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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 파리.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물론 세계 어느 곳에도 역사가 깊은 도시는 적지 않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 나라 한국, 한국만 해도 근 반만년의 역사가 녹아든 땅이지 않은가.
하지만 프랑스의 파리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길거리에 즐비한 건물들 하나하나에서 역사가 살아 숨쉰다.
수백 년씩 된 골동품같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아무렇지 않게 세워져 있다.
이런 건물들을 보고 있자면 한국인으로서 하나 공통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펜 진짜 그으면 여기서 너죽고 너만 죽는다?"
"알아 들었으니 우리 주먹은 내려놓고 이야기 하자.."
지난 주말이 지나가고 이번 주의 주중도 다 끝나가는 목요일.
나와 예은은 비행기를 타고 파리를 향했다.
그리고 이미 도착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탄 후 파리 시내까지 와버렸다.
최종 목적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아무래도 관광은 필수가 아니겠냐는 생각이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좋게 좋게 가자고. 우리 말고도 관광객은 상당히 많아 보이네."
프랑스에 온지는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내는 이제 막 발을 디뎠다.
내가 미국 생활이 은근 오래되긴 했지만 이래 봬도 해외는 미국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해외를 프랑스 파리로 와버렸으니 들떠 벌리는 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넌 금수저라 여기저기 많이 가봤다며? 이해 좀 해줘라."
"닥쳐 이 촌놈아."
예은에게 이해를 바라다니 내가 잘못했다.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다.
최대한 두리번 거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이런 관광지에서 얼타는 여행객 분위기내면 그것만으로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분명히 들은 기억이 존재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제발 내가 알아서 하게 해줘.."
"크흠!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들어줄 요량 정도는 있지."
파리에는 몇 번 와본 적이 있다며 예은이 자진해서 안내를 하겠다 나에게 사정을 해왔다.
굳이 아는 척을 하고 싶다면야 어울려 주는 것도 남자의 도량.
나는 예은의 안내를 받으며 편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음.. 파리라. 그냥저냥 괜찮았어. 그래서 제 점수는요.."
"닥치고..나 피곤하니까 빨리 가서 짐 풀자..?"
몇 시간 놀지도 않았는데 예은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꾸준하게 운동을 하는 것을 추천을 해줬는데.
지난 주말에 조깅을 한 이후로 별다른 변화가 없다.
런닝머신같은 건 해도 괜찮은데 말이다.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확실히 아니지.'
딱히 성깔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행동에서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지만 느낌이 다르다.
지난 주말의 조깅 이후로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정말 눈곱만큼의 차이라 CLC 팀원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
오직 나만이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자, 다 왔으니까 내려."
관광 이후까지는 딱히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됐는데 자진해서 나를 챙겨주고 있다.
무언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편하니까 상관없나.
나와 예은이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한 달 이상 우리의 집이 될 장소였다.
"아직 아무도 없을 테지만 말이야."
"하아.. 졸라 피곤해. 나 가서 바로 잘거야.."
아무래도 피로가 제법 쌓인 모양새인 예은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짓누르며 고개를 흔든다.
미국에 있을 땐 몰랐는데 잠깐의 여행으로 많이 지친 듯해 보인다.
체력적으로 이렇게나 문제가 있었다니 대회가 끝나면 예은이랑 같이 등산이라도 다녀야겠다.
'그것도 한국에 돌아갔을 때의 이야기겠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겠지만.'
택시에서 내린 장소에서 아주 조금 걸어 올라가자 울타리가 눈에 띄인다.
그 울타리 내부가 바로 LCF에서 활약하게 될 선수들이 지내게 될 거처.
월드컵에서도 종종 언급이 되는 선수촌이란 동네다.
LCF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나와 예은은 이곳 선수촌에서 신세를 질 예정이다.
"CLC에서 오신 분들 맞죠? 안내를 맡은 아멜리입니다."
입구 쪽으로 가자마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달려오더니 인사를 해온다.
우리가 온다는 사실을 이미 연락받은 듯한 모습.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조금 고심이 됐는데 다행이다.
게다가 직원분도 정말 마음에 든다.
'미인이 환영을 해주니 거참 황송하기가 이를 데 없네.'
외국에는 참 미인이 많다더니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자신을 아멜리라 소개한 안내원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인이었다.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은 언뜻 흑발같이도 보여 익숙하다.
하지만 서양인답게 키가 크고 비율이 좋다.
복장은 간단한 화장에 사무복이지만 이건 또 이거 대로 좋은 법이다.
'그런데 왜 이리 등 뒤가 따가울까..'
조금 전까지 풀썩 쓰러지기라도 할 법한 상태였던 예은.
그래서 내가 짐까지 들어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졌다.
왜 또 무엇이 문제일까.
방을 가면서 천천히 물어보려던 찰나에 아멜리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였다.
"한 가지 미전달사항이 생겨서 양해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멜리가 꺼내온 이야기는 이미 한 번 들었던 내용이다.
원래라면 북적여야 할 이곳 선수촌.
하지만 아직 단 한 명의 선수도 입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LCF는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개최식까지 2주가 넘게 남지 않았나.'
최대한 빠른 시기에 입주를 결정한 팀도 다음 주다.
참고로 CLC도 다음 주에 온다.
그것을 암에도 나와 예은이 덜렁 먼저 와버린 이유는 적응기간.
핫숏과도 이야기를 했지만 신경을 써주었다.
만약 선수촌에서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면 호텔에라도 투숙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연락에 착오가 조금 있었나 봅니다. 설마 여성 선수가 올 거라고는 저희가 미처 파악을 하지 못해서…."
아멜리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정리가 됐다.
LCF에 참가하는 선수들 중 단 한 명도 여자는 없다.
대신 여성 스태프가 소수나마 존재하는데 그들을 위한 숙소는 아직 내부공사가 완료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방 두 개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저희도 그 부분을 고려해봤지만 내부 사정상 힘들 것 같습니다."
선수촌에는 여러 개의 건물이 있고 그 건물 하나하나에 한 팀이 통째로 들어간다.
건물을 통째로 빌려주기 때문에 다른 팀들이 사용할 숙소를 우리가 빌려쓴다면 또다시 그곳을 정비해야 한다.
한 마디로 CLC에 배정된 숙소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아멜리가 사정을 이야기 해왔다.
"그게 말이 돼요? 분명히 선수 각자의 개인정보는 보냈을 텐데요? 제 것도 분명 전달됐을 테고요."
"송구스럽습니다. 지금껏 여성 선수가 단 한 번도 존재한 이력이 없어서 서류 처리 과정에서 실수가 나온 것 같습니다.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실수를 한 사람 잘못이지 아멜리에게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한 예은이다.
숙소에 따로 개인실이 나뉘어져 있을 지도 모르니 일단은 참자고 예은을 달래려던 찰나.
다름아닌 아멜리가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현재 숙소는 E스포츠 프로게임단을 위해 새로이 리모델링된 상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나뉘어져 있던 방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연습실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거에요."
마음에 들긴 개뿔이.
내 마음이나 다른 프로들 마음에는 들지언정 예은에게는 완전 적신호다.
저러다 뚜껑 열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황급히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의문을 꺼내놓았다.
"그럼 수면은 어디서 취하죠? 설마 침실도..?"
"예, 팀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해 수면실 또한 하나로 합쳐봤습니다. 로드 오브 로드 라는 E스포츠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각별하게 신경을 써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스템이 차후 롤드컵 이후부터는 꾸준히 선택을 받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어요."
자신만만하게 지뢰를 밟아오신다.
수면실을 하나로 합치고 2층 침대를 여럿 배치해 현지에서의 팀원들간 화합과 전략 토의등에 유리하도록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그리고 실제로 사용하기까지 하셨다고.
예술의 나라 프랑스답게 색다른 시도를 해버렸다.
'시즌3 롤드컵의 개최국도 프랑스였지.. 진짜 골때리는 부분이구만.'
의도도 좋고 아마 과반수의 프로게임단이 만족스러워하지 않을지.
조심스레 개인의견을 내비쳐 보지만 예은의 안색이 무섭다.
나한테는 상관없지만 부디 아멜리에게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됐어. 어차피 너 아무 짓도 안 할 거잖아."
잠깐 화가 나 보였던 예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어온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와 예은을 숙소로 안내해주던 아멜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
.
.
* * *
아멜리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 도착했다.
그 내부는 정돈된 느낌.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
하지만 한 쪽 구석에 포장된 짐들이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쌓여져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하루이틀 거주할 예정이 아닌만큼 짐이 상당히 많다.
때문에 주요 물품을 제외한 대부분은 항공택배를 통해 보내 놓았다.
그 덕이 있어 나와 예은이 무거운 짐없이 즐겁게 관광을 마칠 수 있기도 했고 말이다.
"이게 내 거고. 이게 네 거고. 방까지 가져다 줄까?"
"..그래주면 고맙고. 나 자러 간다."
예은은 나지막하게 대답하더니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오는 길에 피곤한 듯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무언가 꺼림칙하다.
내가 오는 길에 눈치없는 척 장난친 것이 정말로 심기를 건드려버린 걸까.
나는 풀어야 하는 짐을 대강 푼 후에 예은이 있을 침실로 향했다.
침실 내부를 살펴보니 가장 구석에 있는 2층 침대 근처에 예은이 풀은 듯 해보이는 짐이 보였다.
그리고 그 2층 침대의 아래층에 예은이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있었다.
대충 겉옷만 벗어 놓은 것 보니 잠깐 눈만 붙이려는 모양.
열 두시간 가까이 됐던 비행기에서도 꽤나 잠을 잤으니 아마 그렇게까지 피로하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저녁 때쯤 알아서 일어나겠지.'
예은이 잠든 사이에 짐이라도 풀면서 숙소 내 시설들을 점검하고 있을까.
생각을 마치고 일어나려던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생겼다.
가슴 부근이 답답한지 살짝 풀어헤친 옷무새도 옷무새지만 얼굴.
이렇게 곤히 잠들어 있을 땐 정말 천사가 따로 없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녀석 정말 얼굴만은 빼어나다.
안내원이었던 아멜리도 상당힌 미인의 축에 속한다.
키도 크고 날씬하면서 어느 하나 모난 분위가 없다.
그럼에도 예은과 비교해서 생각하니 손색이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이런 생각은 실례겠지만.'
남자라는 생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래도 머릿속으로 살짝쿵 품평회를 여는 정도까진 괜찮겠지.
나는 자기합리화를 해대며 예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정말 흠잡을 구석이 없는 녀석인데.'
성격과의 갭이 너무도 크다보니 평소엔 잊어버린다.
이 녀석의 얼굴이 내 이상형보다 예쁘다는 사실을.
솔직히 조금 부담될 정도의 외모다.
사락.
예은을 바라본지 5분쯤 지났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를 사이에 내 손은 예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처음 생각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곳으로 쓸어담아 모아주자.
사소한 계기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 손가락은 예은의 얼굴까지 가버렸다.
'조금정도면 깨지 않겠지..?'
사실 전부터 궁금했다.
이 얼굴, 정말로 자연산인 걸까.
여자들은 보기만 해도 안다며 수다를 떨지만 솔직히 나는 암만 봐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한 번 만져보자.
실례는 커녕 점죄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인데다 예은이 깨버리기라도 하면 한바탕 난리 나겠지만, 그럼에도 꼭 확인해보고 싶다.
내 목숨과 등가교환할 가치.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네..'
오똑 서있는 콧날.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숨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눌러보니 물컹한 살덩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코에는 연골이 있을 텐데 그 최소한의 저항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캉하다.
점점 과감해져 꾸욱 눌러 돼지코를 만들어보기도 했으나 예은은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 한 번 자면 잘 안 깨는 스타일이었나.'
그 다음에는 귀.
귀 윗부분과 귓볼을 반으로 접듯이 눌러보니 이것 또한 저항감이 없다.
몸의 어느 부분 하나 부드럽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해 보인다.
나는 손가락을 다음의 부위를 향해 옮겼다.
'입술..까지만 하자.'
설사 들키지 않더라도 내 양심이 허락되는 마지막 장소다.
솔직히 한 번 만져 보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조금은 단단하다고 할 수 있는 코와 귀가 이토록 보들보들하다.
그러면 입술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손 끝으로 살짝 찔러보니 감촉이 있는 듯 없는 듯 주변의 살들이 내 손끝을 감싸온다.
더 눌러버리면 이대로 손 마디 부분까지 묻혀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사람의 살 같지가 않다.
단백질로 이루어진 살이라기 보단 보드라운 솜사탕같은 느낌.
이 선명한 연홍색의 입술이 내 뺨과 맞닿은 장소라니, 감회가 새롭다.
'딱 여기까지..!'
이대로 다음을 찾다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예은이 깨지 않도록 나는 아주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분명히 소리 따위 내지 않았을 텐데도 지금껏 닫혀 있던 예은의 눈꺼풀이 스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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