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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만약 처음부터 다 계획된 것이었다면 나는 이 녀석을 다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인건지 그조차 모를 정도로 농락 당했다.
"나 덮치려던 거야?"
코 잠에 들었던 듯한 녀석.
스르르 눈을 떠버린 예은이 내뱉은 첫 마디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이 녀석의 반응, 표정 모든 것이 전후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망가면 소리지른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잠깐 고민 하던 사이에 예은이 내 선택지 하나를 강제로 없에버린다.
이 녀석이라면 하고도 남겠지.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예은은 지금의 상황을 명백히 즐기고 있는 듯하다.
묘하게 기쁜 기색까지 엿보인다.
"너.. 깨있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글쎄? 잘 모르겠는데?"
헤실헤실 웃고 있는 게 참 악질이다.
어쩌면 이 오해로 예은이 나를 꽤나 오래 놀려 먹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장단을 맞춰줘야 이 상태를 풀어줄지.
예은의 입에서 이윽고 고문이 시작됐다.
"나한테 무슨 짓 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봐. 거짓말이 없다면 특별히 용서해줄게."
"……."
자신이 역력한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내가 이런 것 가지고 부끄러워 할 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말해주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너, 자고 있는 얼굴은 예쁘더라."
"킥, 그리고?"
역으로 부끄러워 해보라고 강하게 내뱉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히죽 한 줄기 웃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자기 자신이 예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
정말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여기까지가 전부야."
"흐응, 정말로 그게 끝이야?"
알고 있는 주제에 고개를 갸우뚱 하는 척을 한다.
코, 귀, 마지막으로 입술.
조심스럽게 매마진 정도다.
그 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맹세한다.
"마음."
예은의 입가가 벌어지며 진중한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해오고 있다.
정말로 쓸데없는 부분에선 눈치가 매서운 녀석이다.
"그러니까.. 만지고 싶다고는 생각했네."
"풋, 처음부터 이실직고 할 것이지. 이쯤에서 용서해줄게."
배시시 우쭐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이런 부분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서 무슨 짓을 안 하려고 했던 건데.
향기롭게 놓아진 음식이 덫인지도 모르고 덥석 물어버렸다.
"한 가지 더."
"아 또 뭐.."
내가 살짝 짜증스럽게 내뱉자 째려본다.
이 녀석 정말로 눈초리에 살기를 담을 줄 안다.
숙소 울타리 앞에서도 그렇고 식겁했다.
"아까 그년.. 아니, 안내원 언니랑 나 중에 누가 더 예뻐? 솔직히 말해도 돼."
예은이 생각을 곱씹었는지 주어를 고쳐오지만 다 들렸다.
지금 나와 예은의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고작 반 미터가 안된다.
아무리 조그맣게 중얼거려도 들릴 수밖에 없는 거리감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이 녀석 일부러 들리게 말했을 거다.
정말로 성격이 못돼 먹었다.
말끝에 힘을 준 것도 대답을 강요하기 위함이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내 대답은 정해져 있지만.'
서양 여성에 대한 선망.
한국남자라면 모두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외국에 나가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미인은 생각보다 보기가 드물다.
솔직히 말해서 전체적인 수준은 확실히 높다.
하지만 탑클래스 정도의, 연예인급 외모를 가진 이들은 어느 나라든 손에 꼽는다.
그 희귀동물 중 하나가 바로 내 눈 앞에 떡하니 존재한다.
아무리 이성의 외모가 개인의 취향을 탄다곤 하지만 그것도 일정 선까지.
예은의 얼굴은 어딜 가든, 심지어 미국에서도 고평가를 받는다.
최근에 들어서는 몸매 또한 가끔 내 이성을 자극해올 정도라 곤란할 지경이다.
"그래, 네가 다 해먹어라. 내가 본 여자사람 중에는 너가 제일 예뻐."
"우후후, 그치? 그리고 앞으로도 나 이상은 없을 걸?"
못되딘 못된 악질스런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해온다.
그럼에도 거부하지 못하는 내가 밉다.
이 녀석의 얼굴만을 보고 반해버렸던 과거의 내가 정말로 밉다.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어쩌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누가 알아?"
그렇게 장난스런 얼굴로 속삭여오면 누가 기대를 하겠는가.
그러나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댄다.
대화의 내용은 시시껄렁할지언정 예은과 나 사이의 거리는 고작 30센티에 불과하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라고 할 것도 없이 이 거리였다.
눈치채지도 못하게 조금씩 좁혀져 가고 있었다.
그것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대로 계속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면 제로까지 닿아버리지 않을까.
알고 있음에도 지금의 나는 멈출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앞선 거리에서 절반 정도가 더 좁혀진 순간.
정적은 깨져버렸다.
먼저 입을 열어버린 건 예은이 되었다.
"야아.. 나 땀냄새 나지 않아..?"
이렇게까지 거리가 가까워지자 서로의 체취.
맡아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은은 일을 꾸미느냐 샤워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잠자리에 누웠다.
오는 길에 관광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기도 했으니 땀도 제법 흘렸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놔버렸네.'
예은의 말을 신호로 좁혀지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다.
마주 보고 있던 눈동자도 중심을 벗어났다.
정말 하마터면 일 치를 뻔했다는 생각.
그 이상의 선까지 넘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 정도는 약과지. 조깅했을 때는 엄청 심했어."
"..!! 주, 죽을래? 나 냄새.. 심하진 않다 뭐."
본인도 양심은 있는지 째려보던 눈을 돌려 고개를 숙인다.
지난 주말 강가에서 조깅을 했을 때 다리에 쥐가 난 예은을 번쩍 들어 벤치까지 옮겨주었다.
아무리 오래 뛰지 않았다고 전력질주를 했던 예은.
특히나 목도리를 매었던 목덜미 부근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흠뻑 젖어있었다.
"장난이야, 장난. 냄새 하나도 안 나."
"정말이지? 나중에 뭐라 하면 진짜 죽는다."
그제서야 안심했는지 휴우 한숨을 내쉬며 나를 지긋이 째려본다.
사실 거짓말이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특히 빨간 목도리를 풀러주얼을 때 확 공기가 퍼졌다.
'나쁘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여자는 체취도 향기롭다.
그런 미신을 믿을만큼 내가 인생 짧게 살지는 않았지만 어딜 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내 눈 앞에 있는 녀석은 새빨간 장미.
가시가 뾰족하게 돋아 있긴 하지만 외관의 아름다움, 그리고 향기는 아쉽게도 인정해 주는 수밖에 없다.
.
.
.
* * *
나와 예은이 파리에 도착한지 어언 사흘 째.
금요일을 낀 주말 동안 아주 실컷 놀았다.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긴 하지만 솔직히 여유가 있다.
'주중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니 말이야.'
지난 주에 팀의 윤곽을 대략적이나마 확립했다.
이제는 거기에 살을 붙이고 색을 칠하면 된다.
그 작업을 주중에 꽤나 진척 시킬 수 있었다.
정말 생각 이상이었다.
휴식 기간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 열 배에 가까운 기간을 현직 프로로 활동했던 CLC의 선수들.
더군다나 완전히 생판 놀은 것도 아니고 스크림 방송 위주로 몸을 풀고 있었다고 한다.
나도 토이치TV에서 방송을 해봐서 알지만 수입이 제법 쏠쏠하다.
그리고 스트리머, 한국으로 따지면 BJ 본인도 상당히 즐겁다.
물론 방송이 일로 이어지는 순간 스트레스가 될 수는 있지만 휴식 차원에서 잠깐잠깐.
얽매이지 않고 한다면 팬들과 소통도 하면서 연습까지 병행할 수 있다.
연습 자체를 손 놓고 있지 않았기에 서로 간의 호흡을 맞추자 금새 하나의 팀이 완성되었다.
여기저기 어디로 튈지 모르던 탱탱볼이 이제야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들이 뭉치게 되자 그 상승 효과는 놀라웠다.
금새 이전의 CLC의 기량.
다는 아니여도 시간문제였다.
일이 잘 풀린 덕에 여유 시간도 생기게 되었다.
평소처럼 주말까지 빠듯이 연습에 쏟지 않고 희희낙락 관광을 즐겼다.
더욱이 팀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가르치는 예은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예은을 놀려둘 턱이 있을까.
그런데 본인이 성과로 증명하니 조금은 풀어줄 수밖에.
지난 조깅 사건 이후로 마음을 다잡았는지 게임의 집중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실력 자체가 단기간에 빼어나 졌다는 건 아니지만 할 마음이 다분해졌다.
'말을 잘 듣게 됐다는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어.'
내가 뭐 하라고 하면 듣는 둥 마는 둥 그러면서도 듣기는 듣던 녀석.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질문까지 해올 정도로 태도가 발라졌다.
그렇다고 예은의 성격 자체가 좋아졌다는 소리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지만 나아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실컷 즐겨버린 이번 주말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요일의 파리 관광을 끝마친 나와 예은은 현재 선수촌으로의 귀가를 위해 택시를 탔다.
지금껏 맛있다, 먹을 만하다, 괜찮네, 빼고는 그다지 말이 없던 예은이 나를 향해 한 마디 툭 던져왔다.
"그럭저럭 재미는 있었어. 물론 너 치고는 말이야."
틱틱대면서도 제 할 말은 확실히 해온다.
성깔은 여전하긴 해도 조금은 솔직해진 것 같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넌지시 표정만 조금 좋아졌겠지.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든 알아봐야 했겠지.
이렇게 직접 말을 해주게 된 것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중간에 피시방만 안 갔어도 배는 나았을 테지만."
"에이, 너도 즐겨 놓고 이제 와서 뭘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런 부분까지 쓸데없이 솔직해진 건 여전하지만.
말 안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것보다는 낫다고 평해줄 만하다.
예은의 말마따나 관광지에서 피시방은 조금 과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궁금했다.
파리의 피시방은 어떤 느낌일지.
내 안의 이미지와 조금은 맞물렸다.
한국처럼 어두침침하지 않고 분위기가 밝다.
한국으로 따지면 카페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피시방에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키보드를 두들기니 이상하게 흥겨웠다.
설정도 불어에서 영어로 바꿔야 하고 여러가지 귀찮았음에도 게이머로서 흥미가 돋지 않을 수가 없다.
예은도 저렇게는 말하지만 당시에는 꽤나 즐겼다.
"두 시간 있었으면 정말 때렸을 거야."
"너 나를 너무 진성 겜돌이라 생각하는 거 아니냐..?"
절반 정도는 맞는 소리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 또한 처음 와보는 파리다.
나라고 이곳저곳 안 돌아다니고 싶었던 게 아니다.
실제로 같이 다니는 예은이 피곤해 할 정도로 많이 쏘다녔다.
유명하다는 파리의 레스토랑들.
식사 후에도 디저트를 파는 찻집들을 빠지지 않고 방문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예은은 무척이나 잘 먹는 편이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와 예은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미술관이라던지, 박물관이라던지.
가보니 의외로 재밌기도 있고 보람찬 시간이었다.
에펠탑과 개선문도 가보고 싶었는데 정작 가면 별거 없다면서 예은이 만류했다.
에이, 파리에 왔는데 그래도 한 번 가봐야지.
그렇게 말하는 나를 사람 드럽게 많고 복잡하고 실속없다면서 반강제로 설득했다.
말 안 들으면 때릴 기세.
이미 몇 번이나 이곳을 왔다는 장본인이 그렇게 말을 하니 들어주는 수밖에.
그리고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은 말 들어서 안 좋았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남자로서 쪼오금 자존심은 상하지만.. 나쁜 말 하는 녀석은 아니니까.'
어차피 프랑스에 하루이틀 있을 예정도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요 사흘 간이 즐거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같이 다녔던 예은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고 말이다.
"입안 엄청 느끼해. 김치 먹고 싶어."
"…. 너 완전 깬다."
보통 저건 내가 해야 할 소리인데 예쁘장한 처자의 입에서 나오니 깨버린다.
예은이랑 함께 다닐 때 괜히 한식만 먹는 게 아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는 예은이지만 가장 잘 먹는 건 한식이다.
나보고 종종 누렁이누렁이 놀려대는 주제에 나 이상으로 아저씨 입맛을 자랑한다.
"내일부터는 숙소에서 식사가 제공될 예정이라니 참아라."
"으엑, 가는 길에 한국 컵라면이라도 하나 사갈래. 밤참으로 먹을 거야."
오늘까지는 선수 식사가 따로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CLC의 멤버들이 도착하게 된다.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프로게임단에서도 속속들이 모여들 예정이다.
선수촌이 북적임과 동시에 내부의 직원들도 활동을 개시한다.
세계 각지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여러 나라의 선수들.
그리고 그 나라 안에서 선수들이 무조건 순혈이 아니니만큼 식사는 신경 써서 나온다.
뷔페 식의 식사엔 아시안 코너도 따로 배정돼 있다고 하니 입맛으로 걱정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녀석 은근히 따지는 척 하지만 어차피 뭘 줘도 잘 먹으면서 까탈스러운 척 하기는.
"하? 이래 봬도 나 미식가거든."
"미식가라기 보다는 푸드 파이터.. 미안, 미안. 주먹으로는 때리지 마!"
뭐, 어찌 됐든 복스럽게 잘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잘 먹는 이 녀석 얼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이러한 즐거운 시간도 끝이 난다.
바야흐로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파이널, 통칭 LCF.
세계에서 두 번째로 권위 있는 대회가 이제 곧 막을 올린다.
그 전까지 CLC 내부의 정비.
확실하게 끝마치고 나 또한 CLC에 나만의 색을 녹여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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