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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올마스터
게임방에서 예은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분위기는 금새 훈훈해진다.
친밀도가 무럭무럭 올라서 이대로 계속 있으면 한계점을 돌파하지 않을까.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정말이지 애틋하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더더욱이다.
"진짜.. 아! 좀.. 한 판만 봐주면.. 안될까?"
"키킥. 실력으로 이겨 짜샤. 진 사람이 화장실 청소 알지?"
대부분의 가사를 해주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화장실 청소는 손이 영 안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종종 게임을 해서 정하곤 하는데 당번은 거진 내가 된다.
화장실 청소 하는 것쯤이야 평소에 워낙 잘해줘서 불만은 없지만..
이 녀석 게임을 잘해도 너무 잘한다.
'분명히 같이 시작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빠르게 배우냐..'
현재 나와 예은이 겨루고 있는 게임은 흔히 있는 격투 게임 종류다.
예은이 플레이 하는 무식한 근육 남캐가 내 아바타인 연약한 여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
사실 뭘 해도 질 거 같아서 그래도 여캐면 조금 살살 해주겠지.
하는 감에 고른 건데 인정사정이 없다.
"내가 또 이겼네? 히히히. 화장실 청소, 수고해?"
"야.. 화장실 청소는 둘째 치고 한 판만 더하자. 진짜 분해서 못 넘어가겠다."
정말 게임을 할 때만은 예전으로 돌아온 것처럼 얄밉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혹시 게임만 안 시키면 정상인이 되는 건 아닐까.
순간 생각도 났지만 게임이라기 보다는 엄밀히 스트레스의 부류일 거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를 롤로 풀려니 꼬이고 꼬였겠지.
인간적으로 롤은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게임이다.
나조차도 솔로랭크 하다 보면 혈압 돋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 녀석처럼 성격이 삐뚤빼뚤 한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대로 롤을 접게 해버리면 참한 색싯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데? 요즘 사는 게 재밌어서 그런데?"
예은이 배시시 웃으며 받아친다.
절대 그냥은 옳다고 안 해주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 말의 내용이 상당히 낯부끄럽다.
'동거인으로서의 나를 그렇게 고평가해준다면 고맙기는 하다만'
나까지 괜히 부끄러워진다.
언뜻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해 대화가 끊어지기를 수 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파악한 예은이 양 손바닥을 내저으며 횡설수설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그냥 그.. 몰라! 잊어."
아무리 곱씹어 봐도 말실수 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본인도 알긴 아는 갑다.
할 말이 없어지니 볼을 부풀리고 고개를 휙 돌린다.
정말 간만의 이유없는 삐짐.
이런 부분 하나하나가 예전처럼 밉지만은 않다.
오히려 귀여울 지경이다.
"나도 엄청 즐기고 있어. 다 네 덕분이야."
"알면.. 됐지만."
머리를 쓰담쓰담 만져주니 부풀었던 볼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 녀석 이렇게나 귀여운 성격이었던가.
독기가 한풀 꺾이고 나니 새침한 성격의 수줍은 여자애.
놀랍게도 예은이 그렇게 보인다.
"진정했어?"
"진정은 되는데 뭔가 분해. 난 강아지가 아니라고."
캉캉! 짖던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준다.
예은의 말을 듣고 보니 상황이 조금 비슷한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그러자 예은이 나를 흘겨본다.
그렇다고 딱히 내 손을 치우지는 않는 게 싫은 눈치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예은의 이마 쪽 머리칼을 한 방향으로 넘겨준 나는 이야기를 진행했다.
분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어떻게든 한 판 이기기는 해야 오늘 방송을 진행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번에는 무조건 이길 테니 각오 해라?"
"..절대 안 봐줄 거야."
예은이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게임기의 컨트롤러를 콱 틀어잡는다.
화장실 청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봐줄 생각이 없는 듯 게임에 임하는 태도가 사뭇 진지하다.
하지만 이번 판에 한해서는 나도 만만치 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 생각이니까.
"야, 야! 너 얍시 쓰지 말랬지!"
"뭐, 어때. 공식전도 아니고. 이기면 장땡이지."
격투게임에 보면 흔히 있는 얍시 콤보.
심리전을 기반으로 하는 가위바위보 싸움 비스무리한 거다.
평소라면 잘 당해주지 않는 예은이지만 살짝 흥분한 상태라 움직임이 가볍게 읽힌다.
짤짤이 데미지만 골라서 주며 장기전을 간 끝에 나의 승리.
게임은 이겼다만 현실에서 져버렸다.
상당히 빡친 듯한 예은이 발가락으로 내 종아리를 꼬집는다.
힘 하나는 예전과 다르지 않게 억척스러운 예은.
몸은 고통스러움에도 변하지 않은 예은다운 모습에서 이상하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
.
.
* * *
적진탐방.
이라는 건 아니지만 예은과 노닥거리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은 나는 한가했다.
방송은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고 소화를 변명 삼아 잠깐 파프리카TV의 타 BJ들 방송을 둘러봤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나, 그리고 내가 알던 사람들은 얼마나 있나.
실시간 방송만 눈에 띄다 보니 찾아볼 때마다 기억나는 사람들이 한 명씩은 더 보인다.
그리고 오늘은 인간조아라님이 방송을 하고 있길래 몰래 들어갔다가 자동 매니저.
아무래도 이런 상황 예상하고 진작에 대비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인간조아라]-올마스터님 안녕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걸 올마스터가 캐리하네.
-와 진짜 개뻘쭘하겠다.
-그러고 보니 방장 올마스터랑 LCL나갔었지ㅋㅋ
현장에서 딱 걸려버렸다.
채팅창에서 겁나 뭐라뭐라 했지만 그렇게까지 찔리진 않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연락도 했거니와 변명거리도 있었으니까.
유야무야 넘어가며 훈훈하게 마무리를 하려 했지만.
[올마스터]-......서프라이즈로 인사하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요ㅎㅎ
-응 늦었어. 이제 와서 오리발 내미지 마.
-ㅋㅋㅋㅋㅋㅋ과연 슈퍼 세이브는 가능할 것인가.
[인간조아라]-뭐, 믿어드리죠ㅋㅋ
뻘쭘해진 나는 일일매니저를 자청해야 했다.
이게 참 별 거 아닌데도 그냥 가기가 뭐한 상황이었다.
일일매니저라고는 하지만 대충 한 시간 남짓.
몇몇 시청자들이 올마스터님 방송 좀 켜주세요, 라는 걸 핑계로 빨리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핑계와는 다르게도 방송을 하고 있지 않다.
물론 방송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내 눈에 띄어버렸다.
웃고 떠드느냐 잊고 있었던 도슈의 방송.
실시간 인기 급상승 랭킹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혹시나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비슷한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로그아웃하고 조심조심.
방송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에 관련된 화두가 튀어나왔다.
시청자들이 올마스터 왜 까냐고 어쩌고저쩌고 BJ에게 따져댔다.
-방장님 왜 올마스터 까면서 어그로 끔? 시청자 유입 더럽게 하네.
-옛날에 저격 하다 털려 놓고ㅋㅋ 얼굴 가죽 참 두껍다.
**님이 강퇴당했습니다.
**님이 강퇴당했습니다.
BJ의 대응은 칼같은 강퇴.
다른 방이었으면 놀라웠을 수도 있는 대응이지만 이 방에 한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도 그럴 게 도슈, 인성에 문제 많기로 소문난 도씨 삼형제의 일원이다.
'이제는 삼형제가 아닌가?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금 미안하게 됐네.'
성격 나쁜 놈들끼리 뭉쳐 있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도차처럼 막 대리게임단을 운영하고 그런 머리 비상한 악당도 있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롤은 단순한 게임이다.
게임에서 악당 포지션 잡아봤자 그냥 나쁜 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놀아줄 사람 없어서 그런다.
그런데 다 떠나가고 졸지에 혼자 남게 된 도슈.
'어지간히 심심했겠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BJ를 하고 있는 이유도 아마 놀 사람이 없어져서, 아주 간단한 이유일 것이다.
로드 오브 로드 갤러리에서 어그로 끄는 이유도 똑같다.
자기한테 관심을 좀 달라.
안 주니까 삐딱선을 타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슷비슷했던 아이가 내 주위에도 한 명 있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커피.. 가져왔는데?"
귀신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예은이 내 방문을 빼꼼 열고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평소였다면 최소 30분 전에 와서 새로 만든 간식을 주고 갔을 텐데.
불만인 건 아니지만 의아할 수밖에 없다.
또박또박 걸어온 예은이 쟁반에서 내려 놓은 것은 다름 아닌 두 개의 컵이었으니까.
혹시 같이 한 잔 마시고 가려고 하나 생각했지만 다른 한 잔의 머그컵에 든 것은 커피가 아니었다.
"전부터 관심이 있어서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힘들더라구."
눈썹을 살짝 찡그린 예은의 눈길이 머그컵으로 향한다.
머그컵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은 연노란 빛이 감도는 푸딩.
외관에서 알 수 있지만 구입한 게 아니라 예은이 손수 만든 핸드메이드다.
달콤한 냄새에 매혹돼 스푼으로 한 입 떠서 머금자 기분 좋은 단 맛이 입 안에 감돈다.
"맛있기만 하구만?"
"그냥.. 접시에 옮기는 과정에서 실패했어."
확실히 부드럽긴 하다.
맛에는 문제가 없지만 단단함에서는 점성이 조금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컵을 뒤집어서 접시에 놓으려 했을 때 모양이 망가진 듯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대략 상상이 간다.
예은이 맨날 새로운 요리를 가져다 주다 보니 나 또한 관찰 능력이 많이 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 입맛이 까다로워졌다는 건 아니다.
완벽주의자인 예은의 속내를 알아채기 위해서 고심하고 고심한 결과다.
'정말 게임 내에서도 그렇고 깐깐하단 말이지. 그 때문에 팀원들과 마찰이 있었던 거기도 하지만.'
비슷비슷하다곤 했지만 도슈와 예은은 확실하게 다르다.
도슈가 남을 깔보며 잘난 척 하는 그냥 단순하게 성격이 나쁜 거라면, 예은은 하도 완벽주의자라 팀원이 실수하면 바로 응징한다.
키보드로 마구마구 때려버린다.
결과만 놓고 보면 둘 다 나쁜 아이지만 예은은 그저 표현 방식에서 문제가 있었던 거다.
'뭐, 성격이 까칠한 건 매한가지긴 해.'
팔이 조금 안으로 굽어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그러고 다니지 않으니 된 거 아닐까.
적어도 나는 있는 그대로의 예은을 보려고 한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고마워서."
요즘 들어 고맙다는 말을 너무 달고 살게 된 것 같긴 하지만 사실이다.
최근의 나는 정말이지 행복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더욱 행복해질까.
아니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게 되는 꼴이 될까.
그 난제가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는 것 빼고는 정말로 아무 문제 없다.
"흐응, 고마우면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돼?"
"뭐든지.. 잠깐 이거 혹시 또 녹음하는 건 아니지?"
이전에 한 번 데이게 된 이후로 부탁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게 참 북미의 해설진이 말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장미같다는 비유는 참으로 적절하다.
멋모르고 만지다간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버릴 지도 모른다.
"바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 단물 쪽쪽 빨린 개미 엉덩이 신세가 될 걸?"
"윽, 부정은 할 수 없겠다만.. 그런데 너 어렸을 적에 개미 먹었던 거냐.. 확 깬다 진짜."
개미 엉덩이를 빨아 먹으면 신맛이 난다.
초등학생 때 동네 살던 형한테 들었던 말이다.
물론 예은도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가끔 가다 엉뚱한 소리하는데에 참 일가견이 있다 이 녀석도.
"별건 아니고 너 쟤랑 내기할 거지?"
예은이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잠깐 잊고 있었지만 나 도슈의 방송을 보고 있던 중이었지.
내기라는 말에서 미루어봐 예은은 전후사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 한술 더 떴다.
"어차피 내기는 할 테고. 그리고 질 생각은 없지? 이겼을 때의 벌칙에 대해선데…."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마무리까지 정해놓으셨다.
그리고 예은의 말에는 어디 하나 틀린 부분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빤히 들여다 보고 있달까.
우리 엄마한테도 느껴보지 못한 통찰력이다.
"그냥..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라도 해보자고? 의외로 좋은 애일수도 있잖아."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아니다.
예은이 독기가 많이 빠지면서 착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만큼 대화를 통한 해결법.
의외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메뉴는?"
"뭘 물어? 당연히 비빔밥이지."
예은이 방실방실 웃으며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린다.
역시는 역시.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쉬이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공기의 떨림을 통해 전해진다.
그런 예은에게 이렇게나 대접받는 삶을 살고 있는 나.
순간 돋아버린 소름은 앞으로도 이 동거 생활에서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유익한 경고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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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비빔밥인 이유는 1부에서도 잠깐 나오긴 했지만 내일 분에도 나올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