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새로운 물결
적어도 며칠은 질질 끌어지거나, 심하면 아예 평생 물고 늘어 지는 건 아닐까.
그렇게도 생각했던 데스 매치는 도슈의 자멸로 인해 어제 하루로 간단히 끝났다.
알아서 자멸을 해준 덕분.
패배자인 도슈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내뺄 생각인지 그대로 접속을 종료했다.
'딱히 기대도 안 했으니 상관은 없지만.'
과연 도슈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걸릴 지도 모르겠다.
만에 하나의 경우에는 입 싹 닦을지도 모를 일이다.
본인이 완강히 거부하며 주위의 타박을 감수하면 강제로 받아낼 도리는 없다.
인터넷 사회라는 게 으레 그렇지 않은가.
'그것보다 지금 당장의 일이 긴장되는데..'
오늘은 약속이 있다.
고작 도슈 어쩌고 하는 일에 투자할 시간따위 아깝다.
어쩌면 내 인생 최대의 고비일지도 모르는 난관.
나는 정말로 말을 고르고 고르지 않으면 안된다.
"어때..?"
3월 중순을 넘어 조금은 따사로워진 햇살.
코트따위 입을 필요 없다는 듯 가디건을 가볍게 걸친 예은이 나에게 물어온다.
미니스커트 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짧은 치마 때문에 괜시리 다리 쪽으로 눈이 가버린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예쁘네."
"예쁜 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조금 더 예뻐졌으려냐?"
잡았던 약속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다.
그냥 간만에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예은과 내가 밖에 나가 노는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님에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흐르는 공기가 살짝 어색하다.
최근에야 나아졌다지만 예전이었다면 십중팔구 이랬다.
'당연히 예쁘지 눈깔 삐었냐?' 혹은 '눈깔 폼으로 달았냐?'
이 녀석 자기 외모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예은은 대답이 조금 시원찮다.
"일단 나갈까? 나가서 뭐.. 영화라도 볼래?"
"나 영화관 안 간지 오래 됐는데.. 좋아 가자!"
싫은 눈치는 아닌 예은이 살짝 틱틱대는 어조로 긍정을 표해온다.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말 한 마디, 한 마디 꺼내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무게추가 하나 얹어진 느낌이랄까..'
최근의 예은은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얼굴이야 원래부터 반반했으니 당연히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성의 관점으로 봤을 때 상당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곤 한단 말이지.. 이 나이에 나도 참 푼수야.'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었을 적에.
그저 잘 대해주기만 했을 때는 오히려 무리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내가 예은과 함께 살면서도 딴 생각 품지 않을 수 있던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의 예은은 정확하게 반반이다.
싹수가 노랬던 예은과 온화한 예은이 섞여있다.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착한 여자가 취향인 남자들이 많지만 나는 이편의 예은이 훨씬 좋다.
'친구에서 애인 사이가 된다면 딱 이런 느낌이겠지.'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그렇기에 오늘의 약속은 의미가 깊다.
진지하게 하나 다짐을 했을 정도다.
나와 예은 사이에 진도라는 걸 한 번 빼보면 어떨까?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밖에 나오자마자 나는 예은을 향해 넌지시 운을 띄웠다.
"날씨가 조금 쌀쌀하네? 손 안 추워?"
"난 장갑 가지고 왔는데~ 키키. 잡고 싶은 거면 솔직하게 말하지?"
예은이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놀려온다.
이편의 예은이 훨씬 좋다, 라고 생각했던 나를 15초 만에 후회시켜 줬다.
요즘 하도 착한 모습만 보다 보니 속에 능구렁이가 세 마리는 들어앉은 녀석이라는 사실을 잠시 까먹고 말았다.
"소원대로 손 잡으니 좋아?"
"..나 놀려 먹으면 재밌냐?"
솔직하게 손 잡고 싶다고 말하자 예은 쪽에서 손을 내밀어 왔고 나는 이를 꾹 잡았다.
조금 굴욕적이지만 그래도 긴가민가 하는 것 보다야 낫다는 생각.
예은의 표정을 보아하니 재밌어하는 수준을 넘어 행복해 보일 정도였다.
나를 놀려 먹는 게 어지간히 만족스러우신 모양이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처럼 사골을 우려먹진 않는다.
적당히 놀리다가 적당한 때 끊는다.
놀림을 받는 입장에서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다.
지금은 잡고 있는 예은의 손이 더 신경 쓰인다.
'이제 와서 참 새삼스럽단 말이야.'
내가 손잡는 것 정도로 설레일 나이는 아니라는 건 둘째 치고.
예은과 손을 잡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친구 사이에 손 좀 잡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때만 해도 간간히 손잡고 팔을 빙빙 휘두르며 다녔다.
그때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이런 생각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부드럽네..'
여자 손이라는 사실을 의식을 하고 나니 새삼 부끄러워진다.
살결이 맞닿는 감촉이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다한증따위 있었던 적 없는데 땀이 나는 것만 같다.
이렇게 의식하고 있는 내가 혹시 바보인 걸까.
그렇지 않다.
예은도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실제로 조금 전부터 마주 잡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고 있다.
내 손바닥을 손 끝으로 간질간질 해댄다.
아니, 간지럽히는 정도를 넘어 쿡쿡 찔러온다.
"야, 손톱 아파!"
"히히 아프라고 한 거거든?"
간만에 나 놀리는 거에 재미를 많이 들리셨는지 아주 좋아서 죽을라고 하신다.
손톱으로 내 손바닥을 자꾸자꾸 긁고 있다.
무언가 글씨라도 쓰는 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와 예은은 이런 느낌인 게 맞겠지.'
막 어떻게 해보려고 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같이 있다 보면 언젠가.
상당히 안이한 생각인 것도 맞지만 나와 예은은 이게 옳은 방식인 것 같다.
하지만 예은도 딱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니 가끔씩은 조금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
.
.
* * *
LCF가 끝나고 상당히 떠들썩 했던 북미와 유럽.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차츰 식어 서서히 이성을 찾아가고 있다.
미쳐 날뛰고 있던 Unknown Error의 충들도 자제를 하려 하는 눈치다.
이 자체는 정말이지 환영해야 할 부분이다.
그도 그럴 게 Unknown Error충들 때문에 솔로랭크 유저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던가?
얼마 전만 해도 솔로랭크는 좀비 바이러스에 침식되는 아포칼립스 세계였다.
Unknown Error의 충들이 일반 유저들은 감염시킨다.
그리고 감염된 유저들은 또다시 다른 유저들에게 Unknown Error라는 바이러스를 옮긴다.
미드 발렐리아, 탑콩머스, 정글 빵테온 등 되도 않는 픽들을 꺼내며 솔로랭크라는 생태계를 파괴했다.
이러한 악순환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은 반만 맞았다.
─솔로랭크 개판된 지도 어언 한 달인가..
사람들이 슬슬 정신 차려서 다행이다.
진짜 트롤만 안 만나도 다행이었는데.. 역시 게임은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지.
Unknown Error 하나 때문에 솔로랭크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냐.
└이미 침식된 게시글입니다.
└트롤이 없어졌다기 보다는 사람들 숙련도가 올라간 게 아닐까?
└REAL! 되도 않는 챔프들은 장인 이외에는 안 할라고 하는 추세잖아.
시간이 해결해준 부분도 있었지만 유저들의 적응력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에러충들과의 무려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Unknown Error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챔피언들 중에 자리를 잡게 된 건 극히 일부.
여기에 대해서 현재 래딧은 토론이 한창이다.
안 좋은 쪽으로 여론이 치우쳐진 챔프들의 예를 들어 볼까.
정글 우콩은 고작 정글몹 잡다가 체력 다 깎여서 갱킹도 못 간다.
미드 랄라는 누킹이 안돼서 팀 의존도가 너무 크다.
패배라는 이름의 수많은 시체를 딛고 되는 챔피언과 안되는 챔피언이 차차 구별되어가고 중이다.
─난 솔직히 어떤 챔프던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거든?
근데 에러갓 따라하는 사람들은 너무 게임 레파토리를 정하고 해.
빵테온으로 맨날 솔용 하고, 콩머스로 의병대 올리려고만 하고.
그 짓만 반복하면 누가 당해주겠냐;
└요즘은 아무도 안 당해주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해줬지만.
└딱 그런 애들이 충들이야. 에러갓이 의외성을 노리기 위해 준비해온 전략들을 솔로랭크에서 똑같이 반복하면 계속해서 당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난 적 정글 빵테면 무조건 용에 와드 박음 LOLOL 솔용할 때 몰래 다가가서 뒷통수 치면 1+1~
꿀챔과 의외성을 노리는 픽은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르다.
후자는 활용법이 파악된 이후로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솔용으로 인한 글로벌 골드 스노우볼을 굴려야 하는 빵테온의 솔용이 마크를 당한다면?
무난하게 의병대까지 아이템을 올려야 하는 콩머스가 초반에 집중 견제를 당한다면?
장점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 챔피언이 본래 쓰이지 않았던 이유인 단점들이 더욱 부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매장된 챔피언들 또한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개중에는 역으로 쓸수록 좋아지는 챔피언들도 존재했다.
─자드는 에러갓이나 미역슨같은 극 피지컬 유저들만 쓰는 건 줄 알았는데.
연습하다 보니까 의외로 손에 익더라?
에러충이라는 소리 엄청 들어서 맨날 올차단하고 게임했는데 이제는 아님.
요즘은 에러갓급이라고 칭찬도 많이 들음 LOLOLOL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내 자드 수준급임.
자드 꽤 꿀챔같으니까 너희들도 연습 해봐라.
└아, 제발…….
글쓴이-?? 진짜 잘한다니까 왜 그래.
└그래서 님 자드 전적이..?
글쓴이-40승 32패. 이거 20패는 초반에 한 거임
└진짜? 인증 가능?
└노오력인가..! 그런데 자드 꿀챔설이라..
└요즘 자드 유저들 중에 간간히 사람 노릇하는 애들 있긴 해. 글쓴이 말대로 트롤 짓도 많이 하면 경험치가 쌓이나 봐.
지난 NA롤챔스 윈터시즌 이후로 자드의 픽밴률은 잠깐 올랐다.
그러다가 금은 장식 머리띠라는 카운터를 제대로 맞고 수직 하락.
그랬던 자드가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플레이어의 숙련도만 받혀준다면 굳이 궁극기에 의존할 필요 없이 적들을 썰고 다닐 수 있더라.
표본이 없으면 모를까 있다.
Unknown Error, 그리고 미역슨이 자드 유저들의 등대가 되어주었다.
물론 멸시받았다.
솔로랭크에서 자드를 픽하면 되도 않는 피지컬 챔프하지 말고 주제에 맞는 챔프를 하라고.
팀원들의 성화에도 자드 유저들은 굴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터넷 상이니까!
꼬우면 닷지하던가!
하나 다행이었던 점은 Unknown Error의 충들이 하도 많아 자드충 정도야 오히려 양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근 한 달에 걸쳐 연습한 보람이 있었을까.
솔로랭크에서는 슬슬 자칭 자드 장인들이 나오는 추세다.
실제로 그들의 플레이는 꽤나 그럴 듯해서 자드라는 챔피언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프로게이머가 아닌 일반 유저들도 자드를 쓸 수 있다!
희망을 불어 넣어줬다.
─말카림 너프된 거 너무 아쉽다.
난 정글 말카림 유저인데 에러충들 때문에 너프당한 느낌이야.
Q마나소모때문에 정글을 못 돌겠어 진짜..
정글 말카림은 접어야 할까봐.
└그거 패치내용 잘 봐바. 정글, 탑 둘 다 겨냥해서 너프먹인 거야.
└정글도 좋고, 탑도 좋지. 그냥 말카림 자체가 좋았어 솔직히.
└에러갓 때문에 너프당한 챔피언들이 대체 몇 개야..
모난 돌은 정 맞는다고 하던가.
Unknown Error가 선보인 이후로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된 많은 챔피언들이 너프를 당했다.
아니, 너프 말고는 다른 해결방안이 정녕 없냐?
게임사를 향해 불만이 쏟아져 나오긴 했지만 이는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현재 로드 오브 로드 게임사의 입장도 고려를 해줘야 한다.
Unknown Error 하나 때문에 밸런스가 급변해버렸다.
게임사로서도 솔직히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패치를 해야 할까.
감도 안 잡히니 그냥 일단 너프를 시켜버릴 수밖에.
원래부터 상당히 너프하는 쪽으로만 패치방향을 잡던 게임사이긴 했지만 이번 경우에 한해서는 면죄부가 붙을 만했다.
─이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인 에러갓은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하도 개판이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에러갓이 잠잠해.
공식적으로 뭔가 벌인 적 없지?
예전처럼 토이치 방송도 안 하고.
└재충전 시간 좀 가지려는 거 아닐까? 에러갓 에러갓 해도 일단 사람이니 조금 쉬어줘야지.
└에러갓은 사람이 아니다 G-O-D! 신성 모독하지 마라.
└크으~! 에러뽕 한 사발 제대로 들이켰네. 하지만 인정하는 부분이다.
Unknown Error라는 천재지변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북미와 유럽의 솔로랭크.
하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은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에러충들에 의한 트롤 테러 이후로 솔로랭크의 수준은 이전보다 한 단계 이상 높아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좋은 의미든, 안 좋은 의미든 Unknown Error는 북미와 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제는 그가 없는 로드 오브 로드는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다.
북미와 유럽의 팬들은 목을 빼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
설사 숨어버린다고 한들 팬들의 눈은 피할 수 없다.
그 단언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Unknown Error의 신도들은 한둘이 아니다.
믿음의 깊이 또한 도를 지나쳤다.
만약 그가 살금살금 기밀 행동을 한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