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직 나만이 마스터다-334화 (33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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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피곤에 쪄들었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다크서클.

예은의 눈두덩이에 엷게나마 배어 있다.

남들은 다 쉬고 있는 성탄절에 정말 고생이 많았다.

"됐냐? 만족해?"

살짝 짜증이 어려있는 어조로 예은이 나를 향해 툭 쏘아붙인다.

그러고선 뾰로통한 얼굴로 흘겨본다.

크리스마스에 하루종일 게임을 한 것도 짜증의 원인 중 하나겠지만.

아무래도 피곤함이라는 원초적인 불쾌함이 가장 큰 이유일 터다.

현재시간 11시 59분.

나와 예은은 방금 전까지 게임을 했다.

밥먹는 시간과 쉬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부단히 솔로랭크를 돌렸다.

피곤함이 정말 한계까지 쌓였다.

현재 순위를 보자면 나와 예은의 듀오가 압도적.

2위는 아직 승격전조차 따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까지 차이를 벌려야 할까 싶겠지만 다 사정이 있다.

마스터에서 그랜드 마스터로의 승격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매일 밤 자정에만 승격이 결정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연패를 해서 강등이 된다면 승격을 할 수 없다.

혹은 경쟁자가 더 높은 점수를 따게 되면 순위가 뒤바뀌어 버린다.

그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오늘 안에 결판을 내려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방금 전 게임에서 승리를 따냄으로서 나와 예은은 마스터 티어로 승격이 이루어졌다.

이윽고 시계의 초침이 12시에 도달하자 모니터 화면엔 축하의 메세지가 떠올랐다.

"야, 우리가 시즌 초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다. 어때, 좋지?"

"좋긴 개뿔이. 이 멍충이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틱틱대긴 하지만 이래 봬도 예은은 골수 롤 유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싫어할 수가 없다.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의 달성, 그것도 1위라니.

롤 유저라면 기뻐할 수밖에 없는 과업이다.

나와 예은이 도달한 곳은 그랜드 마스터 0점.

만약 우리와 동등한 점수, 혹은 1점이라도 더 높은 이가 있었다면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라는 소리를 하기 애매했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고 겨우 이틀째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를 전부 바쳐 일구어낸 우리의 업적을 부정할 수 있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 된 거면 나 가서 자도 되지? 하품 나올 것 같단 말이야."

"어제처럼 내 방에서 자는 것도 환영이지만."

들뜬 나머지 헛소리를 나오자 예은이 꿀밤으로 받아친다.

그러고 보면 머리를 맞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 녀석의 사이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이지만 변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지.'

어쨌든 간에 이틀 간의 대장정이 끝나고 시즌3 북미의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무언가 소중한 걸 포기한 듯한 기분이 들지만 어디까지나 기분 탓.

지금쯤 래딧은 난리가 났을 테다.

이를 확인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진 일이겠지만 일단은.

'나도 이 이상은 한계야.'

예은이 내 방을 나간 후.

나는 던지듯 침대에 골인해 몸을 눕혔다.

괜찮은 척 했지만 슬슬 눈이 감기는 게 피로치가 한계까지 쌓였다.

모 게임으로 따지면 경험치를 더 이상 얻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최근엔 정말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피곤했어.'

어제 음식과 곰인형을 사러 시내를 돌아다녔던 것도 그렇고.

이틀 전에 미리 사뒀던 목도리를 고를 때도 제법 시간이 소요됐다.

선물이라는 게 참 묘하다.

내 손을 떠나간 이상 상대의 것이라는 것을 암에도 집착하게 된다.

여러 방면으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필요하지 않은 선물이라면 어떡할까.

실용도가 높으면서도 부담이 되지 않은 부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목도리로 품목을 한정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선물 중에서도 옷은 까다로운 부류다.

그나마 목도리니까 다행이지, 여성의류를 고르라고 했으면 찬성 5표 반대 0표로 항복하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소리지만 목도리도 까다롭다는 사실은 매한가지였다.

예은이 목에 두른 모습을 상상하며 골랐다.

그러면서 이곳 로스앤젤레스도, 한국에서도 쓸 수 있는 적당한 길이와 두께.

일반적인 목도리치곤 조금 짧다.

딱히 돈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재질이 좋지 않으면 착용감도 별로라 오래 쓰지도 못해 큰 마음먹고 지갑을 열었다.

이러저러 생각할 게 많다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선물 하나 사는데에 몇 시간이나 백화점을 돌아다니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여자들이 백화점을 던전마냥 도는 기분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바였다.

'뭐, 어쨌든 간에….'

눈치를 보아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여 보였다.

적어도 싫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낌새가 눈에 띄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

.

.

* * *

로드 오브 로드의 세 번째 시즌.

이렇게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숫자 놀음같이도 보이지만 새 시즌의 중요도는 각별하다.

그도 그럴 게 로드 오브 로드의 유저 수가 부쩍 늘게 된 건 시즌2부터니까.

시즌1과 시즌2의 막바지 누적 유저수를 비교해보면 과장없이 열 배는 차이가 난다.

그렇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새로운 시즌의 솔로랭크를 처음으로 정복해낸 패자가 과연 누구일지 뜨거운 관심이 모이고 있는 와중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북미 뿐만 아니라 한국, 혹은 유럽 또한 마찬가지인 일.

전세계의 모든 로드 오브 로드 팬들은 각자의 서버에서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한 이를 우러러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날고 기는 기라성들 사이에서도 급이 나뉘는 법.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하는데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린 국가는 다름아닌 북미였다.

─에러갓이 그랜드 마스터찍을 때 너희는 뭐했냐?

크리스마스랍시고 놀러나 다니고.

여친이랑 데이트랍하면서 히히덕 거리기나 하고.

그러니까 점수를 못 올리지 어휴 쯔쯧.

└죄송합니다. 여자친구랑 데이트해버렸어요..

└친구들이랑 크퀘했습니다..

└저희가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에러갓 만세!

크리스마스 이브와 축복어린 성탄절을 전부 솔로랭크에 투자하는 프로게이머라니.

Unknown Error는 과연 모든 게이머들의 롤모델이 아닐 수 없다.

가진 바 재능에 더해 노력까지 아끼지 않고 있는 그이기에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첫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한 거야 당연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직업 정신이 투철해도 너무 투철한 거 아니냐..?

나 같으면 뮴뮴 누님이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 같은데.

└정말 게임밖에 모른다니까. 어떻게 크리스마스에 하루종일 겜만 돌릴 수 있지? 여친 놔두고.

└그러니까 성공하는 건지. 정말 에러갓은 노력의 보상을 톡톡히 받는 것 같다.

└재능충이 노력도 하는데 한가히 데이트나 해버린 나는 점수 못 올려도 할 말이 없다. 제가 졌습니다.

└여친이랑 노닥거린 놈들은 진짜 반성해라.

Unknown Error가 허구헌날 게임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엄연한 오해의 산물이다.

아무리 프로게이머라고 해도 사생활이 존재한다.

데이트 장소가 남다를 뿐 Unknown Error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은 남자다.

─에러갓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크리스마스에 하루종일 게임을 하면서 프로게이머로서의 직업정신을 잃지 않고!

소환자의 전장에서 뮴뮴 누님이랑 수십 판 씩이나 데이트도 하고!

팬들에게 더 나은 게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개인 스케줄까지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그 마음씀씀이를 정말로 모르겠냐?

└사실이라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일이네요.. 에러갓도 뮴뮴 누님도..

└뮴뮴 누님도 안타깝다. 남자친구가 진성 겜돌이라니.

└근데 둘이 사귀는 건 맞아?

CLC가 새로 낳은 슈퍼스타 Error선수와 MyumMyum선수.

그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다.

부스 안에서 알콩달콩한다던지, 그리고 CLC 내부에서 직접 새어나온 소문이라던지.

확정이 안 났을 뿐이지 공공연한 기정사실이다.

물론 질투를 하는 팬들도 많다.

특히 뮴뮴 선수의 팬클럽.

갤럭시 크래프트때도 그랬지만 여성 프로게이머들은 은근히 팬층이 두텁다.

E-스포츠 판이 기본적으로 남자들 뿐인 세계이기에 그 희소가치는 대단하다.

그런데 뮴뮴 선수는 남자 선수들 못지 않게 실력이 뛰어나기까지 하다.

더욱이 현 최고의 슈퍼스타 에러갓의 뒷바라지를 해내며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특히나 결승전 마지막 세트에서 보여준 슈퍼세이브는 가히 감동적인 수준.

점멸까지 사용해 Error선수의 자드를 기적으로 살려낸 플레이는 윈터시즌 최고의 명장면으로 집계되었다.

그 감동의 명장면은 크게 화제가 되어 Error선수의 팬이 만든 매드무비.

북미에서는 몽타쥬(Montage)라 불리는 영상에 크게 편집된 건 당연한 지사였다.

과거 여자 선수라고 깔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더 이상 MyumMyum선수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결정적으로 새로운 시즌의 랭크게임에서 못이 박혔다.

Unknown Error 뿐만 아니라 뮴뮴 선수도 시즌 첫 그랜드 마스터로 입성했다.

정확히는 동시에 해냈다.

듀오 게임만을 돌렸기에 승격 시기 또한 같았던 것.

그렇기에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근데 뮴뮴 누님이랑 에러갓이랑 누가 1위야?

둘이 듀오로만 돌려서 승격을 같이 했던데 이 경우는 누가 1위지?

CP.GG에서 보면 Unknown Error가 1위로 랭크돼 있긴 하던데.

└그럼 에러갓이 걍 1위 아니야?

└시스템상은 그런데 이번 건 오류 아닐까?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오류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안타깝게도 오류까진 아니다.

아무리 새 시즌이 되면 티어가 리셋된다고는 하지만 전 시즌의 MMR이 미묘하게나마 영향을 미친다.

같이 큐를 돌렸을 때 괜히 Unknown Error가 1픽이었던 게 아니다.

같은 판 수로 마스터 티어에 도달해 그랜드 마스터로 승격을 한다 해도 그 약간의 MMR차이로 인해 1,2위가 결정된다.

즉, Unknown Error가 1위로 기록돼 있는 건 알 수 없는 오류일 수 없다.

─크리스마스에 소환자의 전장에서 데이트를 하다니.

프로게이머 커플다운 어메이징한 데이트 코스다..

그래도 에러갓이니 이해한다.

└진짜 다른 놈이었으면 확 테러해버렸을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게임 내에서도 궁합이 죽여주지. 침대에서는 또 모르겠지만 말이야 LOLOLOL~

뮴뮴 선수의 팬클럽 회원들조차 에러갓과의 관계는 부정하지 못한다.

현 CLC는 Unknown Error로부터 조명이 시작된 팀이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치.

그 둘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팬들도 수두룩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커플이라는 것조차 추측일뿐, 오피셜은 아니니 더더욱이다.

─역시 한 대 맞지 않았을까?

아무리 어울려 줬어도 역시 한 대 맞았을 것 같은데.

뮴뮴 누님 성격이면 에러갓 볼따구에 손바닥 자국 선명하게 찍혀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LUUUUUUL

└솔직히 어지간한 커플이었으면 킬각 수준임.

└참고 사귀는 것 보면 뮴뮴 누님도 대단하긴 하지만 역시 남자는 일이 중요해.

└지나간 일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평생 바가지를 긁히겠지.

└ㄴ결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윈터시즌의 우승자가 북미 서버의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를 달성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 주목받을 일이지만 남자로서 생각해도 부러운 일이었다.

다른 남자들이 게임이냐, 여친이냐 째째하게 골머리를 싸맬 때, Unknown Error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발한 메타를 제시했다.

데이트라면 역시 소환자의 전장에서!

실제로 시도하다간 귀싸대기로 끝나지 않겠지만서도 참신한 해법인 것 또한 사실이다.

장본인인 Error선수는 뮴뮴 선수에게 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냈을까.

내심 궁금하면서도 흐뭇한 일이다.

로드 오브 로드의 첫 번째 프로게이머 커플.

1세대 E스포츠인 갤럭시 크래프트 시절에도 프로게이머 커플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성적까지 따라와 주진 못했다.

게이머 일과 연애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Unknown Error는 두 마리의 토끼를 훌륭히 잡아냈다.

어떻게 납득을 시켰는지는 몰라도 크리스마스의 데이트를 소환자의 전장에서 무사히 완료했다.

에러갓의 행보는 남자게이머들의 존경심을 절로 자아내고 있었다.

이렇듯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LCF를 앞에 둔 북미의 분위기는 훈훈 그 자체.

하지만 북미가 특이한 거지 한국과 유럽 등지가 유별나게 살벌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즌의 첫 번째 그랜드 마스터 달성.

하도 압도적으로 진행된 북미는 감히 넘보는 자가 없었지만 다른 서버에서는 피와 살이 튀기고 있다.

특히 한국과 유럽에서는 신흥 강자들이 속속들이 떠오르며 제 나름대로의 자기 주장을 완고하게 펼치는 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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