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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올마스터
방송을 끝내고 문밖을 나서자 먼저 TV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거실 쇼파에 엎드려 누워있는 예은이 보인다.
그 자체는 하등 이상할게없지만 문제는 옷차림.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눈 뜨고 보기 민망한 지경이다.
짧은 반바지를 입은 탓에 매끈한 맨다리가 노골적으로 강조된다.
'이렇게 눈호강 시켜 줘도 곤란한데 말이지.'
반응을 안 하려고 해도 남자인 이상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내 잘못이라기 보단 같이 살면서 주의를 하지 못한 예은의 탓이다.
아무튼 그렇다.
"크흠..! 그렇게 입으면 안 춥냐?"
집안에서야 그다지 춥진 않으니 반바지를 입어도 괜찮겠지만은.
보는 입장인 내가 감사할지 언정 괜찮지는 못하다.
헛기침을 내뱉어 눈치를 주자 누워있던 예은이 부스스 일어난다.
"..잠깐 자버렸어."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예은이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몇 마디 속삭여온다.
그러고서 눈을 비비며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본다.
그 탓에 초점이 눈으로 향해진다.
알고는 있었지만 상당히 긴 속눈썹.
딱히 붙인 게 아닐 텐데도 가지런히 예쁘게 자라있다.
"잘 거면 안에 들어가서 자. 이러다 또 감기 걸려."
"그냥 청소 다 하고 잠시 누웠는데 그대로 잤나 봐."
내가 방송을 하고 있는 동안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바닥 걸레질을 했던 듯, 돌돌 말린 걸레 하나가 주변에 방치돼 있다.
이 녀석 그다지 깔끔 떠는 성격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에게 맞춰주기 위해서 너무 노력하는 게 아닌가 내심 걱정이 된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TV보면서 설렁설렁 했어. 괜찮아."
본인이 괜찮다는데 말릴 이유가 뭐 있겠냐만은.
사실 문제가 되는 쪽은 오히려 나다.
최근 들어 내가 예은을 보는 눈길이 달라진 것 같다.
뭔가 잘해줘야 할 것 같고 앞으로의 관계도 생각을 해야 할 것 같고.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다.
"그럼 같이 TV나 볼까? 요즘 뭐가 재밌더라?"
"난 그냥 음악 프로나 보고 있었는데.. 딴 거 틀까?"
거실의 쇼파 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벽걸이TV가 걸려 있다.
나나 예은이나 많이 볼 일이 없어 구색만 갖춰 놓은 수준으로 게임방의 플스용 TV가 더 클 정도다.
그 벽걸이 TV에서 송출되고 있는 방송은 음악 프로그램.
예은이 청소를 하면서 음악 들을 겸 켜놓았던 듯하다.
'군대에서는 정말 많이 봤는데.. 사회에 오면 관심이 뚝 꺼진단 말이지.'
걸그룹들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저게 뭐라고 군대에서는 사족을 못 썼다.
이등병 때는 선임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부르고.
일병 때는 왜인지 흥에 겨워서 절로 따라하게 되고.
상병 때는 슬슬 걸그룹 이름 외우면서 평가할 시기.
병장쯤 되면 득도를 해서 걸그룹 풀숲위키를 자처하게 된다.
딱히 관심이 없어도 어느 순간 보면 그렇게 돼있다.
걸그룹과 군대가 협약을 맺은 건 아닐까.
콩나물과 함께 하는 국방부 미스테리 중 하나다.
"아냐, 간만에 보니 추억 돋네."
"혹시 저런 거 좋아했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예은이 나를 흘깃 째려봤다는 사실은 모를 수가 없다.
남자들이 아이돌 빠순이들을 싫어하듯 여자도 마찬가지인 모양.
단언컨데 난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다.
"그럼 관심 없어? 쟤네들 엄청 예쁜 거 같은데."
"……."
예은의 말꼬리가 올라가는 게 직감이 왔다.
파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려 들었다.
어떻게 처신을 하냐에 따라 향후 동거 생활의 안락이 결정될지도 모르는 상황.
분명 그럴 거라는 확신이 섰다.
"예쁘긴 예쁜데. 나는 노래만 들어서.."
"그래? 그럼 나랑 비교한다면 어때? 쟤네 풀메이크업에 보톡스 떡.. 아니 성형같은 것도 했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이건 말을 흐려서 빠져나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를 아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예은이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회피라는 선택지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너가 더 이쁘지. 성형같은 거 했다고 해도 본판이 다른데."
"정말? 거짓말 아니지?"
진심으로 기쁜 듯 예은이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최대한 감추려고는 하지만 새어 나오는 미소는 표정관리가 안된다는 반증이다.
여자들이 이쁘다는 말에 민감하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나 보다.
'휴우.. 어떻게 지뢰는 피해낸 건가.'
어째서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오는 건진 몰라도 한숨 내려놓았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됐다는 부분이다.
실제로 예은이 쟤네보다 예쁘니까.
딱히 콩깍지같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예은이 배는 낫다.
"그럼 있잖아.. 하나 더 물어봐도 돼?"
"왜, 왜? 뭐 또 남았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예은이 나를 보며 실실 웃음을 흘려 온다.
이 고문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내가 귀찮아? 그만 물어봐줄까?"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고…."
얘가 오늘 따라 왜 이러나.
내 곤란한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최근에 들어 독기가 빠졌다고는 하지만 본래 성격이 어디 간 건 아니다.
진짜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할 성 싶다.
"장난이야. 나 그렇게 쪼잔하지 않다고?"
"나, 나도 알지 하하하."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라는 상황은 지금을 두고 말하나 보다.
이 지옥이 빨리 끝났으면.
바라는 동시에 내심 싫지만은 않다.
흐르고 있는 공기가 조금은 따뜻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저런 여자가 사귀자고 하면.. 어때? 남자들은 환장하나?
"솔직히.. 말해도 돼?"
예은이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며 나를 똘망똘망 쳐다본다.
이게 참 뭐라 해야 할지.
대리 고백같은 분위기라 긴장된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예은의 유도심문에 딱 걸려버렸다.
"그야 사귀고 싶지. 아무래도 남자들이 여자 얼굴 보고 많이 혹하잖아. 그 이상의 관계는 서로 알아나가면서 결정할 문제겠지만."
"그렇..구나. 그럼 사귀고 보니 성격 나쁘면 엔조이.. 막 그런 거야..?"
혹시 내가 말실수를 심하게 해버린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분 좋아 보이더니 이제는 울상을 짓는다.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빤히 보인다.
눈 근육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이대로 두면 정말로 어느 순간 펑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신경 많이 쓰고 있었구나..'
지금껏 예은이 이렇게 동요한 적이 있었던가.
어느 때나 강인하게만 보이던 녀석이라 어찌 달래줘야 할지 생각이 안 난다.
말로는 차마 설득할 자신이 없어 나는 예은의 머리칼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작은 힘으로 머리를 꾸욱 누르자 울상이던 표정이 잠시나마 펴진다.
"나는 너랑 성격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넌 아니었어?"
"아니. 난 전혀 아닌데?"
이 자식이 진짜.
방금 전까지 울먹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 사라진 예은이 눈을 동그렇게 뜨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사람이 말을 좋게 해줬더니 혈압을 오르는 장난을 쳐왔다.
깊게 고민한 게 아니라면 오히려 다행이긴 하지만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나한테 많이 맞춰줬잖아. 사실 알고는 있었어."
"그야 뭐.. 그랬긴 하지만 옛날 일이고…."
정말로 철이 들려고 하나.
예은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왔다.
지금까지 내 성격에 맞춰줘서 고마웠다.
억지도 많이 부렸는데 잘도 참아줬다 등등.
솔직히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예은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았던 듯하다.
"사실 내가 사람을 잘 못 믿어. 그래서 막 시험해본 감도 있어."
"그렇게 말하니 섭하네. 내가 너랑 몇 년을 알고 지냈다고."
예은이 알고 있는 기간보다 적어도 수년은 더 연이 깊다.
아무리 사이버 세계에서의 이야기라고는 해도 나와 예은은 서로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그만큼이나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현실에서의 예은 성격에 버티지 못했을지 모른다.
이 녀석 오해를 사서 만드는 타입이니까.
"그래서 요즘 잘해주는 거야? 그때 미안해서?"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그걸로 쌤쌤이라 쳐주면 고맙고."
쌤쌤이라 쳐주는 걸로 예은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걸로 됐다.
하지만 사실 따져보자면 그렇지가 않다.
내가 예은에게 잘 맞춰줬다.
물론 그랬긴 하지만 본래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표정이나 말로는 틱틱대도 행동의 방향성은 뚜렷하다.
언제나 일관성이 있어 대하는 내가 오히려 편했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었던 북미에서의 여정에서 변하지 않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이건 조금 과장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다.
"끝났어? 이제 마음이 좀 후련해?"
"아니, 하나만 더."
쪼잔하지 않다며?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아무렇지도 앟게 뒤집어 엎어버렸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으니만큼 기회될 때 묵혀두었던 거 전부 꺼내두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잠시 뜸을 들인 예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지금까지와는 전혀 맥이 다른 이야기였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스프링 시즌 관련해서."
"…."
숨기고 있었던 건 맞지만 이렇게 직구로 던져오니 말문이 턱 막힌다.
다 알고 있는 듯한 눈치니 어설프게 숨기지 않고 토로하는 게 맞겠지.
이번 스프링 시즌에 기획하고 있던 것을 털어 놓으려던 찰나.
예은이 먼저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깊은, 나로서는 희미하게 윤곽만을 잡고 있던 목표였다.
"우승하고 스폰서 구해서 독립할 생각이었잖아. 그치?"
아니 니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
따지고 싶지만 막혀버린 말문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은의 말이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표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확언하는 하기가 뭣하다.
그렇기에 아직 윤곽만 잡고 있었고 만약 이루게 되면 이야기를 꺼내자.
내 안에서는 그렇게 결론이 나있었다.
'알고 있으니 오히려 말하기가 어려운데..'
목표라 함은 대략 이러하다.
삼선 블루에서 용병으로 들어가 우승을 하고, 인터뷰 자리에서 Unknown Error임을 밝힌다.
물론 그 전에 들킬 가능성이 크겠지만 꾹 눌러 담고 있다가 인터뷰 자리에서 털어놓자.
그렇게 되면 필히 화제가 될 테고 스폰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가 맞다.
더욱이 목표 자체가 너무 커서 내 주제를 벗어났다.
그 사정을 다 알고 있다고 하니 쑥스럽고 창피하기까지 하다.
"전혀. 주제 파악 못하는 건 너고."
또박또박 건네오는 예은의 말에 나는 지레짐작해 주눅들었다.
하지만 예은이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충분히 노려도 되는 목표다.
오히려 그보다 크게 잡는 편이 옳다.
마지막 한 마디는 정말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아빠.. 아니 아버지랑 통화했어."
최근에 상당히 잘 지내고 있긴 하지만 예은은 현재 가출 상태다.
당연히 잊지 않았고 언제 어느 때 사건이 터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했다.
그런데 그럴 것도 없이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엄청 화도 났고 걱정도 하셨는데 이제는 괜찮데. 글고 너를 꽤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
"어.., 그거 참 다행인 일이네.. 혹시 막 조사하고 그러신 건.. 아니겠지?"
예은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무언은 긍정이라고 하던가.
방식이야 어찌 됐든 결과가 좋았으니 다행이다.
최근에 정말로 예은과 확! 진도를 나가버릴까 고민을 했던 적도 있는데 새가슴인 성격이 약이 되었다.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밀어주겠대.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아빠..버지가 사리분별 안되는 사람은 아니거든? 너한테 투자 가치가 있다고 느꼈나 봐."
"아, 그쪽이야? 그렇지. 내가 요즘 좀 잘 나가긴 하지?"
또 창피하게시리 지레짐작해버렸다.
확실히 선수로서 내가 꽤 인지도도 있고 아직 선수 수명도 많이 남았고.
구단주 입장에서 투자를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아니 씨이...! 너는 너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단하다니까? 외국에 가서도 잘 적응하고 우승도 두 번이 나하고 그 짧은 시간에 정말…. 아 몰라! 졸라 때리기 전에 알아 들어라? 3, 2, 1.."
"잠깐, 잠깐. 알아 들었으니까 손 내리고 우리 대화로 하자 대화로.."
역시나 본래 성깔이 어디 가지 않았다.
최근 들어 잠시 고분고분 해졌다 해도 예은은 예은.
오랜만의 옛날같은 예은과 얼굴을 마주 보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예은도 마찬가지였던 듯 서로가 빵 터져서 한참을 웃어댔다.
박장대소하며 시간이 흐리길 장장 3분.
웃음이 멎고 나서야 나와 예은은 진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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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확실히 두 번째 히로인은 아닌 것 같아서 달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