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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의 토끼
정글 빵테온이라니.
이 무슨 얼토당토하지 않은 정글러란 말인가.
Unknown Error가 이번에는 단단히 오바했다.
여섯 번째 세트가 시작하기 전만 해도 그러한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게 저처럼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Error선수라면 언제나 기대 이상, 당연한 거 아닙니까?"
"콰른트는 정말 속 편해서 좋겠네요. 알고도 속는 사람들이 괜히 속는 게 아닙니다. 롤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속을 수밖에 없는 거에요!"
선수 출신의 해설자 데카시르게 대차게 항변했다.
게임이 시작하기 전 밴픽 단계에서 데카시르는 정글 빵테온을 비판했었다.
정글링도 힘들 뿐더러 갱킹이 너무 일직선이다.
걸어가서 스턴 걸고 때리는 것밖에 없는데 이런 갱킹에 누가 당해줄 거냐?
그런데 당해줬다.
당해줬다기 보단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Unknown Error가 설계했다.
2레벨에 말도 안되는 솔용을 하더니 엇박자 타이밍의 봇라인 갱킹까지 성공시켰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노릇.
데카시르가 가장 걸고 넘어진 부분은 다름이 아니다.
빵테온이 가진 어쩔래야 어쩔 수 없는 단점, 바로 유통기한이다.
"그런데 안 오네요, 데카시르? 단순히 킬을 잘 먹어서라기 보다는 빵테온이라는 챔프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인정 하십니까?"
"하겠습니다..만! 솔직히.. 하아.. 정말 너무 잘하네요. Unknown Error, 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불가능했을 운용법입니다."
빵테온의 패시브는 적과 포탑의 기본 공격을 막아낸다.
이 자체는 너무나도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알고 있을 텐데도 예상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무리라고 생각되어 지는 다이브를 계속해서 쳐댄다.
패시브를 극한까지 활용해 포탑에게 얻어 맞는다.
그러면 딜이 약하기라도 해야지.
빵테온이라는 챔프가 원래 초반에 킬을 쓸어담으면 이토록 매서울 수가 없다.
당연 유통기한이라는 단점은 언제 어느 때라도 빵테온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유통기한을 Unknown Error는 운영을 통해 착실히 극복해나간다.
오브젝트를 칼같이 챙기고.
다이브 갱각이 나오면 지체없이 뛰어든다.
바쁘디 바쁘게 움직여 낼 수 있는 이득을 전부 챙긴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원천.
바로 빵테온의 궁극기와 쿨감 아이템이다.
"빠르게 쿨감템을 올려서 궁극기를 계속해서 써대니 언제 또 떨어질지 예상이 불가능하네요. 우리 데카시르도 예상하지 못하는데 말 다했죠."
"정글에서 불현듯 예고없이 떨어지니 어쩔 수가 없는 부분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Error선수가 잡으면 뭘 해도 사기에요. 운영이라는 측면을 너무 잘 살립니다."
글로벌 궁극기가 있음에도 빵테온은 저평가받는다.
초반에 아무리 킬을 먹고 날뛰어도 한 번 제지가 걸린 순간 날개가 꺾인다.
그렇게 고꾸라지면 유통기한 챔피언인 빵테온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Unknown Error는 그 부분을 훌륭하게 커버했다.
무려 정글러가 스플릿을 한다.
초반에 킬을 쓸어담은 덕에 아이템이 빠르게 나온 Unknown Error는 금은 장식 머리띠를 맞췄다.
자드를 상대로 1대1이 밀리지를 않는다.
물론 그 뿐만이라면 시간 문제다.
궁극기의 차이도 있거니와 발화.
자드의 코어템이 나올수록 빵테온은 밀리게 된다.
그리고 생존기 우월한 자드가 싸워주지 않으면 빵테온은 주구장창 대치만 해야 한다.
"이러한 부분을 MyumMyum선수가 아주 잘 보완해주고 있죠. 글로벌 궁극기가 두 개나 된다는 점! TSL로는 도저히 갈피를 잡기가 힘듭니다."
"미역슨 선수의 자드가 조금만 틈을 보이면 트페가 넘어가서 스턴을 걸어버리죠. 그러면 TSL은 바론이라도 잡고 싶은데.. 빵테온 궁극기때문에 그게 안됩니다."
이미 한 번 당해버렸다.
빵테온과 딜교환을 하고 빠지려던 도중.
트페가 궁극기를 사용해 넘어왔고 결국 추격 끝에 자드는 잡혀버렸다.
그렇게 자드에게 두 명이 집중되면 TSL은 바론 주도권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트페 뿐만 아니라 빵테온도 글로벌 궁극기를 가지고 있는 챔피언.
바론을 먹고 있던 도중 대낙하가 떨어진다면 그대로 몰살이다.
TSL로서는 이도저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4:4로 싸워도 답이 없죠. 자드없이 한타를 붙기엔 TSL의 성장은 지지부진 하거든요."
"스노우볼 굴러가는 속도가 장난 아닙니다. 이렇게 빠른 스피드감을 보이는 게임.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Error선수가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마법같은 게임입니다."
솔로랭크에서도 이 정도로 킬이 터져나는 판은 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솔로랭크처럼 킬딸만 치지도 않는다.
철저하고 냉혹하게 격차를 쌓아나간다.
결국 20분이 갓 넘어서 바론을 먹혔고 이는 억제탑 하나를 내주는데까지 이어졌다.
벌어질 대로 벌어져버린 글로벌 골드 차이.
CLC가 TSL을 압도적으로 농락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이는 Unknown Error.
그리고 그를 확실하게 내조해주는 MyumMyum선수.
MyumMyum선수가 뜬금 미드를 서게 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물론 중계진도 당황했다.
하지만 이력을 보아하니 지난 NA롤챔스 윈터시즌에서 미드로 활약한 전력이 있다.
당시에도 Unknown Error의 정글과 완벽한 호흡으로 게임을 캐리했다고.
그럼에도 다소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 불안은 게임에 들어가서 완전히 누그러졌다.
미역슨의 자드를 상대로 뒤쳐지지 않는 라인전.
적의 순간딜을 빼앗는 탈력을 활용해 킬각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만 질질 끌며 라인전만 진행해도 Unknown Error가 탑과 봇을 터트리며 게임의 승기를 가져온다.
더 볼 것도 없이 이미 게임의 내용을 통해 증명해냈다.
두 선수의 호흡이 빛을 발하며 여섯 번째 세트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3대3! 결국 많은 시청자분들이 예상해주셨던 대로 마지막 세트, 블라인드 픽까지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거는.. TSL에서 버티기가 더는 곤란해보이죠. 너무 처참합니다. 아, 마침 빵테온 궁극기 떨어집니다! 질질 끌 생각 전혀 없다는 듯 과감합니다!"
스노우볼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냉혹한 것인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와 함께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보통 포탑을 끼고 있으면 오브젝트라던지 상대 정글의 약탈이라던지.
그 정도 선에서 봐주는 게 일반적이다.
나라 간의 싸움으로 따지자면 공물을 보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저 CLC는, Unknown Error는 봐주는 것 없이 학살만을 택한다.
쌍둥이 포탑을 끼고 있는 TSL 선수들의 머리 위에 동그란 원이 그려진다.
빵테온의 궁극기가 떨어진다는 신호였다.
푸우웅!
물러날래야 물러날 수가 없다.
TSL로서는 여기서 한발 빼는 순간 바로 넥서스와 직결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빵테온의 궁극기에 피해를 받는다.
그 효과는 광역 마법 피해와 더불어 1초간의 둔화.
나머지 네 CLC의 팀원들이 호응을 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준다.
띠잉-!
MyumMyum선수의 트와이스 페이크가 점멸 황금카드와 함께 세 갈래 카드를 흩뿌린다.
맞은 대상은 TSL의 원딜러 카오스가 플레이하는 고르키.
스턴 시간동안 빵테온이 쑤셔대는 창질을 전부 얻어맞은 고르키는 터져버린다.
챠락!
화라락!
TSL에서도 당연 반격을 해댔지만 역부족.
트페는 조냐의 물시계로, 빵테온은 금은 장식 머리띠로 자드의 궁극기를 씹어낸다.
그리고 원딜러인 트리플리프트는 애초에 물릴 각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움직여보려고 해도 MyumMyum선수의 트페가 탈력을 걸어버렸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TSL의 진영을 통째로 집어 삼킨다.
"역시 이변없이 마무리 지어져 갑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이 남았죠."
"예, 결승전의 종지부를 지을 마지막 한 판.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이 순간을 위한 연출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챔피언도 그 어떤 조합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일곱 번째 세트. 그 밴픽을 시작하기 전에…."
7전 4선승제로 이루어진 결승전.
설마라곤 하지만 결국 와버렸다.
일곱 번째 세트의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최후의 승자,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지.
그리고 그 놈의 Unknown Error는 언제쯤 미드를 하련지.
여기까지 달려온 선수들을 위한.
또 분위기를 더욱 무르익게 하기 위한 뜸.
약간의 휴식 시간 이후에 이루어질 처절한 한 판에서 결착이 지어진다.
.
.
.
* * *
다섯 번째 세트를 지고 2대3.
위기스러웠던 순간을 딛고 여기까지 도달했다.
일곱 번째 세트를 치르기 전 고작 20분 남짓 짧막한 시간동안 나는 숨을 돌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까지 내가 이 자리에 있기 위해 해왔던 노력들.
그것들이 이번 경기 한 번으로 평받는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사람의 노력이라는 게 비단 결과로만 평받을 게 아니긴 해도.'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 말이 분명 있지만 사실 그건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면 과정은 무의미하다.
팍팍하게 느껴지는 이 한 마디는 현대 사회에서 일반론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그렇게 다정하지 않다.
그 때문이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마지막 세트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도 두 가지 있고 말이야.'
본디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 하나마저 솔직히 떨떠름, 딱히 이기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곳 CLC에 남아 계속 생활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야 아니됐다.
내가 다시금 인생을 살게된 것이 지난 4월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개월 전의 일.
그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렇게 착각했지만 바뀐 것은 그저 외적인 부분이었다.
나 자신을 이루고 있던 껍질들.
조금 호화로워졌다고 해도 알맹이는 그대로다.
혼자였으면 절대 깨닫지 못했으리라.
자뻑이라도 하면서 바보같이 자신을 속였을 지도 모른다.
이대로 인생을 탕진해버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딱히 덕분이라는 건 아니지만….'
예은을 만난 이후로 긍정적인 변화만 있었던 건 아니다.
굳이 기억을 꺼내고 싶진 않지만 LCL에서의 일도 있었고.
티격태격 싸우면서 울그락붉으락 얼굴 붉힌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솔직히 말해서 예은 성깔때문에 내가 손해봤던 적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였을까.'
서로 간에 이것저것 지적하고 욕하고 서스럼없이 따져댔다.
그랬기에 지금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옳다,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확신하기 힘들다.
옆에서 항상 지켜봐주며 필요할 때 쓰디쓴 한 마디를 해줄 수 있는 한 사람.
예은이 있었기에 나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항상 멈추지 않고 망설임 없이 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예은 없는 내가 상상되지 않는다.
'게이머로서도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
내가 예은을 키웠다.
종종 예은에게 우쭐댈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역으로 생각해버리곤 한다.
예은이 있었기에 긴장의 고삐를 놓지 않고 나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정말로 그렇게 됐을 지도 몰라.'
프로게이머의 세계는 냉혹하다.
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우월한 챔프폭, 그리고 전략.
그것들이 내 목을 조여올 가능성은 항상 염두해두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챔프폭이 넓을 뿐 이도저도 장점이 없는 문어발이 돼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 혼자였다면 스스로 만족하며 멈춰서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가르치는 바를 완벽하게 흡수해내는 예은이 있었기에 비로소 나는 긴장감을 풀지 않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연구하며 내 장점을 키워나가고 발전시켜 상대로 하여금 절대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때때로 실험대가 되주곤 한 게 바로 예은.
예은을 가르치고 물어보고 타박하며 가장 많은 성과를 얻은 사람은 다름아닌 나였다.
예은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 그건 너무 앞서 나간 거려나.'
언제나처럼 김칫국이다.
성장을 했다고 한들 나 자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예은 또한 마찬가지.
'변했다…. 라기 보단 성장했다는 말이 맞겠지.'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정말 많은 것이 바뀐 예은이다.
까칠했던 성깔도 조금은 둥글둥글해져 가끔은 이쁜 말도 해댈 정도다.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한 적이 없다.
툭 하면 성질 튀어나오고 말보다 손이 움직이기 일쑤고 그저 전보다는 덜해졌을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도 예은도 변한 적이 없다.
그저 달라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노력을 헛되이 할 수는 없으니까.'
나뿐만 아니라 예은도 지금 이 자리에 있기 위해 투자한 것이 적지 않다.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고는 해도 얻고 싶다.
욕심을 부리고 싶다.
그래야만 나는 껍질을 깨고 지금껏 내딛지 못한 한 발을 뻗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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