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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의 토끼
TSL의 탑라이너 대이리스 선수.
그는 TSL의 원로 멤버이며 탑라인의 노익장이다.
1시즌부터 선수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앞으로도 이어나갈 보기 드문 케이스다.
한 시즌만에 나가 떨어지는 선수들이 허다한데 어떻게 오래도록 폼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할 수 있던 밑바탕은 역시 기본기.
그리고 새로운 시즌과 메타에 적응해내는 그의 자세다.
3시즌에 들어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Unknown Error라는 선수.
대이리스는 그처럼 메타를 선도하지는 않지만 대신에 적응력이 빼어나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킨다.
현 메타에서 주어진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가용할 수 있는 챔프폭을 유지하며 정석적인 플레이를 선보인다.
한 마디로 잘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이 간단한 두 단어가 프로무대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기복없이 언제나 고평가를 받는 탑라이너.
대이리스라는 뿌리 깊은 버팀목이 있기에 TSL이 명문으로서 유지될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트린다조아는 어차피 다음 판부터 밴하면 되니까 멘탈 잡고.. 한타에서 불바다 미사일만 잘 깔아줘."
"아아.."
정글러인 오드아이의 말에 대이리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들었다는 의미로 작게 신음을 내긴 했지만 그 뿐.
흔히 말하는 멘탈이 깨진 상황이다.
선수의 경력이 길어질수록 긍정적인 영향, 분명히 있지만 알게 모르게 아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좋게 말하자면 프라이드가 두터워진다.
대이리스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다시 탑에서.. 그것도 이번에는 본인이 직접이라니.'
NA롤챔스 윈터시즌 결승전 당시.
대이리스는 Unknown Error가 이끄는 CLC 2군에게 패배했다.
딱히 탑 차이로 경기를 진 건 아니라지만 네 번째 세트만은 잊을 수 없었다.
'귤선장도 Unknown Error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했었지.'
윈터시즌이 열리던 12월에 거미여왕은 희대의 OP챔피언이었다.
그런 거미여왕을 가져갔으니 네 번째 센트는 질 수가 없으리라.
안 그래도 여유가 가득 차있던 대이리스는 상대팀의 탑챔피언을 보고 실소를 뿜었다.
귤선장이라니.
대회는 커녕 솔로랭크에서도 보이지 않는 폐급 탑솔러다.
밴픽싸움에서 패배한 탓에 상대가 예능픽을 한 것이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이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게임을 시작하니 귤선장의 스킬 매커니즘이 거미여왕을 카운터쳤다.
라인전에서 딜교환이 밀리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결국 그 게임은 귤선장의 글로벌 궁극기로 천천히 비벼지더니.
Unknown Error의 이즈레알에 의해 종지부가 찍혔다.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치욕적인 게임이었다.
'그런데 그 귤선장을 추천해준 사람이 Unknown Error라고..'
대체 어떻게 대회 무대에서, 그것도 결승전에서 귤선장을 꺼낼 생각을 했을까.
하도 얼척이 없어 물어봤다.
CLC 2군의 탑솔러 헤일커드에게 개인적으로 사정사정해서 말이다.
그는 고심하는 듯했지만 어차피 결승전은 끝난 마당.
Unknown Error의 조언으로 귤선장을 하게 됐다고 이야기해줬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개인적으로 Unknown Error라는 선수에 대해 깊은 흥미가 일었을 정도다.
언제가 친해질 계기가 생긴다면 반드시 물꼬를 터놔야지.
하지만 그 본인이 탑라인에 올라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투두두두둑!
아무리 멘탈이 깨져도 게임은 마무리해야 한다.
현재 TSL 진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탑라인.
탑라인의 억제 포탑을 부수려고 하는 적팀을 향해 대이리스가 불바다 미사일을 깔았다.
"나이스! 원딜! 원딜부터!"
"잠깐, 코리아나 궁 조심해."
일단 할 일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궁극기를 깔은 대이리스였지만 예상 외의 뽀록이 터졌다.
불바다 미사일의 위치가 과연 절묘하게 깔려 상대팀은 진퇴양난.
아군 원딜러인 카오스의 크레이브즈가 궁극기를 야무지게 끼얹자 한타는 정말 할 만했다.
글로벌 골드 격차가 난다고 해도 광역기를 이렇게 잘 묻히면 또 모르는 게 한타다.
게다가 포탑도 아슬아슬 체력이 남았다.
곧 깨지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앞에서 불찜질을 한다면.
대이리스는 과감히 앞점멸 후 조냐의 물시계를 사용했다.
띠이잉..!
비록 아이템은 별 볼 일 없다지만 파이어뱃은 라알드리 호통 하나만 있어도 데미지가 나쁘지 않다.
적팀은 포탑을 깨는 대가로 불찜질에 오랜 기간 노출됐고 특히나 원딜러가 치명상이다.
트리플리프트의 배인에게 엄청난 딜로스를 만들었다.
'이 정도 했으면 나머지는 아군이..!'
말려버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 아니 그 이상을 해냈다.
자신은 곧 조냐가 풀리고 죽겠지만 이 정도의 양념이면 아군이 마무리를 하는 게 가능하다.
특히나 새로운 미드라이너 미역슨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현 TSL의 코치이자 전 미드라이너인 맥도날드는 순간적인 상황 판단이 뛰어났다.
특히 이니시를 거는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전체적인 기량에서 미역슨이 확실하게 우위라고 대이리스는 생각했다.
이는 맥도날드 본인이 은퇴를 결정한 이유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게임을 해보면 안다.
미역슨의 딜링 능력은 오히려 후반에 갈수록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미드라이너가 강한 건 중후반 타이밍까지.
그 이후로는 지속 딜러인 원딜러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역슨은 스킬을 미세하게 컨트롤하며 원딜 못지 않은 지속 딜링을 자랑한다.
미드 누커로서 폭딜 또한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필히 이길 수밖에 없는 한타의 구도.
이번 한타마저 진다면 애초부터 승산은 있지도 않았다.
거진 입롤에 가까운 광역딜을 묻혔는데 이걸 어떻게 뒤집을 수 있을까.
한 가지 간과해버렸다.
Unknown Error는 언제나 예상을 가볍게 벗어나버리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트린! 트린다조아 좀 어떻게 아…."
아군의 원딜러 카오스의 입에서 얕게 흘러나오던 탄식이 멈췄다.
Unknown Error의 트린다조아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결국 카오스의 크레이브즈를 따내버린 것.
순간 이니시의 판단이 잘못됐나 후회가 일렁였지만 대이리스는 금새 생각을 고쳤다.
'내가 나서지 않고 지켰다면.. 아니, 아니야.'
자신이 앞점멸을 하며 적팀을 양념친 건 이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로 인해 세 명의 적은 양념이 쳐졌고 한 명의 적, 원딜러는 체력이 엄청나게 까였다.
혼자서 네 명의 적을 붙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런 발목잡는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건 Unknown Error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
성장의 격차를 생각해본다면 무게추가 더욱 기운다.
화라락!
측면에서 치고 들어왔던 Unknown Error.
크레이브즈를 따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는지 더욱 더 파고든다.
한순간의 기교는 돋보였지만 그 이상 파고드는 것은 명명백백한 무리.
아무리 저 AP트린다조아가 사기라고 쳐도 이 이상은 무리여야 한다.
무리가 아니면 말도 안된다.
"탈력 걸고 점사하면 금방 잡아."
"궁극기 쿨타임 끝나면 바로 막타 넣어줘."
트린다조아가 다시 한 번 회전참을 사용해 미역슨의 산다라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아군들의 대처는 신속했다.
탈력으로 트린다조아의 데미지를 낮추고 CC기를 걸어 붙든다.
그 다음 점사를 해서 체력을 깎아낸다.
일련의 연계는 군더더기없이 물흐르듯 진행됐다.
분명 이 이상의 대처는 없고 Unknown Error의 트린다조아는 무력화됐다.
그럴 텐데도 대이리스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위기감이 와 닿는다.
솔로랭크에서조차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저 AP트린다조아.
현재 시점에서 AP트린다조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Unknown Error를 제외하고 말한다면 대이리스 자신이었다.
정말 얄궂게도 라인전에서 하도 당했기에 몸으로 깨달았다.
저 챔피언의 스킬구조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이윽고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쟤 빨리, 빨리 죽여야 하는데.."
가장 잘 컸던 트린다조아가 자진해서 몸을 던져줬다.
나머지 네 명의 적은 내가 양념을 쳤으니 트린다조아만 마무리하면 한타를 비벼볼 수 있다.
그렇기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가 들떠있던 팀원들이었지만 지금은 초조함만이 가득하다.
문제의 트린다조아가 좀처럼 죽어주지 않는다.
탈력을 걸고 CC기까지 연계해 점사를 했지만 궁극기로 버텨냈다.
물론 여기까지는 상정 내.
불사의 컨셉을 가진 트린다조아에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트린다조아는 무적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회전참을 사용해 내빼버렸다.
여기서 놓치고 만다면 체력을 채워서 돌아올 게 뻔할 뻔자.
그렇기에 점멸로 따라가 딜을 때려 넣었지만.
띠이잉..!
개떡같은 트린다조아가 조냐의 물시계를 사용해 또다시 시간을 끌었다.
당연 기다려서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끝이 아니다.
회복기를 사용했는지 트린다조아의 체력이 반피가 넘게 훌쩍 차올랐다.
그 탓에 잡는데 아주 약간 시간이 소요됐다.
그리고 그 약간의 시간은 트린다조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회전참으로 도망가 또다시 체력을 회복한다.
"저걸 뭐.. 어떻게 잡아?"
"원딜러를 지켰어야 했는데.. 미드 혼자서는 딜 넣을 상황이 아니다."
결국 이렇게 되리란 사실을 예상하고 있던 대이리스는 고개를 떨궜다.
억제탑이 두 개 깨진 상황에서 한타를 패배했다.
대패는 아니었지만 탑라인의 억제탑을 내줘야 했다.
흔히 말하는 3억제탑.
게임은 더 이상 뒤집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대이리스. 멘탈 괜찮아? 다음 세트 뛸 수 있겠어?"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하자."
세 번째 세트를 패배했다.
하지만 아직 결승전은 진행되는 와중이고 스코어는 오히려 앞선다.
앞선 첫 번째 세트와 두 번째 세트를 따냈기에 2대 1.
유리한 상황임에도 대이리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어지간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대이리스였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미드라이너에게 탑라인전을 탈탈 털려버렸으니까.
심지어 상대는 테자이의 재능약탈자를 풀스택으로 쌓으며 자신을 농락했다.
이렇게까지 초전박살이 난 상황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리라.
'후.. 설마 이대로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Unknown Error.'
대이리스는 솔직하게 분했다.
얼마 전 미드라이너뿐만 아니라 정글러로 까지 Unknown Error가 발을 넓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니, 경기 자체를 봤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에는 세인트조지아, 그 인성파탄자가 된통 당하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가 돼버리니 속이 들끓는다.
세인트조지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탑으로 덤벼봐라.
팀원들에게는 멘탈이 돌아온 척 괜찮다, 괜찮다 말을 한 대이리스는 속으로 분을 삭혔다.
만약 네 번째 세트에서 Unknown Error가 탑을 오지 않는다면 이 분을 어디에 돌려야 할까.
자신이 없지만 일단은 바로 게임을 진행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설욕을 하고 싶었다.
그 설욕의 순간은 의외로 싱겁게 와버렸다.
진행되는 네 번째 세트의 밴픽에서 상대가 거미여왕을 선픽 박았다..
멤버 교체가 없는 것 보니 네 번째 세트도 Unknown Error가 확실하게 탑이다.
설욕할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대이리스는 상당히 흥분해버렸다.
"호오.. 제 꾀에 제가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나 귤선장 할게. 왜 하는지는 알고 있지?"
"오케이 오케이. 그래도 일단 후픽으로 해보자. 쟤네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앞서 버린 마음가짐은 실수를 자아낼 뻔했다.
팀의 정글러인 오드아이가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됐을지도 몰랐다는 생각.
대이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려 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저 CLC는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르는 팀이다.
'그래.. AOA가 당했던 것처럼 어떤 페이크를 넣을지 모르니까 말이지.'
CLC가 얼마나 밴픽 단계에서 장난질을 잘 치는지 대이리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당했기도 했거니와 얼마 전 CLC 대 AOA의 준결승전은 보는 입장에서도 눈 뜨고 코 베인 격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팀원들의 배려로 픽순위를 미룬 대이리스는 상대가 말카림을 고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탑 거미여왕에 정글 말카림.
특히 저 말카림은 홍일점으로 유명한 MyumMyum선수가 애용하는 픽이었다.
'똑같이 돌려주마. 숙련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큰코다칠 거야.'
지난 윈터시즌의 결승전에서 대이리스는 거미여왕을 선픽박았다가 귤선장에 말려버렸다.
당시의 치욕을 역으로 되돌려줄 찬스.
그것도 Unknown Error 본인이 나서서 무덤을 파다니 우스운 꼬라지다.
이대로 게임이 시작하기만 한다면 전 판에서의 치욕은 씻고도 남으리라.
히죽 웃은 대이리스는 자신만만하게 귤선장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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