꺼야?"
빨간 목도리가 곰돌이의 목 주변을 감고 있다.
은근슬쩍 끼어서 주려고 했는데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꽤 신경 써서 감았는데.
"바보. 재질부터가 다른데 당연히 티나지."
툭 쏘아붙이는 말본새와 다르게 얼굴은 잠시나마 환하게 폈다.
하지만 잠시는 잠시.
내가 준 인형을 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내가 아니라 너같이 생긴 거 같은데? 봐바, 못생겼잖아."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못생기진 않았거든..?"
이 녀석 종종 나한테 외모 비하를 해대곤 한다.
얼굴 좀 반반하고 예쁘장하고 몸매 좋고 비율 좋고 피부 깨끗하고 그러면 다인가?
다인 거 같은 기분도 들지만 이래 봬도 나는 평범한 축에선 높은 쪽에 속한다고 자부한다.
성격 스테이터스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얻은 사람에게 한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간에 목표했던 선물은 무사히 건네줬다.
"이런 크리스마스라 미안하지만. 오늘도 빡세게 달려야 하는 거 알지?"
"응, 알고 있어. 하지만.."
대답은 빠르게 해왔지만 무언가 뒷말이 있어 보인다.
오히려 뒷말 쪽이 본론으로 생각된다.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 건깔.
한참 말을 고르던 예은의 입에서 다음 말이 떨어지는 데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심지어 그 내용도 얼토당토 않았다.
"난 선물 안 줄 거다?"
"와아, 너 진짜 치사하다."
설마 진짜 안 주나?
문을 닫고 나가는 예은은 멈춧하더니 돌아서서 한 마디 내뱉는다.
아주 밉살스런 표정으로 혀까지 빼꼼 내밀면서.
"안 받은 건 너라고 멍충아."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선물 교환도 안되는 녀석을 친구랍시고 뒀다니 후회가 막심하다.
어제 파티의 준비도 내가 다 했는데 말이지.
'그래도 의미는 있었지.'
하지만 조금은 나갔다고 생각한다.
그 안 줬다는 선물 또한 킵해 뒀을 뿐이다.
언젠가 내가 꿈을 이룰 날이 온다면 빚청산은 몰아서 받으려 한다.
.
.
.
* * *
세안을 하고 온다던 예은이 다시 돌아오는데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얇았던 옷도, 조금은 신경 쓴 것 같았던 피부 화장도 벗겨진 완전한 쌩얼.
은근했던 귀염상도 사라져 평소의 얼굴 그대로다.
"뭘 꼬나보냐?"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못 생겨졌다 생각한 건 아니고 새삼 다시 보게 됐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자연산이다.
방금 샤워를 마쳤는지 피부가 뽀송뽀송 수분기가 어려있다.
딱히 무언가 덧칠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더욱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건 나 뿐일까?
"실없는 생각 말고 의자에나 앉아. 할 거잖아?"
예은이 나를 툭 치더니 의자에 앉아 엄지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을 누른다.
나도 종종 저렇게 켜긴 하지만 정말 가리는 게 없는 녀석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어 편한 것도 사실이니 싫진 않지만.
'이 기세를 유지한다면 어쩌면 오늘 내에 가능할 지도 모르겠네.'
어제는 꽤나 빠듯이 올렸고 효율도 좋았다.
연승이 끊기지 않은 탓에 암걸릴 일도 없이 수직상승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세가 반드시 유지되라는 보장은 없다.
'어젠 솔직히 경쟁자가 그다지 없었으니까.'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나와 예은이 있는 팀은 지기가 힘들 정도로 흘러갔다.
미드 정글이 깽판을 친다는 의미는 알게 모르게 다른 라인에도 영향이 크다.
괜히 로드 오브 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라인으로 평받는 미드 정글이 아니다.
그러나 나와 예은이 푹 자고 있던 동안에도 랭크 게임은 굴러가고 있었다.
시작점이 뒤늦었던 자들이 서서히 치고 올라왔을 것이다.
시즌 초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나이기에 더욱 빠삭하게 알고 있다.
'아예 작정하고 잠시간을 줄인 사람들도 상당할 테지.'
누가 되었든 정상에 올라가면 주목받는다.
한 순간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서 이름이 거론된다.
선수라면 인지도가 올라가고, 아마추어라면 프로가 되는 기회를 잡게 된다.
솔로랭크라는 게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프로팀들이 은근한 주목을 해온다.
일반 유저들 중에는 대회만큼이나 비중있게 보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이들 또한 제법 존재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경쟁에 도태돼서야 가오가 서지 않는 법.
Unknown Error, 그 이름을 드높이는 과정은 당연 고됐다.
고됐던 과정만큼이나 이름값을 지키는 일 또한 쉽지가 않다.
딱히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나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예은과 함께라면 자신이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솔로랭크의 최정상에 오른다.
북미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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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주인공이 고자인데 대한 변명이랄까요..
연애 파트의 진도를 확확 나가면 좋겠지만 그러면 게임파트 쓸 때 영향이 갑니다ㅠ.ㅠ
애인사이가 되면 서로 신경쓸 게 많아지잖아요?
대화 하나 주고 받을 때도 친구사이와는 다르니까요.
진도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나가려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니만큼 조금만 너그러이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한 편 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