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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도 에러갓이!
우리 CLC의 준결승전은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의 상대가 정해지는 TSL 대 모스코5의 결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두 팀 모두 각자 북미와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강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만큼 어떤 경기를 하는지 두 눈 똑똑히 새겨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러한 사정을 겸해 나와 예은은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그 준결승전 B조의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경기장에 관람왔다.
이곳 경기장 <제니스-파리>는 건물 자체가 예술적이라 그저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된다.
내부 구조 또한 썩 마음에 들어 솔직히 애인과 왔으면, 그리고 보는 것이 롤경기가 아니었다면 분위기가 제법 좋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여기 먹으러 온 건 아니다..?"
"어련히 먹을만큼 살 거야."
예은이 언제나의 뾰로통한 어조로 툭 쏘아붙이듯 말한다.
하지만 내가 지적한 문제가 바로 그거다.
먹을만큼 산다는 것, 그리고 먹는 사람이 예은이라는 사실.
네가 먹을만큼 사면 두 손으로 다 들지도 못해.
"한 대 맞을래?"
"농담이야 농담. 나도 그럼 적당히 사야겠다."
서로간에 적당히 샀을 뿐임에도 한아름이다.
뭐, 준결승전은 5전 3선승제이고 어지간하면 3시간은 진행되니 상관은 없지만 너도 참 어지간히 잘 먹는다.
이 녀석이랑 함께 있으면 나도 덩달아 많이 먹게 돼서 걱정이다.
이윽고 표를 끊은 좌석에 도착해 털썩 주저 앉자.
앞에 놓인 음식 봉투만 두 봉다리다.
아무래도 남길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되지 않지만.
"멀쩡한 네 거 놔두고 왜 내 거를 뺏어 먹냐."
"둘 다 먹으면 되지. 침이라도 발라 놨냐?"
내가 들고 있던 핫도그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웅얼거린다.
좋아하는 맛 놔두고 색다른 맛을 시도해보겠다.
그런 모험담을 입에 담은 시점에서 눈치는 챘지만 안타깝게도 반쯤 침을 발라 놨다.
먹고 있던 핫도그니 당연하다 마다인가.
'신경 쓰는 쪽이 바보인가..'
지난 번에 예은의 개인실에서 8강 경기를 관람했던 이후로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느낌이다.
딱히 유별난 부분이 달라진 건 아니고 음식에 한정해서 말이다.
슬프게도 내가 먹던 것을 뺏어 먹는 일이 잦아졌다.
원래 친한 사이에선 먹던 음식 뺏어 먹고, 한 입만 먹는다면서 입 안 가득 꾸역꾸역 우겨 넣고.
친구들끼리는 없어서는 섭하기까지 할 행동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았던 게 신기하다.
위생때문은 절대 아닐 테니 그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다.
'이 녀석이 깔끔 떠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니까.'
지금만 해도 입 주변에 케찹과 머스터드를 잔뜩 묻히고 꾸역꾸역 먹고 있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역으로 태클걸기 힘들다.
나는 한 소리 하는 대신 핫도그 세트를 살 때 받아온 티슈를 꺼내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어라."
"나 살면서 배탈난 적 없어서 괜찮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입 안 가득 음식을 머금고 있어 모르겠지만 신경쓸만한 말은 아닌 듯해보였다.
예은의 입가를 닦은 티슈를 접어서 작은 봉지 안에 넣은 나는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괜한 망상이었나?'
딱히 나와 예은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잠깐 눈을 두더니 별 생각없이 고개를 돌린다.
솔직히 방금 전 예은과 내가 요란맞은 커플처럼 염장을 지르는 듯한 행동을 하긴 했다.
'어디까지나 그럴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말이지만.'
절대로 그런 의미로 생각한 게 아니라 일단은 공인으로서 걱정한 거다.
예은도 나도 일단은 프로게이머로 제법 인지도가 있다.
있을 뿐일까.
이번 LCF의 결승전에 올라온 CLC의 멤버기도 하다.
'그래서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왔는데 기우였네.'
알고는 있지만 사실 프로게이머의 얼굴을 그렇게까지 유심히 외우는 사람은 잘 없다.
아무래도 실력이 우선되는 세계다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연예인이야 연기같은 거 못해도 얼굴만 보고 팬이 되는 이들도 있지만 프로게이머의 세계는 냉철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외모 관리를 열심히 했었는데 조금은 섭섭하단 말이지.'
이렇게 수많은 관중들이 둘러싸인 곳에서 정체가 들통나다니.
알아 보면 곤란하긴 하지만 알아봐 주지 못하면 알아봐 주지 못한 대로 아쉽다.
정말 제멋대로인 생각이긴 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예은이 한 번 더 뺏어 먹은 탓에 빵쪼가리밖에 남지 않은 핫도그를 꿀꺽 삼키고 다른 먹거리를 꺼내 오물거렸다.
이제 곧 경기가 시작한다.
TSL과 모스코5, 과연 어느 쪽이 우리 결승전의 상대로 올라올지 흥미진진 지켜보는 일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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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TSL 대 모스코5의 경기가 한참인 와중.
진행되고 있는 두 번째 세트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서로가 안정적인 라인전을 지향하며 파밍을 하고 있다.
그러한 사정으로 조금은 잠잠해진 경기장의 분위기.
중계진의 유머러스한 잡담들이 간간이 들리며 이따금 관중들의 웃음을 불러 일으키는 정도다.
<두 번째 세트에서도 연이어 자드를 픽박으며 패기를 보여주는 미역슨 선수네요. 앞선 첫 번째 세트에서의 자드 정말로 일품이었거든요.>
<콰른트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있는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였죠! 금은 장식 머리띠라는 파훼법이 나온 이후로 선수들이 자드를 꺼려하는 추세인데도 거리낌없이 픽하며 아주 좋은 모습 보여주고 있는 미역슨 선수입니다.>
중계진들의 해설이 드문드문 들려온다.
나와 예은은 비교적 뒤쪽에 자리 잡아 앉은지라 무언가 살짝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다.
그 탓에 살짝은 적막하고 고요해진 분위기를 깨고 예은이 나를 향해 넌지시 물어왔다.
"그런데 너.. 인터뷰에서는 왜 그랬어?"
"뭐가? 아, 그거?"
얼마 전 있었던 준결승전 A조의 경기 이후.
당시 3경기 연속 MVP를 받은 나는 인터뷰 시간을 꽤나 길게 할애받았다.
지난 8강까지 따지면 무려 6연속이다.
이전과는 달리 유럽이라고 텃세부리는 분위기도 많이 없어져서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결승전에서 우승하면 한 마디 꼭 하고 싶은 게 있다, 그거 말하는 거지?"
"그것도 있는데.. 다음 거 말이야 다음 거."
결승전에서 우승을 하겠다.
그러한 포부정도야 당연지사 밝혔고 내가 우승 후에 이야기하려 했던 건 그 다음이다.
우승을 하게 되면 CLC를 떠날 것이다.
아직 당장의 일은 아니고 어쩌면 재계약이나 인센티브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래도 일단은 한국에 돌아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금전적으로 딱히 아쉬운 상황도 아니고 기왕지사 활약하는 건 한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이곳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못내 지울 수는 없지만.'
래딧은 항상 시간이 날 때마다 눈팅하고 있을 정도다.
나에 대해 어떠한 글들이 올라오는지 객관적으로 주시했을 때 알 수밖에 없다.
종종 아쉬운 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너무나도 뿌듯하다.
뭐, 우승한 이후를 상상하고 있는 건 시기상조지만 솔직히 김칫국 마시는 건 내 특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결승전 진출까지 확정지은 마당에 조금은 달달한 상상을 해도 될 법하다.
우승 후 인터뷰 자리에서.
<지금까지 사랑해줘서 고마웠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돌아오겠다.>
이 정도 말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미 내 뇌에서는 한 백번 쯤 재생해본 것 같다.
"니 잘난 척한 거랑 김칫국 퍼마시는 얘기 말고 그.. 사, 사귀냐고 물었을 때 받아친 거 있잖아."
날씨가 추운 탓일까.
귀가 조금 붉게 달아오른 예은이 방금보다 낮게 느껴지는 어조로 속삭이듯 이야기해온다.
그러고 보면 그런 얘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MVP를 내가 몽땅 올인받은 데다 경기도 빨리 끝나 방송시간을 벌어볼 작정인지 사적인 질문도 엄청 던져왔다.
특히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는 에러갓 질문 10선 이라고 했던가.
그 중에서도 1위를 차지했던 게 나와 예은의 사이에 대해서였다.
아무래도 나와 예은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이 종종 방송 화면을 통해 노출되다 보니 관심을 샀나 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잡아 뗐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야.. 그럼 왜 그렇게 애매하게 말한 건데?"
예은이 내 옆구리를 푹 찔러온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와 달리 힘이 실리지 않아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귀엽게도 느껴졌다.
'글쎄.. 어째서 그랬을까.'
사실 나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대답을 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그런 대답을 택했다.
넌지시 웃어 넘기듯이 말을 해버렸다.
부정을 했으면 예은와 내 관계를 여과없이 이야기 한 셈이고.
긍정을 했으면 장난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터다.
굳이 애매모호하게 답변을 한 것은 정말 못됐다.
<자드! 자드! 자드가 미쳐 날뜁니다! 원딜러가 분명히 금은 장식 머리띠가 있었는데 죽어버렸어요.>
<미역슨 선수의 자드, 지난 32강 그리고 16강에서 보여준 이상입니다. 자드라는 챔피언에 대해 재평가를 내려야 할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때마침 한타가 일어나며 경기장이 북새통을 이룬 탓에 대답을 조금 지연할 수 있었다.
자드를 플레이하는 미역슨이 금은 장식 머리띠를 빠르게 맞춘 고르키를 암살해버렸다.
상대 모스코5는 봇라인에 제법 투자를 많이 해버렸는데 이렇게 되면 한타는 TSL쪽으로 필히 기울 수밖에 없다.
'숙련도가 몰라 보게 늘었는데..?'
NA롤챔스 당시에도 미역슨은 이미 물이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준결승전 두 번째 세트에서 활약하는 미역슨의 자드는 당시 이상이다.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는지는 몰라도 군더더기가 없는 자드의 움직임은 나조차도 놀라움을 감치 못할 수준이었다.
내가 알기로 미역슨이 로드 오브 로드의 프로게이머로서 유명세를 떨치는 건 다음 시즌 부터다.
적어도 올해 2013년은 지나간 후의 이야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한 해 이르게 TSL에 전입돼 선수 활동을 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어떤 요인이 영향을 끼쳤는지 모를 일이지만 성장 속도가 놀라울 정도다.
진행되는 게임에서 그의 플레이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NA롤챔스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
'확실히 미역슨이 북미의 테이커라 불릴 정도로 잠재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빨라.'
아무리 3시즌에도 나름 유망주라 불리던 미역슨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될성부른 떡잎.
열매를 맺으려면 한참은 남은 시기였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무언가 계기가 될만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변했던 것처럼 그도 변했다.
당장은 그렇게 생각을 매듭지기로 마음먹었다.
<최근에 자드로 떠오르는 선수가 미역슨 선수 말고도 한 명 더 있죠. 최근 들어 기세를 떨치고 있는 Error선수가 NA롤챔스 윈터시즌에서 그렇게나 자드로 무쌍을 찍었다. 소문이 아주 파다합니다.>
중계진들이 미역슨 선수를 격찬하는 와중에 띄엄띄엄 내 얘기가 들리자 도둑이 제 발 저렸다고 뜨끔했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당연히 기우.
애초에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대상은 그게 아니다.
경기장이 시끄러운 바람에 잡생각을 해버렸다, 그런 변명을 하고 싶지만 해서는 안된다.
그저 눈을 돌렸을 뿐이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의 대답을 찾지 못하자 다른 쪽으로 관심이 기울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한타가 끝나고 관중석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자 나는 다시 예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괜찮으면 결승전 끝나고 이야기해도 될까?"
"흐응…, 그럼 뭐.. 특별히 그때까지만 기다려 줄게."
내가 생각해도 게임 외적인 부분에서는 나 자신이 종종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일에 집중하는 남자.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것도 어느 선까지다.
예은과의 관계는 언제가 한 번 정리를 해야 할 시기가 올 거라 생각했다.
그날은 아무래도 결승전이 끝난 이후.
나 자신이 이루려고 했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로 하고 싶다.
그날이 온다면 왜인지 평소 이상으로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기피했던, 마주 보지 않으려고 했던 주제에 대해 진심으로 토로할 수 있게 될 것만 같다.
아직은 무엇 하나 정해진 것도 없고.
우승이라는 목표는 예은의 말마따나, 내 생각따나 김칫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나.
두 번의 인생에 걸쳐 만들어진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욕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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