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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는 롤드컵, LCF.
32강의 경기가 끝나고 다음날.
회식자리에서 퍼마셨던 맛깔난 술이 숙취가 되어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자 뒷골이 땡기며 정신이 오락가락 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른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히죽대고 있다.
보고 있는 것은 래딧 사이트에 올라온 내 평가들.
어제 경기를 치렀던만큼 산처럼 쌓여 있는 글들 하나하나 검색해서 본다.
우콩 정글이 어땠냐느니 하는 글들이 수십 개씩 눈에 띈다.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콩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플레이를 보여줬다고 자부하는 바다.
뭐, 팬들 중에는 미드라인을 서지 않아 아쉽다 하는 글들도 있지만 정글 또한 못지 않다며 띄워주는 분위기다.
그러나 내가 지금 헤벌쭉 웃고 있는 부분은 플레이 대한 칭찬이 아니다.
다름아닌 외모에 대한 내용.
내 외모를 걸고 넘어지는 글들을 빠지지 않고 댓글까지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후후, 내가 또 한 잘생긴 하긴 하지.'
NA롤챔스에서 한 번도 벗은 적 없는 마스크.
시원하게 벗고 공개하자 역시나 반응이 있었다.
훤칠하게 잘생긴 아시아인.
한국 드라마에서 본듯한 인상이라면 낯부끄러운 칭찬글이 올라와 있다.
게중에는 간혹 말도 안되는 헛소리도 섞여있긴 하지만.
'솔직히 나랑 예은이랑 같이 있으면 아까운 건 내 쪽..! 은 양심이 찔리는구만.'
내 안에 남아 있는 한줄기 양심이 가까스로 말렸다.
예은이 대회에 나갈 때 꾸미지 않고 다녀서 그렇지 조금만 신경 썼어도 팬들이 줄을 섰을 테니까.
어쩌면 연예계에 스카웃됐을 지도 모른다.
'뭐, 외국 연예계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정말로 스카웃돼도 이상하진 않아..'
외모가 조금 부담스럽게 아리따우시긴 하다.
그리고 예은이 나를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코디해줬기에 고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인생 살며 많이 들어본 적 없는 잘생겼다는 말.
조금 즐겨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래딧을 뒤집어엎으며 나를 찬양하는 글들을 검색했다.
그 한 시간은 짧막하게 느껴질 수준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흘러갔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침대에서 일어나줘야 할 시간.
마지막으로 래딧에서 화제가 된 내용들이 어떤 게 있나.
제목만 훑어보자는 생각으로 페이즈를 넘기자 눈에 들어온 글이 있었다.
'한국인 스타..?'
도둑이 제 발 저려 뜨끔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북미와 유럽의 롤판에서 한국인이라 명명될 수 있는 선수는 지극히 한정적.
기껏해야 로크도그를 포함한 몇 명 정도다.
더우이 나와 예은은 영어 이름을 쓰고 있는 탓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혹시 LCF 주최측에 선수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것이 아닐까.
딱히 켕기는 일 한 적이 없음에도 조마조마 하며 원글을 클릭했다.
'아니, 나 말고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해당 글에서 언급된 한국인 스타는 내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나를 제외한 한국인 선수가 한 명 있었다.
심지어 몇 번이고 봤었단 익숙한 이름이었다.
'설마, 그 남자가..?'
내가 MVP로서 인터뷰를 마치고 경기 부스를 팀AOA에 인계하는 작업을 했을 때.
어쩐지 팀AOA의 팀원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따라오던 남자가 괜스레 신경 쓰였다.
유럽에서는 흔하지 않은 동양인 선수.
확인해보니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정상근, 내가 알던 그였다.
'헷갈렸을 리가 없어.'
상근이란 이름에서 유추되듯이 미필이다.
늦은 나이까지 군대를 안 갔다고 엄청나게 놀림받은 기억이 난다.
그는 몇 달 전 한국 서버 1위 쟁탈전 때 나, 그리고 테이커와 함께 순위를 다퉜던 다른 아닌 도차였다.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물론 있겠지만 얼굴까지 확인하니 높은 확률로 그가 맞다는 결론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그는 그다지 질이 좋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죄를 지었다고 보기도 뭣하다.
'프로로서 활동하는 걸 보는 것은 상당히 껄끄롭지만.'
숙취때문에 아팠던 머리가 거짓말처럼 수 분 골똘히 고심했다.
이윽고 내린 결론은 일단은 두고 보자.
어차피 내가 저 사람이 도차입니다.
라며 오지랖을 부릴 성격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이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던 미래에서 그는 중국과 계약해 떼돈을 벌어냈다.
계약을 하고 이행해서 번 돈이라지만 게임사에 제재를 받은 그가 게임으로 돈을 버는 건 부당한 일.
그럴 바에야 프로판에서 생고생을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가 가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따라 달라지겠지만.
'도차의 실력이 정말로 프로판에서 먹힐만한 수준일까. 나도 궁금하던 참이야.'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
래딧을 대충 훑어 보니 어제는 제법 좋은 경기력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 CLC가 AOA와 스크림을 가졌을 때도 그 실력을 보았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솔로랭크라는 건 가장 알기 쉬운 실력의 척도.
이 정도도 못한다면 오히려 곤란하다.
프로를 지망하는 새싹들이 가져야 할 커트라인이 무엇인지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솔로랭크와 프로는 엄연히 달라.'
솔로랭크의 탑클래스가 프로레벨에서도 과연 탑클래스일까?
이는 부정이 가능하다.
애초에 잘 나가는 프로게이머들 대부분이 솔로랭크 1위를 한 번씩 거치고 지나간다.
아주 당연한 느낌으로 커리어에 포함되어 있다.
프로가 된 이후에도 시간만 넉넉하다면, 할 마음만 있다면 다시 랭크를 복구하는 거야 손 쉬운 일.
그럼에도 프로들은 하지 않는다.
왜?
솔로랭크에서 먹히는 플레이와 프로에서 먹히는 플레이는 비슷하지만 다르기 때문이다.
가져야 할 사소한 습관등을 당장의 솔로랭크의 승리, 몇 판에 집착해서 버리거나 고집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프로들은 솔로랭크를 포기한다.
'그리고 사실.. 궁금하기도 해.'
당장 게임사에 익명의 문의를 넣는 방법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실력의 밑천이 보이지 않은 채 무대 뒤편으로 가버리는 건 찜찜하다.
그리고 하나, 언제나 당사자에게 들을 기회가 없어서 내심 궁금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미래가 변하게 된 걸까.
미래가 변했다면 필연 이유가 따르는 법이다.
나로서는 어떠한 과정으로 변하게 된 건지 알고 싶다.
당장은 무리더라도 언젠가는 말이다.
.
.
.
* * *
8일에 걸쳐 32강의 모든 경기들은 치러졌다.
하루하루가 신날 정도로 재미있는 나날이었지만 이조차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사실.
토너먼트 제의 특성상 단계가 높아질수록 게임의 질이 평균적으로 상승한다.
설사 지더라도 재밌는 경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지난 LCF도 정말 재밌었는데.
모스코5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광탈이 아쉽진 않았어.
방심하다가 푹 찔러버렸으니 오히려 꼴 좋더라 LOLOLOL
└그것도 벌써 1년 전인가? 간신히 기억나네.
└?? 무슨 경기인데 말을 해봐 말을.
└뉴비 차별하냐 속시원히 까놓고 좀 말해라.
래딧에서는 벌써부터 예상이 나온다.
32강도 제법 재밌기는 했지만 커다란 이변은 벌어지지 않았다.
토너먼트제에서 가장 재미가 찰진 부분은 누가 뭐래도 이변이 벌어졌을 때.
지난 2시즌의 LCF에서 모스코5가 불과 16강에서 떨어진 순간이 대표적이다.
모스코5는 얼마 전 EU롤챔스 윈터시즌을 우승한 명실상부 유럽의 강팀이다.
시즌1부터 폼이 쇠퇴한 적이 없는 명문 중의 명문.
그런 모스코5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난 LCF 적이다.
상대가 고만고만한 약팀이라고 방심했던 모스코5는 첫 세트부터 완전히 말려버렸다.
풀리츠크랭커를 필두로 한 늦은 인베에 정글러가 죽고 블루 버프를 뺏기고 시작했다.
더욱 더 최악인 건 그대로 파밍을 하기 위해 내려갔던 봇라인.
인베의 선취점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대팀은 다섯 명이서 봇라인에 다이브를 쳐 깔끔한 더블 킬을 가져갔다.
시작부터 어이없게 내줘버린 3킬.
멘탈이 흔들린 모스코5는 다음 세트까지 내주며 16강에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지켜보던 팬들의 입장에선 아쉬움의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솔직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자신이 응원하던 팀이 항상 잘하면 기쁜 일이긴 해도 마냥 일방통행인 건 아니니까.
약팀이 준비해온 날카로운 죽창에 찔리는 것 또한 썩 볼만한 최후였다.
그렇게 유럽의 강자 중 하나 모스코5가 탈락.
2시즌의 LCF 우승자는 과거의 CLC로서 마감을 해버렸다.
더욱이 실수 뿐만이 아니다.
롤드컵에 준할 정도로 권위있는 대회라 할 수 있는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LCF에 대비해 각 팀들이 해오는 준비는 한둘이겠는가.
어떤 팀들의 경우 LCF를 겨냥해 대규모 리빌딩을 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약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약하다고 지목되는 라인을 방출하고 새로운 선수를 영입한다던지.
오더가 없다면 구심점이 되는 선수를 마련한다던지.
팀단위의 전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면 이를 대신해줄 코치를 들인다던지.
평소라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LCF를 목전에 둔만큼 투자해봄직 하다.
뭐, 리빌딩이라는 게 성공적인 사례만 있는 게 아닌만큼 역으로 팀의 색깔을 잃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간혹 놀라운 약진을 해버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32강에서 팀 투르칸 경기 본 사람 있어?
팀 쿼스트 상대로 아주 쉴 새도 없이 못아붙이더라.
이렇게나 팀 투르칸이 잘하는 팀이었나.. 했는데 정글러가 미터스더라?
미터스 원래 CLOCK9 아니었나.
└투르칸이 한달 전에 미터스 영입했잖아. 귀를 닫고 사시네.
└팀 투르칸 정말 몰라보게 세지긴 했음.
└미터스가 투르칸에 간 건 신의 한 수야.
CLOCK9 시절에도 팀을 혼자 지탱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미터스의 기량은 뛰어났다.
정글러로서 각 라인을 부단하게 돌아다니며 없는 킬을 강제로 만들어낸다.
누구나 인정하는 북미에서 첫 번째를 다투는 정글러.
미터스의 실력은 일류를 넘어 정상급이다.
그럼에도 CLOCK9 윈터시즌의 준결승전에서 TSL을 상대로 3 대 0의 참패를 당해야 했다.
미터스 하나가 완벽하게 마크당하자 거대한 댐에 균열이 생기듯 어느 순간 와르르르.
폭포처럼 쏟아지는 급류에 손쓸 여지도 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팬들로서도 미터스가 부디 다른 안정적인 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길 못내 바라고 있었는데 정말로 이적을 해버렸다.
다름아닌 팀 투르칸의 정글러로 말이다.
팀 투르칸은 강렬한 라인전에 반해 아쉬운 운영 능력이 단점으로 부각되던 팀이다.
막말로 라인전에서 킬을 따내지 못하면 뒤가 없다.
그런 팀 투르칸에 미터스가 정글로 들어서니 완전히 달라졌다.
─라인전부터 한타까지 깔끔하더라!
안 그래도 라인전 강한 투르칸에 미터스가 들어오니까 킬이 계속해서 터져.
옛날 투르칸이었으면 그 후로 말아먹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승기 굳힐 줄도 알고.
이번 LCF에서 팀 투르칸 정말 기대해도 될 것 같아.
└나도 동감은 하지만 16강의 상대가..
글쓴이-16강의 상대가 어딘데?
└팀 투르칸 팬이라면서 검색도 안 하냐? CLC잖아 바로 그 에러갓의 CLC.
윈터시즌에서 에러갓이 이끄는 CLC는 팀 투르칸을 상대로 완승을 했다.
라인전이 강하다는 특색이 무색하게도 참패.
이어지는 한타에서는 속수무책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더욱 더 강렬해진 라인전을 자랑하는 팀 투르칸.
미터스가 구심점이 되어주자 투르칸의 선수들도 각자의 기량을 최대치로 뽐낸다.
팀 투르칸은 완전히 다른 팀이 돼버리고 말았다.
─투르칸이 제법 강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건 CLC도 마찬가지지.
2군 데리고 윈터시즌을 재패한 게 에러갓인데 어디에 비비냐.
라고 말하기엔 음.. 미터스의 폼이 너무 제대로긴 해서 진짜 붙어보지 않으면 모르겠다.
인정.
└나는 CLC가 압승할 거라 보는데. 트리플리프트에 에러갓까지 CLC멤버들 장난 아니잖아.
└그리고 에러갓의 장점은 누가 뭐래도 다양한 챔프폭. 에러갓을 상대론 예상 자체가 불가능함.
└REAL. 전세계 모든 선수 통틀어도 에러갓처럼 픽밴이 예상 불가능한 선수는 없는 것 같다.
말도 안되는 챔프폭에 더불어 비장의 카드들.
그것이야 말로 에러갓이 단기간에 최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다.
그러나 안주하기엔 걸리는 부분이 많다.
시즌1부터 로드 오브 로드의 프로게이머를 해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미터스에게 있어 어지간한 변수로는 턱도 없다.
실제로 윈터시즌에서 CLC와 미터스가 있는 CLOCK9이 맞붙었을 때.
Error선수는 제우스라는 카드를 선보였지만 미터스는 전혀 휘둘리지 않고 맞받아쳤다.
승부의 갈림길은 CLOCK의 미드라이너 제임스의 기량이 부족했던 것이 컸다.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맞붙어보기 전까지는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없는 것도 사실.
북미의 팬들로서는 가장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CLC 대 팀 투르칸의 16강 경기의 날이 다가오는 가운데.
먼저 진행되는 다른 경기들, 특히 TSL 대 포나틱의 경기는 눈을 떼기 힘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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