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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도 에러갓이!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LCF의 8강이 치러진지도 오늘로 3일 차다.
이미 CLC와 AOA는 준결승전 A조의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
B조에 올라갈 나머지 두 팀은 아직 8강 진행 도중이다.
오늘 3일 차에선 TSL과 화이트 폭스가 경기장의 주인공이 되었다.
현재 경기장 내부의 TSL 부스 안에서는 이야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내용은 딱히 전략 토의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멘토의 덕담 정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의미가 깊었다.
"평소대로만 하면 괜찮으니 힘 쭉 빼고 해봐. 너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TSL의 신인 코치 맥도날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전 미드라이너였던 그가 미역슨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건넸다.
코치임과 동시에 선배이기도 한 둘의 사이는 각별하다.
코치와 선수의 관계는 당연 친밀하고 밀접하지만 둘 사이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2군인 TSK에서 TSL로 자리를 옮기며 잠깐 주춤했던 미역슨을 다시금 정상 궤도에 이끌어준 데에 맥도날드의 공훈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프로즌은 제가 선수로 데뷔하기 전에 롤모델로 삼았던 사람이기도 한데.. 제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요?"
"너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이건 코치로서가 아니고 선수로서 하는 말이야. 상대로 만난다면 네가 프로즌보다 배는 까다로워."
프로게이머라는 명함을 달기 이전의 미역슨은 그저 게임을 조금 많이 잘하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러했던 미역슨에게 유럽 최고의 미드라이너 중 하나이며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인 프로즌은 선망의 대상.
프로즌을 목표로 달려온 미역슨이 정작 그를 적으로 맞이하게 되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든 벽이며 대부분의 프로게이머들이 일생에 한 번은 겪게 된다.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대부분 잘나가는 선수를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보통은 뛰어넘는 것은 힘들지만 간혹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가공되지 않았을 뿐인 원석.
그들이 자신의 롤모델을 뛰어넘냐, 넘지 못하냐는 크나큰 분기점이 된다.
만약 여기서 좌절한다면 선입견이 생겨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호랑이의 새끼가 자기 자신을 고양이라 착각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그어버린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로 연결되고 만다.
이러한 이유가 있어 미역스에게 이번 화이트 폭스와 일전은 큰 의미를 가졌다.
설사 TSL의 기량으로 이긴다고 한들 그 자신이 꺾이고 만다면 본말전도.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진지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선배 선수가 있는 미역슨은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가진 바 실력에 무색하게 미역슨은 쑥스럼을 많이 탄다.
그런 그에게 무거운 한 마디를 던져줄 수 있는 맥도날드의 존재는 이루 말할 수 없게 고마웠다.
더욱이 한 가지 더.
프로즌을 롤모델로 삼았던 미역슨이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다.
일반 게이머가 아닌 프로게이머로서 미역슨의 목표는 다른 사람이 된지 대략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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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환자의 전장의 시작을 알려주는 여성 아나운서.
솔로랭크에서야 들리거나 말거나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지만 경기 부스에서 들을 때는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든다.
속으로 제발 저 말이 5초만 늦게 들려라, 내심 바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다.
그도 그럴 게 저 대사가 들렸다는 것은 게임이 시작됐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적팀은 과연 어떠한 전략을 꺼내올까.
만약 특이한 수를 꺼내온다면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엉키고 엉켜 뭐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뭐, 이제는 아니지만.'
그런 초보딱지야 떼버린지 오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경기 부스 안에 있지도 않다.
쇼파에 누워 편안하게 다른 팀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언제나 그러하듯 같이 시청하고 있는 이는 예은.
하지만 오늘은 두 가지 문제가 나를 껄끄롭게 만든다.
첫 번째는 바로 앉아 있는 쇼파의 폭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내가 손님인데 네가 의자 갖고 와서 보면 안되냐?"
"..발로 까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나와 예은이 앉아있는 쇼파는 1인용이라 보기엔 크고 2인용이라 보기엔 작다.
앉기 전에는 어떻게 될까 했는데 막상 앉으니 불편하다.
그리고 예은은 언제나처럼 절대 양보 안 한다.
보통 내가 양보하는 포지션인 것도 사실이지만 나라고 언제까지 당해주지만은 않는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서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기도 하고..'
나를 껄끄롭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
현재 나와 에은이 있는 방은 CLC의 모든 선수들이 신세를 지고 있는 공용 숙소 내부가 아니다.
저래 봬도 일단은 여성 선수인 예은이 따로 배정받은 개인실이다.
가구의 크기가 넉넉하지 않은 것도 개인실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됐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방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처음이지.'
내색은 안 하고 있지만 살짝 긴장이 된다.
왜인지는 몰라도 예은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걸 끔찍이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투숙하고 있는 느낌이라 그런지 커트라인이 낮은가 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위를 둘러봤을 때 딱히 유별난 게 있어 보이진 않았다.
굳이 하나 신경쓰이는 점이 있다면 묘하게 좋은 향기가 난다는 점.
"야, 한타 언제 하냐?"
"..물도 끓지 않았는데 숭늉 찾지 마라…."
도둑이 제발 저렸다고 뜨끔해 버렸다.
다행히 예은의 눈동자는 TV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며 똑같이 TV화면을 향해 눈동자를 돌렸다.
TV화면에서 재생되고 있는 건 TSL 대 화이트 폭스의 8강 경기.
이제 막 게임이 시작해 미니언이 출발도 하지 않은 인베 타이밍이다.
한타는 커녕 라인전도 시작 안 했는데 참 성격 급하기도 하셔라.
'뭐, 로드 오브 로드에서 가장 재밌는 게 한타긴 해?'
정말 몇 달 전만 해도 20분 동안 라인전하고 그 후에 한타 하다 게임의 승패가 결정됐다.
아무래도 운영에 대한 지식이 얕았기 때문.
최근에는 라인 스왑구도도 많이 나오고 스플릿 푸쉬라던지도 성행하고 있다.
이렇듯 다채로운 게임 양상은 앞으로 더욱 연구되고 심화될 것이다.
'과연 현 북미와 유럽의 정상급 팀의 결전은 어떤 느낌일지 지켜보도록 할까.'
TSL이든 화이트 폭스든 토너먼트 표에 따르면 우리와는 라인이 달라 준결승전에서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 참고할만한 경기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게 두 팀은 미드에 힘을 많이 싣는다.
미역슨과 프로즌의 구도는 놓쳐서야 아쉬울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도 비슷한 양상의 경기를 치를 에정이니 말이야.'
우리 CLC의 준결승전 상대로 확정된 팀 AOA.
그쪽도 미드가 제법 강한 모양이라는 사실은 익히 들었다.
나로서는 정말 모를 수가 없다.
"쟤네 진도 개답답하네. 안 싸우냐? 그냥 확 들어가서 물면 안돼?"
"아직 궁극기도 안 배웠다 임마.."
솔로랭크에서야 초반부터 팍팍 싸우지만 아무래도 대회에서는 튕기기 마련이다.
예측되는 변수가 한두 개가 아니고 실수를 했을 때 리스크를 감안해야 한다.
선수들 입장에선 머릿속에 부정적인 상상이 가득해 나서서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다.
이러한 부분은 멘탈을 다 잡으며 천천히 극복을 해나가야 하고 흔히 말하는 무대 공포증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모를 만도 하지만.'
하도 쌈닭 기질이 다분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은은 무대 공포증같은 흔들림이 없이 대회 게임에 정말 잘 적응한 케이스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적든 많든 대부분의 프로 선수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마음의 병이다.
솔로랭크에서 2렙갱, 점멸갱, 108갱 공격적으로 플레이 하는 선수들도 대회에 게임에서는 아주 조용히 제 할 일만 한다.
그렇게 된 이면에는 무대 공포증이라는 뒷사정이 숨어 있다.
게다가 그러는 편이 게임도 안정적이고 프로 무대에서 잘 맞는다.
한 번 지면 담겜ㄱㄱ 할 수 있는 솔로랭크가 아니니까.
정말 별거 아닌 실수에 멘탈이 깨져서 게임이 말릴 바에 처음부터 안정적으로 하는 것이 옳다.
'이 녀석같은 예외가 종종 있긴 해.'
무대 공포증이 없는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테이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그가 보여줬던 플레이는 다분 공격적이다.
아니, 공격적이기를 넘어서 도박적이기까지 하다.
기회비용이 발목을 잡는 대회 무대에서 자신감있게 수를 던진다.
이 자체가 이미 재능의 영역이다.
주사위를 던져서 6을 제외한 눈이 나오면 1억을 받고, 6이 나온다면 1억을 잃게 된다.
1/6의 확률임에도 판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잃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같은 경우 이를 나만의 플레이 방식.
모든 챔피언의 플레이 특색을 알고 있다는 점을 활용해 풀어내고 있지만 간간이 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정도로 정말 힘든 일인데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예은을 보면 종종 질투가 일 정도다.
"경기도 지루한데 뭔가 달달한 거 없냐?"
"여기가 네 방이지.. 내 방이에요?"
내 방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며 과자를 빼먹던 버릇 탓인지 입이 심심한 예은이 한 소리 해온다.
진행되는 게임의 양상이 꽤나 심심한 것도 사실이다.
선수로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입장에서 보자면 루즈하게 늘어지는 게임의 구도.
쫄보처럼 싸우지 않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그럴 만하다.
"야, 뭐 먹으면서 보지 않을래?"
"여기 배달같은 거 안될 텐데? 냉장고에 뭣 좀 있냐?"
당연히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은 물어본다.
그리고 당연히 없었다.
예은이 나에게 말을 꺼낸 이유는 물어볼 것도 없이 사오라는 의미였다.
"내가 무슨 빵셔틀이냐? 가위바위보 해."
"에이, 째째하게. 사오면 쇼파 자리 비켜줄게."
말씨름을 계속 하다간 손해보는 건 항상 내 쪽이 된다.
이 녀석 나름대로 한 발 빼기도 했으니 특별히 몸을 움직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길게 보면 이득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차피 첫 번째 세트고 딱히 식당은 멀지도 않으니까.'
이건 솔직히 예은이 딜교환을 실수했다.
앞으로 최소 두 시간, 길면 세 시간 이상 경기를 보게 될 테다.
겨우 음식 사오는데는 넉넉히 잡아도 20분이다.
찰칵.
음식을 사서 예은의 개인실로 되돌아왔을 때는 경기가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아까 예은이 그렇게나 노래를 부르던 한타가 시작했다.
나는 이것저것 가져온 음식들과 음료수가 들은 봉지를 쇼파 앞의 탁자에 두며 예은을 툭툭 쳤다.
"어허, 일어나거라."
"쳇.. 겨우 쇼파가지고 이러기야?"
이러기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히 해야 하는 법.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좋아할 만한 음식 조합을 고려해서 가져왔다.
"음식은 선수 식당에서 네가 좋아하던 걸로 적당히 담아왔고 음료수는 콜라로 통일했다."
"와, 대박. 그걸 담아 달라고 하면 담아줘?"
배꼽이 빠질 기세로 웃어댄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선수 식당의 음식들이 남게 되면 다 어디로 가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먹어주는 게 음식을 해준 요리사님들에 대한 예의다.
아무튼 그렇다고 생각한다.
예은이 비닐 봉지 안을 뒤지며 어떤 음식을 싸왔는지 살피는 사이, 나는 쇼파에 기대듯 앉았다.
역시 혼자 앉으니 이리도 안락할 수가 없다.
아까까지는 서로 계속 1mm 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밀어대는 바람에 한 순간도 편치 못했기에 더더욱이다.
'이 녀석 최근 들어 은근히 달라붙어 온단 말이지.'
아무리 내가 예은을 최대한 여자로 보지 않으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정말 몇 달 전만 해도 좋게 봐줄 건덕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금씩 성격이 둥글둘글 해지다 보니 솔직히 최근엔 종종 신경이 쓰이곤 한다.
방금 쇼파에서도 그렇지만 이러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산을 같이 쓴답시고 괜스레 붙어온다던지.
특히 파리에 처음 왔을 때 그날의 사건은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잠깐 무릎 좀 빌린다?"
하도 골치가 아파 잠깐 딴생각을 하고 말았다.
정신이 없는 사이 물어온 탓에 대답을 하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예은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겠다는 건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왔다.
"야.. 무거우니까 비켜라."
"죽을래? 무거워도 버텨."
좁은 쇼파에 끼이듯 앉아 있던 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 들이닥쳤다.
예은이 내 무릎 위에 포개듯 앉아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음식 포장을 뜯고 있는 예은이지만 귀가 조금 붉어진 것만은 어쩌지 못한다.
처음으로 예은의 방에 들른 탓에 몸도 마음도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바보같이도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어색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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