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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올마스터
한국에 도착한지도 벌써 2주 가량이 흘렀다.
2월이 지나가고 3월.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일단 그건 제쳐두고.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해야 할 때다.
나는 불현듯 찾아온 연락 때문에 두 정거장 건너까지 행차해야 했다.
터벅, 터벅.
빌딩의 숲을 가로 질러 인파가 부쩍이는 도로를 횡단한다.
여덟 시가 훌쩍 지난 늦은 오후임에도 바글바글 대는 사람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어지간한 중심가가 아니라면 보기 힘든 진풍경이다.
하지만 이곳 한국에선 언제나의 당연한 일상이다.
'이런 사람 냄새…, 그립기도 했는데. 익숙해지니 그게 또 그거란 말이지.'
내가 지금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동창회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비스무리가 붙은 이유는 이미 올해의 동창회는 열렸다고 한다.
다만 근 2년간 참석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겸 시간 되는 친구들끼리 모여 한 잔 하겠다.
뭐,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다.
그렇게 인파 속을 지나 도착한 곳은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들이 많이 갈법한 술집.
허름하다기 보단 약간 싼티나는, 그러면서도 알차게 팔 거 다 파는 딱 소주 마시기 좋은 건물 내의 포장마차다.
내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보니 비유를 하자면 그런 느낌이다.
나는 그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오 시현이! 얼굴 보기 정말 힘드네, 반갑다!"
문을 열자마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인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 보자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사실 연락을 받지 않았다면 필히 잊었을 과거의 연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하지만 상대 쪽에선 그렇지가 않은 모양.
절친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는 표정이다.
기억이 잘 안 나는 내 입장에서는 떨떠름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나를 기억해주고, 이렇게 불러준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다.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로 설렁설렁 걸어간 나는 적당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니가 하아~도 안 보여서 우리가 여기까지 모여준 건데 반갑다고도 안 하네. 하! 너는 참 옛날이랑 변한 게 하나 없다."
"요즘 너무 정신없이 살아서. 어쨌든 반갑다 명구..맞나?"
엎드려 절받기인 셈이지만 그래도 섭섭할까 인사해준다.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다는 명구가 진실로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해왔다.
다른 애들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명구는 알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반 때 상당히 친했던 기억이 얼핏 남아있다.
'솔직히.. 이건 기억하는 게 용한 거지.'
내가 너무하다기 보단 세월이 세월이다.
전생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거의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다.
그래도 뜸한 정도이지 연락 정도는 했지만 문제는 전역을 한 이후.
핸드폰을 바꾸고 단톡방에 다시 들어가지 않으면서 그나마 있던 연결선도 끊어졌다.
나에겐 있어선 근 7년 만에 보는 얼굴들이다.
내 기억력도 탓도 있겠지만 이건 참작을 해줘야 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연락을 안 했던 이유가.. 저쪽에 있는 녀석 때문이었나.'
제대로 된 취직없이 연습생 생활만 이어나갔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껄끄로운 인간이 하나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조금 악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난다.
내면 깊숙이 남아 있던 불쾌감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이야~ 얼굴에 살이 오른 게 아주 살만한가 봐? 쨌든, 오랜만이다?"
"티나나? 요즘 너무 집에서 먹고 놀기만 해서 기껏 관리한 몸이 다 무너졌네."
직사각형의 두 개의 탁자를 붙여서 열 명 가량이 친구들이 앉아 있다.
남녀의 비율은 6:4로 적절하지만 하나가 영 언짢게 걸린다.
자리가 분명 남아 있음에도 굳이 테이블 끝의 상석에 앉아있는 녀석.
"그런데 너 이름이 뭐였더라?"
"나 오형석이잖아. 장난이지? 니들이 날 잊을 리가 없잖아 하하!"
형석이가 큰 목소리 목소리로 웃자 분위기가 살짝 굳어버린다.
아무렇지 않은 듯 금방 풀리기는 했지만 나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불편을 느낀 듯하다.
그다지 엮이지 않고 싶은 부류의 인간.
집단에 꼭 한 명씩은 있는 자기 밖에 모르는 타입이다.
그런 주제에 처세술은 뛰어나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자기 탓은 아니다.
친구 사이에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있는 법이라지만 그것이 항상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지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서로 좋자고 만나는 게 친구인데 만날 때마다 기분이 상하면 관계를 가질 이유가 없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창들은 여럿 있지만 문어발이 넓은 녀석은 어떻게든 끼고 만다.
"사실 안 부르려고 했는데.. 뭐, 어쩌겠냐. 오늘만 참아라."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명구가 미안하다는 듯 속삭여온다.
일단은 나를 위해 모인 자리니만큼 신경을 써주려 했지만 불가피했단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왔더라.
형석이가 그랬던 게 한두 번이 아닌만큼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 안 했지만.. 뭐, 저 녀석도 나름대로 힘든 부분이 있겠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밉던 녀석도 이해해줄 자비가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빽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던가.
그리고 졸업하면 부모님 사업을 도울 거라고.
흔히 말하는 금수저 집안이지만 그 성격 탓에 인간 관계가 얄팍하다.
넓기만 하지 실속이 없다.
그나마 인내심있게 참아주는 고등학교 친구들조차 종종 마찰을 만들 정도니 말 다했다.
허구헌날 자기 자랑,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 다녔으니 당연한 인과응보.
부모님 잘 만나서 고생 한 번 한 적이 없으니 철이 없는 것도 그럴 만도 하다.
조금 나이가 든 입장에서 보고 있자니 오히려 측은할 정도다.
'이 녀석과는 참 딴 판이란 말이야.'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엄지 손가락으로 스윽 문질렀다.
이 술자리가 지루한 것도, 스마트폰을 만지는 게 버릇인 것도 아니지만 틈이 나면 괜시리 보고 싶어진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면 간첩이 된 게 이맘때쯤부터 였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별 이유없이 기억났다.
군대를 전역한 이후에 처음으로 구입한 갤럭시S.
입대할 때만 해도 당연하게 폴더폰을 사용하던 시기라 적응하는데 꽤나 고생했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틈만 나면 핸드폰을 만지작만지작 한다지.
딱히 영향을 받은 건 아니고, 무료하게 쉬다 보니 알게 모르게 핸드폰을 보는 일이 많아졌을 뿐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가장 많이 보게 된 것은 바탕 화면.
간간히 바탕 화면으로 지정한 사진을 넋 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곤 한다.
'확실히 인물이 좋긴 좋아?'
그 사진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 한 집에서 살게 된 동거인.
바탕 화면으로 지정한지라 그냥 밀어서 잠금 해제만 하면 바로 나타난다.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얼굴을 보니 반갑다.
나도 모르게 그만 히죽이고 말았다.
"어, 뭐야 그거 애인 사진? 에이…, 아니네."
명구가 내 핸드폰을 슬쩍 보더니 실망한 듯 중얼거린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거 참 실례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애인 정도는 아마 사귈 수 있을 텐데.
"연예인 사진 같은 걸 바탕 화면으로 하면 헷갈리잖냐 임마. 뭐, 나도 하긴 하지만."
"어? 연예인?"
착각의 방향이 내 생각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바탕 화면으로 지정한 예은의 사진.
정확히는 예은이 멋대로 지정해놓고 혹시라도 바꾸면 핸드폰을 부숴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은 사진을 연예인의 것이라 착각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한가.'
나야 뭐 같이 살다 보니, 얼굴을 하루이틀 본 게 아니다 보니 익숙해졌다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엔 정말로 연예인으로까지 보이나 보다.
그러고 보면 같이 다니다가 종종 곤란했던 기억이 있다.
혹시 아이돌에 관심 없냐, 우리 소속사와 함께 해볼 생각 없냐 같은.
끈질긴 권유에 몇 번 당했던 이후로 번화가는 얼씬도 안 하게 됐다.
나는 괜찮지만 예은이 영 거북했던 듯하다.
"연예인같은 건 어짜피 그림의 떡이고! 현실에서 여자 친구 사겨야지. 설마 전역하고 한 명도 못 만들었냐?"
살짝 술기운인 돈 형석이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온다.
대학에서 누굴 사겼다는 둥, 후배들은 내가 꽉 잡고 있다는 둥.
여기에 더해 내심 학벌 자랑까지 해대니 분위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잘난 대학을 부모님 빽으로 들어간 건 둘째 치고 지금 이 자리에는 대학에 안 간 이들도 있으니까.
나야 나 스스로 판단을 해서 휴학을 한 거니 그렇다 쳐도.
집안 사정상 성적이 됨에도 대학에 못 간 명구의 얼굴엔 침울함이 엿보인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은 어지간하면 신경을 써주는데 저 형석이만 말썽이다.
즐겁자고 모인 자리에 지 자랑만 해대니 같이 있기 솔직히 넌더리 난다.
"정말? 형석이는 역시 대학가서도 잘 나가나 보네?"
"형석아, 혹시 나도 한 명 소개시켜 줄 수 있어? 요즘 옆구리가 시리다."
저런 형석이에게 어떻게든 빌붙어 꿀을 빨아보려는 몇몇 친구들.
사정을 이해하기에 나쁘게는 보지 않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술자리는 전체적으로 즐거웠으면 한다.
누구 한 명 띄워주기 위해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손해보는 흐름은 내키지 않는다.
'그럼 얼굴도 비췄으니 슬슬 돌아갈까.'
나 만나자고 모여서 더 기분 상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무언가 껀수 하나 만들어서 돌아가면 딱 좋은데.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술집의 문이 딸랑 거리며 열린다.
술집 문에 도어벨이 설치돼 있는 거야 흔한 일이고, 내가 들어올 때도 울렸었으니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람.
사람들의, 특히 남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두 명이 고개가 돌아간 채 고정되자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서 쳐다보게 된 것.
그 시선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은 빨간 머플러를 두른 미녀였다.
이 술집의 성비는 치우쳐진 편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마치 한 폭의 그림에서 튀어 나온 듯한 화사함.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음에도 몸매가 두드러진다.
마스크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어 가진 바 아름다움이 전부 새어 나오진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기대를 자아낸다.
혹시 TV에나 나오는 유명 연예인이 아닌지.
한 번쯤 상상이 가게 한다.
이만한 사람들의 눈초리가 익숙한 것일까.
아니면 전혀 개의치 않느다는 것일까.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미녀는 한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낮은 굽의 구두 소리.
본래라면 신경 쓰일 정도가 아니지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대체 어느 쪽으로 가는 걸까.
혹 내 앞에서 멈추는 건 아닐까.
김칫국을 마시는 남자들은 입도 벙끗 하지 않은 채 시선 만을 두고 있다.
이윽고 미녀의 걸음이 멈춘다.
유일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던 남자.
안타깝게도 내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 보며 차가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예나 지금이나 얼굴 만은 반반한 녀석.
예은이 꼬치꼬치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분명 늦게 들어올 수 있다고 말도 하고 나왔는데.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시시콜콜 간섭을 해대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 늦어질 수도 있다고.. 했잖아?"
내가 정론으로 따지자 예은의 말문이 막힌다.
아무리 예은에게 접어주고 들어가는 일이 많다고 해도 가오가 있지.
특히나 친구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잡혀 산다는 느낌을 주고 싶진 않다.
"..그치만 외로웠단 말이야…."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며 울먹울먹.
이건 반칙이다.
가끔 가다 사람 골 때리게 하는데 뭐 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내가 이 녀석 하루이틀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내 대응력을 만만히 봐선 곤란하다.
나는 예은의 손을 낚아 채듯 움켜쥐었고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한 가지 변수.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명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흐름을 끊었다.
"혹시.. 시현이 핸드폰 바탕 화면에 찍혀 있으셨던 분..?"
사람들의 이목을 불러 일으킨 미녀가 지인의 지인이었다니.
술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당황해서 어어, 하는 사이에 퍼뜩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명구가 판을 키워버렸다.
앞뒤 설명이 부족한 탓에 친구들은 어림짐작하며 수근대기 시작했다.
여유만만 으스대던 형석이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본다.
자신들 나름대로 상황을 해석하며 오해를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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