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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CLC의 멤버들과 대면하게 된 첫 날이다.
CLC분위기가 한국 프로팀처럼 빡세지는 않아 정확히 한 판만 더하고 끝을 냈다.
그런데 그 한 판에서 로얄 CN을 다시 상대팀으로 만나버렸다.
결과는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완승.
선취점이라는 변수가 없다면 로얄 CN은 우리 CLC를 상대로 비벼 볼만한 수준대가 아니다.
미안하게도 체급 자체가 맞지를 않는다.
그 판을 끝으로 연습게임을 종료되었고 신고식을 가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와 예은의 입단식.
딱히 거창한 건 아니고 흔히 말하는 회식 자리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는 편이 이야기를 나누기 편하기 마련이다.
"로얄 CN인지 뭔지 팀명만 거창했어. 20분 동안 기다리다 서렌치는 꼬라지가 어찌나 웃기던지."
"실력도 별 볼일 없더라. 우리 2군이 100배는 잘하겠다."
"그야 그렇겠지! 여기 있는 에러갓을 중심으로 우승까지 했는데."
입단식이라고는 해도 딱딱할 건 없었다.
미국은 한국 마냥 선배들의 자부심이 유별나지 않으니까.
나나 예은도 특별히 예의차리지는 않는 타입이고 말이다.
더욱이 나와 예은은 이래 봬도 경력 있는 신입.
1군에 채 들어오기도 전에 롤챔스에서 우승을 해버렸다.
회식 자리는 호쾌하고 프리해 순수하게 술과 이야기를 즐기기 좋았다.
분위기는 빠르게 무르익었고 지금은 이미 종장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다들 술이 많이 들어간 상태.
오늘 로얄 CN에 개쪽을 안겨줬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쭉쭉 들이켜고 있다.
"로얄 CN도 그렇고 중국팀 신진팀들이 참 문제가 있긴 해. 아, 내가 말하는 건 어디까니나 일부팀들이니까. 중국에 대해 뭐라 할 의도는 없었어."
술김에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빅풋이 트리플리프트를 바라보며 호들갑을 떤다.
아무래도 트리플리프트는 중국계 미국인.
자신의 조국이었던 나라에 대한 애착에 조금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섣부른 오해를 할 정도로 트리플리프트는 고지식하지 않았다.
"신경 안 써. 돼먹지 못한 놈들 중에 프로하는 놈들이 간혹 있지. 꼭 그 녀석처럼 말이야."
연습게임 내내 말이 없었던 트리플리프트가 빅풋의 사과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분위기가 헤지지 않는 건 좋을 일이지만 뒷말이 신경 쓰인다.
들고 있던 술잔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 놓은 것 보면 역시 의중이 있다.
'그 녀석' 이라는 말.
모르긴 몰라도 내가 팀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겠지.
궁금하긴 하지만 이제 막 팀에 들어온 내가 꼬치꼬치 캐물어볼 수 있는 부류의 일은 아니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은 채 술잔을 기울였지만 다른 쪽에서 반응이 있었다.
다름아닌 핫숏의 입에서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장난기가 있으면서도 할 말, 못할 말 정도는 가릴 줄 아는 핫숏이지만 술이 거하게 들어간 상태인 듯 입에 담기는 데로 내뱉어 왔다.
"아, 그 녀석? 벌써 반년이 넘었네. 그 독설가 양반이 팀에 있었을 때.. 참 거지 같으면서도 재밌었지."
"그 녀석이 내뱉는 욕지거리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고? 너도 참 맛탱이가 갔어 핫숏."
트리플리프트 또한 상당히 취했는지 과격한 이야기가 오간다.
'그 녀석' 이라 부르고 있는 이와 얽혀 있는 사정이 있는 듯하다.
그렇게 둘의 대화를 별 생각없이 쭉 듣고 있다보니 나도 하나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잠자고 있던 기억이 있엇다.
'설마..! 세인트조지아를 말하는 건가?'
순간 들고 있던 맥주잔을 놓칠 뻔했다.
떠올리고 나니 지금껏 몰랐던 게 신기할 지경이다.
핫숏과 트리플리프트가 말하던 '그 녀석' 이라 함은 다름아닌 CLC의 이전 정글러였다.
'확실히.. 존재감이 큰 사람인데 어쩌다가 지나치고 말았던 거지….'
변명이긴 하지만 나라고 모든 사건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어디까지나 큰 틀.
세부적인 것은 연상의 계기가 쥐어질 때 어찌저찌 떠오르는 정도다.
하지만 변명으로 지나치기엔 세인트조지아란 선수는 특별하다.
'지금의 CLC가 있게 만들어준 선수 중 한 사람이니까.'
세인트조지아.
로드 오브 로드의 골수 유저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전설적인 로드 오브 로드 1세대 프로게이머.
단순히 옛날에만 잘한 게 아니라 꽤나 오랜 기간 자신의 폼을 유지하기도 했다.
CLC에서 활동하던 그는 방출 당했다.
그의 기량이 떨어져서 라기 보단 팀원들과의 마찰 때문.
특히 핫숏과 트리플리프트와는 사이가 많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방출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다른 팀으로 옮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약 다른 팀을 갔다면 내가 알아야 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윈터시즌에 참가를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우리와 경기를 치르지 않은 팀도 기본적인 사전조사는 필수로 진행했다.
각 팀의 에이스가 누구인지 정도는 당연히 알아둬야 하니 말이다.
'명단에는 분명히 없었어.'
내 기억에 따르면 윈터시즌에 참가한 팀들 중 세인트조지아가 속한 팀은 없었다.
있으면 신경이라도 썼을 텐데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다.
세인트조지아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여기서 비롯됐을 터다.
"사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 녀석 성격은 원래 그랬고 우리가 한 번 더 참았어야 했어. 시기가 조금 안 좋았게 맞물렸지."
"그걸 더 참으라고? 핫숏 내가 너를 다 좋아하는데 그렇게 물에 물탄 듯한 성격만큼은 언제 한 번 반드시 뜯어 고쳐줄 거야. 우리가 희생한 게 몇개인지 그 빡대가리로는 기억도 못하지?"
얽혀있는 사정을 대략적이나마 알게 되니 트리플리프트가 저렇게 화를 내는 까닭도 이해가 간다.
케케묵었던 감정이야 어느 정도 식었겠지만 그 여파는 오랜 기간 CLC를 괴롭혔으니까.
대표적으로 세인트조지아의 방출이 계기가 되어 핫숏은 포지션을 옮기게 됐다.
미드를 맡아줄 사람은 있었지만 정글러는 구할 수 없었다는 이유.
결국 다양한 포지션을 할 줄 아는 핫숏이 자진해서 정글러를 맡았다.
당연하게도 급작스런 포지션 변경은 좋게 작용할 턱이 없다.
롤드컵의 부진도 그렇고 핫숏이 CLC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팀의 오더에도 문제가 생겼을 테지.'
세인트조지아는 인격적인 문제가 있을지언정 카리스마 하나만은 넘치는 선수다.
핫숏과 함께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떠남으로서 CLC이란 팀에는 큰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남은 나머지 한 명의 구심점.
핫숏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겠지만 턱도 없이 부족했겠지
두 명이서 맡았던 역할을 혼자 부담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휴식기간 가진 것 치고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구만.'
오늘 있었던 연습에서 CLC는 정말 호흡이 맞지 않았다.
왜 이렇게 팀이 따로 노나 했는데 그 이유가 이제서야 납득이 간다.
나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웃한 것도 그렇고 ,내심 떨떠름한 부분이 있었는데 뒷사정을 알고 나니 깔끔하게 풀어진다.
'심지어 이제는 핫숏까지 빠져 버렸으니 더욱 심할 만도 한가.'
규칙성도 없이 아주 탱탱볼마냥 제멋대로 튀겨 대는 팀.
오늘의 연습게임을 바탕으로 내가 CLC에 내린 평가다.
이는 어쩔 수가 없는 문제였다.
휴식기간을 두 달이나 가진 데다가 팀의 주춧돌이 두 개나 빠져 버렸으니 말이다.
'힘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각 선수들의 기량이 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 기량때문에 조율이 힘든 것 또한 사실.
핫숏과 세인트조지아를 대신할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하다.
바로 내가 CLC의 새로운 기둥이 되어야만 한다.
.
.
.
* * *
입단식을 겸한 술자리는 일단 끝이 났다.
일단이 붙은 이유는 2차가 있기 때문.
하지만 2차의 참석 멤버는 전원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 단 세 명.
나는 핫숏과 트리플리프트를 따라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나섰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늦은 밤에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네.'
현재 시각 새벽 두 시.
외국인인 내가 보기에는 썩 좋다고는 볼 수 없는 로스앤젤레스의 치안 탓에 돌아다니지 않던 시간대다.
하지만 현지인이라 할 수 있는 핫숏과 트리플리프트는 개의치 않는지 좁은 골목길 안을 거침없이 들어간다.
목적지는 2차가 될 술집.
가는 길 내내 그 누구도 한 마디 말이 없다.
농담이라도 꺼내볼까 했지만 분위기가 엄숙하다.
세인트조지아의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핫숏도 장난스런 느낌이 사라졌다.
'뭐…. 가보면 알 수 있겠지.'
잡담이나 하려고 가는 2차는 아닐 것이다.
묵묵히 핫숏과 트리플리프트를 따라가다 보니 낡은 나무 간판이 내려져 있는 술집 앞에 도착했다.
단골 술집인지 굉장히 익숙하게 발을 내딛는 핫숏과 트리플리프트.
나는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술집 내부는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 날 정도로 대충 구색만 갖추고 있었다.
"마스터, 늘 마시던 걸로 세 잔. 안주는 적당히 주시고요."
"..출세한 이후로 오지도 않던 놈이 마시던 술을 내가 어떻게 기억해?"
고집 있어 보이는 인상의 40대 남자.
아무래도 그가 이 술집의 오너인 듯 보인다.
주고 받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핫숏은 이 술집의 단골인 듯하다.
막말을 듣고도 헤실헤실 웃고 있는 핫숏의 모습이 결정적이다.
"요즘 제가 바쁘거든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오잖아요?"
"제집처럼 뺀질나게 드나들던 놈들이 무슨. 그런데 멤버가 하나 바꼈네?"
주인장 아저씨는 속된 말로 츤데레 같다.
툴툴 거리면서도 이쪽 좌석의 술을 가장 먼저 챙겨준다.
다른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어 보이는데 핫숏과 상당히 오래 알고 지낸 모양이다.
"이곳은 원래는 세인트조지아.. 마르코와 오던 술집이었지. 그러다가 저 녀석도 추가됐고."
핫숏이 막 자리에 나온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면서 고개를 까딱인다.
까딱인 대상은 당연히 나와 핫숏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인 트리플리프트.
이 술집은 CLC의 원년 멤버인 핫숏과 트리플리프트, 그리고 세인트조지아가 자주 왔던 곳인가 보다.
"너를 여기에 데려온 까닭은.. 별거 없어. 그냥 술이라도 한 잔 더 하자고!"
언제나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금새 되찾은 핫숏이 실없게 지껄여온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정도로 내가 눈치가 없진 않다.
핫숏은 몰라도 트리플리프트는 나에게 할 말이 상당히 많은 듯 보이니까.
"마시는 건 저도 기본적으로 좋아합니다만. 연습 때도 그렇고 자리가 조금 찝찝하네요. 제가 트리플리프트하고는 아직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거든요."
어차피 술이 들어간 마당이니 지금 찌르는 게 적기다.
술 들어가면 평소에 못하던 말이 툭 떨어지는 건 만국공통.
한 번은 찔러야 할 말이라면 솔선해서 해버린다.
모르긴 몰라도 핫숏 또한 나와 트리플리프트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를 짐작하고는 있을 것이다.
"하하하! 그건 사실 간단해. 이 녀석 이래 봬도 겁나게 샤이하거든. 모르는 사람이랑 말을 못 나눠. 게다가 말이지…."
"닥쳐. 내가 얘기할 테니까. 안 그래도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어."
트리플리프트가 핫숏을 죽일 듯 노려본다.
세인트조지아에 대해서는 대략 알아챌 수 있었지만 트리플리프트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짐작가는 바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사정을 알고 나니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어? 하, 이 녀석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내가 만만한가 본데 나 그렇게 우스운 사람 아니야?"
"자자, 넌 이거나 먹으면서 진정 좀 하고. 웃겨가지고 숨 넘어가겠다."
핫숏이 트리플리프트를 뜯어 말리는 척하며 안주로 나온 닭다리를 그의 입에 쑤셔넣는다.
트리플리프트라고 딱히 진짜로 화가 난 건 아니고 부끄러운가 보다.
내가 트리플리프트에게 들은 사정이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쩐지.. 엄청나게 잘한다 했지.'
내가 북미의 그랜드 마스터를 목표로 Unknown Error의 솔로랭크를 돌렸을 때.
마스터티어 즈음 해서 도라이븐을 한창 해댔었다.
그때 상대팀으로 만난 헤이클린이 프로급으로 잘해서 고전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분명 프로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트리플리프트였을 줄이야.'
웃음이 솔직히 새어 나온 건 정당방위다.
당시 나는 트리플리프트의 부캐아니냐 하는 소문을 떠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본인이 나를 정말로 저격했다니.
웃음 참기 대결을 한다면 1초 안에 대패 확정이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웃긴 일이다.
롤판이 좁다 좁다 하지만 이 정도로 좁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긴 나같아도 나 자신으로 의심받는 사람이 나온다면 실력을 시험하고 싶을 것이다.
트리플리프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네 녀석.. 원딜 꽤나 할 줄 알더군. 뭐, 프로 레벨에서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한 마디 내뱉은 트리플리프트는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기울인다.
나한테 왜 그렇게 과묵하게 있었을까.
마음 속으로 생각이 많았는데 별것 아니었다니 다행인 일이다.
프로레벨에서 먹힐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말 만큼은 대충 넘겨줄 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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