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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올마스터
어제 동창회 비스무리한 술자리에서 만났던 오형석.
예전만 해도 그렇게 못마땅할 수가 없었는데 다시 보니 그렇게 철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다르다니.
신기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녀석을 내심 부러워 했다.
'딱히 노력하며 살지 않아도 인생에 고속도로가 쭉쭉 뚫려 있는데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형석이의 성장 배경은 누가 봐도 탄탄대로.
부모님이 건실한 사업가인 데다 인성도 훈훈하시다.
다만 자식에 대해 조금 심각할 정도로 싸고 돌아서 형석이가 그 모양 그 꼴이 났다.
주위 환경만 놓고 보면 정말로 무엇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다.
어렸을 적의 내가 형석이를 부러워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지금은 부러운 생각이 일도 들지 않는다.
내 개인의 성공과는 별개의 문제.
최근 같이 살고 있는 지인의 영향이 크다.
"예은 너.. 부모님이 몇 채 갖고 계신다고 했더라?"
나는 예은이 깎아다 준 사과를 포크로 찍어 아삭 베어 물며 넌지시 물었다.
예은과의 동거.
부대끼며 살다 보니 자연스레 말을 섞을 일이 많았다.
예은의 집안이 상당히 잘 산다는 사실은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들어 보니 건물을 몇 채씩이나 소유한 금수저 중의 금수저.
형석이 이상으로 집안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내색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자립하려고 하는 정말 기특한 녀석이다.
"몇 채? 아, 빌딩? 강남이랑 강북 쪽에 너덧 개씩 있을 걸? 자세히는 몰라."
"잠깐, 빌딩이라고? 그 빌딩이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빌딩은 아니지..?"
입지만 좋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천문학적인 값어치 자랑한다는 그것.
현대 한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직업이라는 건물주가 가능하다는 밑바탕.
내가 착각한 거라면 부디 바로 잡아줬으면 좋겠다.
"그거 맞을 걸? 왜?"
"아니, 잠깐만. 난 영락없이 집 몇 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빌딩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하도 별 거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해서 깜빡 속았다.
지금의 나도 돈 모아둔 것과 은행에서 조금 당겨 쓰면 어디 가서 코 좀 풀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별로 생각 안 한 것도 솔직히 있고.
예은이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
그런 모습에서 무언가 느낀 바람에 부럽지 않다고 한 거지.
부모님이 빌딩 건물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차피 부모님 거잖아?"
"너.. 저번에 외동이라고 하지 않았니..?"
"응, 맞는데. 왜?"
내가 이상한 건가?
왜 자꾸 왜? 라고 되물어오는 걸까.
혹시 금전감각이 마비된 티타늄 수저라 입감이 안되는 건가.
정말로 해탈을 한 걸까.
아니면 혹시 내가 한심한 건가.
"부모님 덕 볼 생각 없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내가 딱히 네 덕을 보려는 건 아니고…."
나도 모르게 비굴해졌다.
형석이 꼬봉 노릇을 하던 몇몇 친구들의 마음이 여과없이 이해된다.
뭐, 반쯤 농담으로 하는 말이고 당연히 연연할 생각은 없다.
그냥 인간적으로 쪼오금 아쉬울 뿐이지.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노력따위 정말로 안 해도 될 텐데.'
예은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 부모님께 신세지기 싫다고 아르바이트까지 했을 정도다.
전화 한 통 때리면 수도꼭지에 물틀듯 입금이 될 게 선히 보이는데도 본인이 거부했다.
정말 알면 알수록 모를 녀석.
학벌도 학벌인 데다 얼굴까지 반반해 어디 하나 아쉬운 부분이 없다.
정말 내가 어쩌다가 이런 녀석과 얽히게 되었을까.
'그런 부분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니 위화감은 없지만.'
이 녀석이 자만심이 없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잘난 척, 있는 척, 어지간히도 한다.
다만 자기 자신이 이루어낸 부분 외에는 결코 자만하려하지 않는다.
요즘 하고 다니는 것처럼 얼굴에 진짜 조금만.
아니, 신경도 아니라 그냥 드러내기만 해도 주위에서 알아서 띄워주는데.
부모님 어디서 뭐하신다 한 마디만 해도 나조차 턱이 빠질 지경인데.
절대 그걸로 이득 볼 생각은 하나 없다.
자만심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
그것이 엄청나게 강하다.
타인과 잘 섞여 들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할 거 없으면 아이스크림이나 갖다 줘.."
"목 많이 아퍼?"
어제 나갔다 온 이후로 콧물은 어느 정도 멎은 것 같지만 이제는 목이 부어서 아프시단다.
이 녀석 술 챘을 때도 그렇지만 아플 때도 어지간히 칭얼댄다.
평소에는 도도한 척 하는 주제에 정신 없을 때는 남한테 매달리는 타입이다.
나한테만, 이라는 생각을 하니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자, 여기. 그런데 목 아프면.. 점심 먹기도 힘든 거 아니야?"
"..아마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통을 예은에게 건네자 수저로 푹푹 퍼먹는다.
요령껏 동그랗게 말아서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린 후에 목으로는 넘기지 않는다.
나도 목감기 걸렸을 때 고생해봐서 알지만 저렇게 목 안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면 느낌이 좋다.
뜨겁게 부기가 오른 목젖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닿으며 자글자글.
녹아나면서 달아오른 부분에 잠시나마 고통을 덜어준다.
실질적인 효과는 없다고 해도 그러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목감기 걸렸을 때 밥먹기 힘든데 배도 채워준다.
'요즘에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으니 괜찮겠지만.'
예은이가 얼마나 잘 먹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그런데 동거한 이후로 이상하게 많이 먹지 않는다.
설마 눈치라도 보는 걸까.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봤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스트레스성 폭식 같았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스트레스 풀이 방식의 한 갈래다.
맛있는 걸 먹어서 스트레스를 푼다.
특히 맵고, 짜고, 달콤한 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외로 먹을 것에 의존한다.
다만 예은의 경우 그것 말고는 스트레스를 조절할 방법이 없어 치우쳐진 느낌이다.
술도 그렇고 상당히 과했다.
그 상태로 계속 이어져 갔다면 이쁜 얼굴 망가질 뻔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가출.
그러니까 나와 살게 되고 나서부터는 폭식하는 일이 잦아들었고, 술도 적당한 선에서 즐길 만큼만 마신다.
물론 일반인에 비하면 꽤나 많이 먹고 마시는 편이다.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가진 바 통이 원래부터 상당히 큰 모양.
예은답다면 정말로 예은답다.
'이제 나도 이제 내 할 일을 해볼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통 채로 물려줬으니 한동안은 조용할 거다.
내가 딱히 어디 나갈 예정도 아니니 TV보면서 얌전히 쉬고 있겠지.
그러면 나도 하려고 했던 일을 할 수 있다.
일이라기 보단 비즈니스.
비즈니스라기 보단 컨텐츠.
지금의 나는 돈에 딱히 연연할 필요가 없으니 서비스한다는 심정이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은 딱히 회사원이 아니니까.
돈보다는 명예, 그리고 개인의 만족이란 느낌이 강하다.
'간간히 생존신고를 안 하면 소화가 안되는 기분이야.'
그런 연유로 다시금 방송을 시작하기로 했다.
쉴만큼 쉬기도 했거니와 솔직히 그립다.
회장님과는 연휴 기간동안 만나 뵈었지만 다른 팬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Unknown Error가 아닌 올마스터로서의 팬들.
어쩔 수 없다면 없는 일이지만 오랜 기간 방치하게 됐다.
가끔은 환기가 필요한 법.
듣기로는 내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다고 하니 더더욱이다.
'새롭게 이목을 끄는 이가 늘어났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내가 잠수를 탄지 꽤 오래됐다.
더불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팬들을 만족시킬 수준의 인재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고 하니, 나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질 만도 하다.
혹시 몰라 확인은 해봤지만 상상 이상.
결단코 무시해도 될 만한 이들은 아니다.
개인적인 부분까지 포함해 조금 관심이 일 정도다.
딸칵!
예은과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
대략적인 넓이는 40평으로 화장실 두 개, 방 세 개의 일반적인 구조를 갖췄다.
나는 그 세 개의 방 중 하나인 내 개인실에 들어섰다.
그곳에 있는 개인 컴퓨터의 전원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켰다.
'밑에 두면 나도 모르게 발가락으로 키고 만다니까.'
혼자 살 때는 상관없겠지만 타인과의 동거.
그것도 이성과 살 때는 조금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도 다름아닌 예은이다.
CLC숙소에 거주하던 당시 내 개인실에는 예은 용의 컴퓨터도 하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연습을 시키다 보니 어찌저찌 하나 더 컴퓨터를 두었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그 컴퓨터를 발가락으로 키니 무려 물어버렸다.
입을 크게 벌리더니 내 팔을 아그작!
다행히 상처까진 나지 않았지만 하루 가량은 지워지지 않았던 송곳니 자국은 강렬했다.
다음 번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
자기는 내 물건 함부로 하는 주제에 내로남불이 이만저만 하지 않은 예은이다.
하지만 일단 연장자로서 이해해주자.
같이 살게 된 마당, 서로 간에 어느 정도의 트러블은 감수해주는 게 맞다.
'요즘은 많이 둥글둥글 해졌으니 봐줄 만하지만.'
본인 이야기로는 스트레스가 많이 덜어졌다고.
최근의 예은은 독기가 빠진 듯한 모습이다.
솔직히 조금 섭할 정도.
내가 알던 예은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호전적이지가 않다.
가끔 가다 일부러 신경을 살살 건드려도 되려 미안한 반응이 터지면서 내가 다 당황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아무리 동태 눈깔이 돼 있어도 예은은 예은이고 언제 또다시 확! 성깔 돋을지 모른다.
이 상태 그대로 부디 오래가도록, 나는 성심성의 잔수고를 쏟고 있다.
이 방 말고도 예은과 공용으로 쓰는 게임방에서는 특히 더 세심하게 행동한다.
내 평소 행실이 모나지 않아야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방금 전 컴퓨터도 무의식 중에 발가락으로 누르지 않도록 본체의 위치 선정을 책상 위로 했다.
'덕분에 돈과 시간을 써야 하긴 했어도 두고두고 좋은 일이니 투자할 만하지.'
대부분의 컴퓨터 책상들이 본체 위치가 아래로 설정돼 있다.
그래서 알맞는 컴퓨터 책상 찾는데 약간 수고를 들여야 했다.
그 외의 집안 내 가구들에도 세세하게 불편이 생기지 않도록 노고를 들였다.
조금 까놓고 말하자면 돈 좀 발랐다.
이곳 아파트는 월세로 빌리고 있어 자금에는 여유가 있다.
예은과 언제까지 함께 살지 모르니만큼 당연한 선택.
대신 가구 등을 비롯한 전자기기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이 정도면 CLC에서 쓰던 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아.'
상황만 놓고 보니 신혼 살림이라도 마련한 듯한 꼴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장비들로 시험 운행을 할 때가 왔다.
그 장비에는 방송 장비도 당연 포함돼 있다.
오늘의 첫 방송을 시작으로 한동안은 바빠질 예정이다.
'먼저 방송국부터 들어가 볼까.'
간만에 방송국으로 들어가니 수백 개의 글들이 보인다.
사실 존재 여부야 알고 있었지만 보기가 겁난다.
제목을 쭉 훑어 봤는데 영 안 좋은 느낌의 것들도 있었고 일단은 묵혀두자.
그리고 새로 글을 하나 쓰자.
타닥, 타다닥!
짧막하고 임팩트 있게 정리해 엔터키를 눌렀다.
방송국에 새로운 공지사항이 올라간다.
올마스터의 복귀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다.
끼익.
곧바로 방송을 시작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흐름이 끊겼다.
불현듯 열린 방문에서 예은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들어가도 돼?"
"야.. 노크는 해줘라."
어차피 말 해도 안 듣겠지만 저래 봬도 많이 고쳐진 거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일단 막무가내로 들어왔을 테니까.
그래도 가능한 지켜줬으면 한다.
남자들의 사정상 불쑥불쑥 들이닥치다간 정말로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앞으로도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아이스크림은?"
"다 먹었어."
싹싹 긁어 먹은 게 자랑스럽기라도 한 건지, 예은이 빈 아이스크림 통을 나에게 보여준다.
혹시 몰라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큰 거 한 통을 통째로 줬는데 그걸 다 먹었다.
목감기 걸렸을 때 얼마나 아이스크림이 고픈지.
이해를 못해줄 것도 아니지만 이 정도면 차라리 병원을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혼자 가기 그런 거면 데려다 줄까?"
"바보, 호들갑은. 조금 쉬면 나아."
툭 내뱉듯 말한 예은이 내 방 한구석에 있는 침대에 몸을 던진다.
아파서 몸 고달플 때.
혼자 있기 싫은 거 어느 정도 공감은 간다.
예은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자제를 해줬으면 하는데.'
최근 들어 점점 말도 행동도 귀여워지고 있어 상대하기 난감할 때가 많다.
확! 사귀는 관계라면 여러모로 편하고 좋을 텐데.
예은도 내가 싫은 눈치는 아니고 한 쪽에서 말을 꺼내면 물흐르듯 관계가 진전되지 않을까.
내가 만약 3자의 입장에서 봤다면 그렇게 평했을 수도 있다.
'확신이 안 서니까 문제지.'
그리고 자존심도 걸린다.
연애라는 게 사귀자고 말을 꺼낸 쪽이 접고 들어 간다는 느낌이 있지 않는가.
만에 하나라도 거절 당하면 예은과의 관계가 서먹해지는 건 아닐까.
사실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저 녀석 입장에서도.. 별반 다르진 않으려나.
자존심 무척이나 세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예은.
예은도 곧 죽어도 지 입으로는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대충 이런 느낌으로.
동거 이후로도 나와 예은은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미묘한 관계, 신경전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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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3부 시작하자마자 사귀고, 하고 그러면.. 시원스러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오직 나만이 마스터다는 떡타지가 아니라서 팍팍 진행될 수는 없어요..
동거까지 하고 있는 둘이니 차차 단계 밟아 나갈 거에요.
일반적인 남녀가 아니라 둘 다 겜덕후라는 점도 감안을 하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3부 오늘로 막 시작했어요..
오늘 세 편, 내일 세 편 올라갑니다.
그렇게 끊는 편이 스토리 진행상 낫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