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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핫숏을 대신해 예은이 CLC의 정글러로 들어가 세 차례 게임을 진행했다.
나는 그 한 판, 한 판을 전부 집중해서 보았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느낀 점 또한 정리가 가능하다.
간략하게 이야기 하자면 한 마디로.
'이 팀, 잘도 굴러갔네.'
혹평이 나올 만도 하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성의 문제.
팀원들이 조금 심각할 정도로 따로 논다.
플레이 스타일이 정말로 제각각이다.
구체적인 팩트로 때려볼까.
CLC의 탑라이너는 탑신병자의 귀감이다.
라인 쭉쭉 밀면서 마음대로 딜교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 적 정글을 부르게 되고 이를 팀원이 커버해줘야 한다.
그런데 미드라이너는 한 그루의 뿌리 깊은 나무같다.
좋은 비유가 아니라 미드에서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소리다.
속된 말로 미드 지박령.
나는 지금 최대한 좋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다.
그 와중에 봇라인만이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며 캐리를 목표하고 있다.
그러다 코스프레가 들통나서 배인충 마냥 구르다 장렬히 산화한다.
산화하지 않는 판에선 캐리해낸다.
팀랭크인지라 당연 이기는 쪽이 되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 멤버 고대로 대회 들어가면 한 게임, 한 게임이 도박이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트리플리프트가 무리한 플레이를 하는 것은 그만의 잘못은 아니다.
성향 자체가 공격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지나치기 때문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도 무리해서 변수를 만들지 않으면 게임이 힘들게 굴러갈 상황이었다.
'맵리딩이 조금 떨어진다는 것도 단점으로 생각을 해둬야 하겠지만.'
합류 속도라던지 갱회피 능력이라던지.
그러한 부분에서 트리플리프트는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만큼이나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트리플리프트 다운 피지컬을 뽐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등가교환이랄까.
더욱이 이는 서포터인 카우스터가 어느 정도 보완을 해주고 있으니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일단은 탑과 미드부터..어떻게 하는 편이 좋겠지.'
물론 바이바이가 공격적인 플레이를 주로 삼는 만큼 종종 캐리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서로의 실력이 비등한 대회무대에서는 장점이라고 봐주기 힘들다.
설사 솔킬을 땄다고 해도 탑차이로 게임을 비비는 것은 말마따나 쉽지가 않다.
이렇듯 대충 보아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 CLC가 굴러갈 수 있었던 까닭.
팀의 리더였던 핫숏이 내 생각 이상으로 조율을 잘 해내온 모양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다른 컴퓨터를 통해 세 게임을 전부 지켜보았다.
연습실 내의 컴퓨터들은 연결되어 있어 원한다면 선수 각자의 개인화면을 넘기듯 관찰할 수 있다.
코치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좋은 시스템.
그 덕분에 단순 관전으로는 알기 힘든 부분들을 포함해서 매 게임의 관전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배는 높았다.
실마리가 될만한 요소들을 잡을 수 있었다.
"시현도 슬슬 한바탕 하는 게 어때?"
"그럴까요? 그런데 어느 포지션으로 들어가야 할지.. 잠깐만 고민해보고요."
2군의 멤버들과는 헤어지게 됐지만 코치인 라이로는 당연 1군의 연습에도 붙는다.
나는 라이로의 물음에 대강 대답하면서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는 두 번째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늦어도 다음 한타에서 넥서스를 밀릴 것이다.
이대로 한 판 더 관전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라이로의 말마따나 참전하는 것이 시기적절하다.
"세 번째 게임은 제가 정글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은을 대신해서 내가 들어간다.
CLC의 멤버들은 교체가 없기에 가장 피부에 와 닿는다.
그들로서도 새로운 멤버의 성향을 파악하기에 이상적이다.
하나 큰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에러갓.. 본명은 시현이었던가? 미드라이너인데 정글로 들어가도 괜찮겠어?"
"상대팀의 수준이 별로 높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우리랑 맞추는 건 솔직히 버겁다고?"
솔로랭크 기준으로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가 섞인 팀랭 정도야 어지간하면 버스 탈 수 있는 멤버다.
하지만 버스를 타서야 의미가 없다.
평소와 다른 속도감에 파묻혀 얼타다가 결과적으로 이기기만 할 뿐이다.
자기 자신이 어떤 게임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실력이 미달일 때의 이야기고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는 소리.
"이래 봬도 제가 정글에도 일가견이 있거든요. 실수를 한다면 선배님들이 호되게 혼내주시죠?"
"크하, 마음에 들었어 역시 에러갓이야. 아주 패기가 넘치는데?"
CLC의 기존 멤버들의 입장에서도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리고 내가 뜬금없이 정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결승전에서 끠들스톡 정글을 했다.
더욱이 솔로랭크에서도 제법 정글 선택이 잦았다.
게임에 직접 참전하는 만큼 이야기를 섞을 일도 많아졌다.
하하호호 떠들며 친목을 도모한다.
현실 내에서 친해지는 것 또한 팀플레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시작하는 내 첫 번째 게임.
이대로 라면 팀에 섞여드는 큰 문제가 아닐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신없는 바람에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트리플리프트만은 끝끝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
.
* * *
─Welcome to Summoner's field.
익숙하디 익숙한 여성 아나운서가 게임의 시작을 알린다.
대회는 커녕 스크림도 아니니만큼 프리한 분위기지만 이 순간만은 긴장의 끈을 놓칠 수가 없다.
팀랭크는 인베 타이밍이 제법 사나우니 말이다.
'대회에서야 서로가 안전하게 가려는 경향이 있지만 팀랭크는 아니지.'
간혹 풀리츠크랭커라던지 변수가 있는 픽을 준비하지 않는 이상 무난무난하게 가려한다.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 선취점을 챙겨 유리하게 가기 위해서 도박수를 두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내가 속했던 CLC 2군은 롤챔스 내내 상대적으로 약팀 취급을 받았다.
우리를 상대로 초반부터 인베 싸움으로 변수를 만드려는 팀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행하고 있는 게임은 팀랭크다.
그러니만큼 온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얼핏 살펴보니 상대는 프로팀.
프로팀끼리 팀랭크에서 만나면 대부분 인베는 피하려고 한다.
그럴 텐데도 왜인지 뒷골이 싸하다.
딱히 육감을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인베를 대비하는 편이 나아보인다.
"우리도 모여서 인베 대기하는 게 어때요?"
"인베? 에이, 설마 오겠어? 이런 팀랭크에서 약빨고 게임하는 것들이.. 있네?"
빅풋이 인베를 온 풀리츠크랭커의 그랩에 당겨지며 허탄함을 내뱉는다.
그러게 미리미리 조심을 하라니까.
엎질러진 물가지고 왈가왈부 하지는 않겠지만 킬을 먹은 상대가 하필 탑이었다.
"오 마이 갓! 나이즈가 여제의 눈물방울 스타트를 하다니, 이건 지옥이라고 지옥! 빅풋 너 로밍도 안 올 거잖아?"
"미안 미안. 한타가서 캐리해 줄테니까. 하, 근데 이거 짜증나네."
그런 변명은 라인전이 게임의 전부인 탑신병자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번 게임은 내 어깨가 생각 이상으로 무겁다.
팀랭크에서 만나는 그저 그런 아마추어면 모르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중국 프로팀의 1군인가. 현시점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중국의 프로게임단 로얄 CN.
북미와 유럽, 한국 또한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자국 내 프로리그가 존재한다.
차후에는 다른 나라가 넘보기 힘들 정도로 판이 커진다.
하지만 현재는 북미와 유럽에 비해 약세를 보이는 중국 리그.
그저 그렇다고 할 수 잇는 중국 리그에서조차 애매하기 짝이 없는 팀, 그게 바로 로얄 CN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완전 3류 같고 그게 또 틀린 소리도 아니지만 무작정 무시할만한 팀도 아니다.
시즌2 후반에 데뷔를 해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는 못했을 뿐 성장 중이다.
서머시즌부터는 제법 상위권 반열에 올라간다.
'뭐, 적당히 팰 맛이 나는 팀이겠구만.'
딱 이 정도 느낌의 상대다.
그런 데다가 인베로 킬까지 가져갔으니 더더욱 패줘야 한다.
진검승부라 할 수 있는 랭크게임에서 야비하다는 말은 통용되지 않지만, 프로팀 간에서는 인베가 매너가 없는 플레이인 게 사실이니까.
팀랭크에서 간혹 프로팀들끼리 만나면 일단 인사부터 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인베라던지 라인스왑이라던지는 최대한 절제하는 게 보통이다.
서로 간에 승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는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
그런데 저 로얄 CN은 어느 쪽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우리가 상대팀이 프로라는 걸 눈치챈 것처럼 상대 또한 우리가 CLC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안 좋게 첫 이미지가 박혀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중국 프로들은 자신들보다 잘하는 나라에 대해 열등감을 조금 심하게 가진단 말이야..'
우리 CLC의 트리플리프트도 중국계 미국인 인지라 말을 꺼내기는 힘든 부분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차후 한국이 로드 오브 로드의 최강자 반열에 들게 된 이후로 얼마나 꼬치꼬치 안 좋은 일이 많았는지.
특히 중국 프로들이 한국 서버 랭크게임을 한답시고 깽판을 친 사건은 정말로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인구수가 많은만큼 헤까닥한 사람의 수도 비례해서 많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기엔 솔직히 사건사고가 너무 많아 선입견이 생기고 말았다.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묵사발을 내놓는 편이 좋겠지.'
내가 이번 판에서 꺼낸 챔피언은 조금 특이하다.
이걸 정글로?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챔피언.
그럼에도 시즌3에는 대세가 되는 정글러가 된다.
다름아닌 개서스가 말이다.
개서스는 시즌3 초기에 무려 주류 정글러였다.
대회에서 픽밴률이 상당했다.
CC기라고는 하나밖에 W스킬, 노화 하나밖에 없는 개서스가 인기픽이 될 수 있었던 이유.
그 노화가 공격속도 위주의 챔피언들을 카운터치기에 워낙 좋았기 때문이 크다.
'노화와 공격속도 둔화비율이 같았으니.'
마스터시 최대 95% 둔화시킨다.
이동속도가 느려지는 거야 속박과 비슷하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공격속도다.
공격속도가 95%정도 둔화되면 아예 움직이지가 않을 정도다.
이 점을 주목해서 탄생한 개서스 정글은 시즌3의 스타트를 끊는 대표적 OP정글러.
물론 나는 다르게 쓸 예정이지만.
'여기에 내 오리지널을 조금 스까서 캐리력을 높여보자.'
본디 개서스 정글은 E스킬 불길의 장판으로 빠르게 정글링을 목표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노화를 사용해 간간히 갱킹을 노린다.
현시점에서 사거리가 제법 긴 노화스킬은 갱킹에도 제법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플레이 방식은 내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다름아닌 캐리력이 떨어지기 때문.
그렇기에 나는 이전에 솔로랭크에서 선보였던 방식으로 개서스 정글을 플레이하려 한다.
따악!
천천히 스택을 쌓는다.
그러면서 후반 캐리를 지향한다.
팀원들이 원하는 정글러의 이상과도 꽤나 거리가 멀다.
알고 있음에도 내가 하고 많은 정글러들 중에서도 굳이 개서스를 픽한데는 이유가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만.. 느긋하게 갈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으니까.'
현재의 CLC 1군.
각각의 팀원들이 너무도 따로 논다는 느낌이 강하다.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보단 나 또한 따로 노는 게 당장은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정신 나간 방법 같아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을 예측하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다.
탱탱볼의 규칙성을 파악하기 위해선 아무리 나라도 시간이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이 게임이 시작하기 전엔 이기는 것은 주목적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저 중국팀을 묵사발 내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저런 팀을 만날 거라 당연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한가함이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정글을 돌며 내 움직임에 따른 팀원들의 변화를 관찰하려고 했다.
즉, 내 개인의 플레이를 하면서 팀원들의 플레이 또한 면밀히 분석한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기 위해서는 개서스 정글이 적임이었다.
여기에 더해 성장기대치 또한 맛깔나는 개서스는 승리 또한 놓치지 않는다.
'탑 위주로 커버를 하면서 봇라인의 다이브만 봐주면 스무스한 느낌으로 갈 수 있다.'
아무리 개인 성장 위주로 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플레이는 반드시 해야 하는 법이다.
이는 RPG 정글러가 대회 게임에서 쓰일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비춰질지언정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동선 하나하나를 신경쓰면서 정글을 도는 플레이.
아군의 기량이 밀리거나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심각한 손해로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개서스 정글은 이 손해를 최소화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군이 당했습니다!
탑라이너 바이바이가 다이브 갱킹을 당해 죽어버렸다.
허무하게 내줘버린 퍼블이 만들어낸 스노우볼.
이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이다.
공격적인 라인전 성향을 가진 바이바이에게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서로가 동등한 상황이어야 탑신병자인 바이바이의 장점이 부각된다.
그런데 상대가 퍼블을 먹고 시작하면 장점이 무색해지고 단점은 역으로 두드러진다.
내가 다이브를 봐줬다고 해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상황.
어쩌면 나까지 죽거나 동선이 말릴 수 있어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군이 당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다른 것을 챙긴다.
쿠워어어어!
정글 개서스로 Q선마를 하면 초반 갱킹도, 정글링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단일 데미지가 강력하다.
주위의 적들에게 막대한 퍼센트 데미지를 선사하는 개서스의 궁극기, 불타는 격분을 발동하면 더더욱이다.
─용을 처치했습니다!
수비적인 정글러의 운영 공식.
꼭 공격적으로 갱킹을 가는 것만이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기에 치명타 개서스는 안성맞춤인 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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