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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물결
긴 막대기 모양의 물체가 예은의 안을 푹푹 쑤시고, 나오고를 반복한다.
그러자 안에서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일어난다.
나는 예은을 바라보며 의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이건 아니잖아 진짜."
정말로 실망이다.
이래봬도 난 예은에게 정말로 지킬 건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치다니.
사람이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너도 내가 스커트 입으면 다리 쪽으로 눈 돌아가는 주제에 뭔 소리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제 데이트 비스무리한 것은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는 정말 훈훈하고 기분 좋았다.
밤에 잘 때는 살짝 행복감에 젖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기엔 뒤끝이 조금 시큼털털하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던 도중 문득 떠올랐다.
이 녀석 카페에서 분명히 나한테 못할 말을 했다.
"근데.. 진짜로 본 건 아니지?"
"짜샤, 같이 살면서 안 보기도 힘들겠다. 꼬우면 간수를 잘 하던가."
내가 세면하고 있는 화장실에 예은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는 걸 보고 나서야 떠올랐다.
깨작깨작 칫솔질을 하는 예은이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어제는 정말 정신이 없어서 따지지를 못했는데 사람이 옷 벗은 걸 왜 몰래 보고 그러냐.
그것도 내가 하면 했지 왜 네가 하고 난리야.
요즘은 여자들이 더 무섭다더니 틀린 말 하나 없다.
"어차피 쓸 일도 없으면서 쪼잔하게."
"있거든? 니가 봤어? 어?!"
어째서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내가 왜 참아야 하는 걸까.
정말로 아버님만 아니었어도 확! 되돌려주는 건데.
뒷배라는 게 참 무섭긴 무섭다.
"얌마."
"어쭈?"
엉덩이로 툭 밀치며 소심한 복수를 하자 예은이 한술 더 떠온다.
양치질을 하던 칫솔의 끝으로 내 옆구리를 푸욱 찌른다.
어찌나 세게 찔렀는지 순간 숨이 멈췄다.
이 녀석과 딜교환을 하기엔 내가 초반 라인전을 너무 못한 감이 있다.
'그래도 버티기는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하는데.'
미국에서도 종종 가뭄에 콩 나듯 치장을 하고 치마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내가 예은과 잘해봐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고 성깔때문에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미인한테 잘도 딴 생각 품지 않았구나.
나도 참 신기할 정도로 잘 버텼다.
그만큼 사람 성격이라는 게 호감에 영향을 미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또 고심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어제 일로 예은의 외모에 대해 명확하게 알았다.
당연히 알고 있었고, 잊었던 적도 없지만 실감을 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마치 탑에서 솔킬 다섯 번 날 때까지는 팀원들에게 '멘탈 붙잡고 한타 하죠.' 이러던 원딜이.
정작 한타 가서는 '리픈 누가 키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어제 예은을 밖에서 데리고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로 간수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막 이 녀석을 쳐다보는 걸 알게 되니 나도 모르게 질투심이 인다.
방금 예은이 간수 잘하라고 한 건 내 아랫도리에 달린 물건이지만, 어쨌든 이쪽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뭘 봐, 짜샤."
예은이 칫솔을 질겅질겅 깨물며 엉덩이로 나를 툭 밀친다.
힘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탄력 때문에 순간 휘청했다.
아무래도 아까 거는 이자고 원금은 따로 되돌려주는 모양.
거울로 반사돼서 보이는 예은은 나를 찌릿하게 째려보고 있다.
언뜻 보면 예전의 예은같은 언행이지만 자세히 보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눈빛에 부정적인 감정은 실려있지 않다.
오히려 장난기가 가득하다.
내가 어떻게든 해줬으면 하는 눈치다.
"얼굴 다 씻고 진짜 혼날 줄 알아라."
"우쭈쭈. 난 그전에 나갈 거지롱."
나를 또다시 엉덩이로 툭 밀어낸 예은이 양치질했던 거품을 세면대에 뱉는다.
그 탓에 가까이서 보게 된 예은의 하얀 치아가 잠시간 나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뺨이 아슬아슬 맞닿는 거리.
고개를 살짝 돌려 장난스럽게 웃은 예은이 그대로 쿨하게 수도꼭지에 입을 대어 물을 머금었다.
그렇게 보글보글 입 안을 헹궈내는 예은을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쳐다보게 됐다.
이곳저곳 신경써서 화장을 했던 어제도 정말 가슴이 쿵 내려앉았지만 안 한 예은도 매력적이다.
화장 같은 거 안 해도 충분히 오밀조밀 아름답게 생긴 얼굴이다.
근접해서 가까이서 보니 더욱 더 절실하게 깨닫는다.
"푸우! 난 그럼 먼저 간다. 멍충아?"
"진짜 더럽게시리.."
예은이 입 안을 헹궜던 물을 나에게 푸우! 내뱉고 도망갔다.
이제 막 세면이 끝난 참인데 잠깐 짜증이 솟아난다.
최근 들어 예은의 장난기가 정말이지 부쩍 늘었다.
'뭐, 싫은 장난은 아니니 됐지만.'
다시 세안을 하며 이 빚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싫지 않다.
너무 오래 자취를 해버린 탓에 잊고 살았지만 가족이란 이런 분위기였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예은에게서 느껴버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예은과의 동거는 날이 갈수록 행복감이 깊어지고 있다.
.
.
.
* * *
세안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예은을 확 덮쳐서 혼꾸멍을 내줬다.
구체적으로는 보고 있던 TV드라마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채널을 돌리고.
간식인 딸기에서 예쁘게 생긴 것만 골라 먹어줬다.
어쨌든 이 딸기라는 게 아무리 맛있어도 생김새가 묘하면 이상하게 먹기 싫어진다.
그리고 예은은 그 점을 상당히 신경 쓴다.
필히 엄청난 심적 고통을 받았으리라.
나는 예은에게 등짝 스매쉬를 맞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괴롭혀줬다.
'결국 냉장고에서 새로 가져다 줘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다시는 내 저력을 얕보지 못하겠지!'
3월에 들어 제철이 된 딸기는 집안에 한가득 있다.
그냥 먹을 때도 많지만 빵에도 많이 들어가고 가끔은 예은이 괴랄한 요리를 해주기도 한다.
딸기 샐러드 라던지, 딸기 튀김이라던지.
나보고 누렁이라 하는 주제에 요즘은 이 녀석이 더하다
어쨌든 남게 된 못난이 딸기들은 내가 꾸역꾸역 다 먹어야 했다.
진짜 배불렀는데.
안 먹으면 이 딸기랑 같이 잼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늘상 있는 아침 일과를 끝나고 나는 방에 들어갔다.
물론 방송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나는 예은의 손바닥 자국이 빨갛게 남은 등을 매만지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곧 외출을 할 시간.
어제도 예은과 나갔다 왔지만 오늘의 경우는 목적지가 많이 다르다.
'아무래도 방송으로만 보는 것 보단 한 번 가보는 게 이러저러 괜찮을 테니까.'
다시 한 번 예은과 외출하게 된 장소는 서울 마포구, 정확히는 그곳의 상암 E-스포츠 경기장이다.
갤럭시 크래프트부터 이어져 내려온 E-스포츠의 살아있는 유적이라 말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날고 기었던 프로게이머라면 한 번씩은 거쳐가게 되는 장소.
나와도 한 차례 인연이 있다.
'진짜 프로게이머로서 출전한 건 아니었지만.'
로드 오브 로드 챌린저스 리그, 서머 시즌의 LCL 당시 결승전을 치렀다.
원래라면 오프라인으로 치러지는 LCL이지만 이러저러 사정이 있어 그렇게 됐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프로게이머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꽤나 친해질지도 모르는 장소이니 한 번쯤 관중으로서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늦잖아. 점심 생각하면 두 시까지는 가야 한다고. 몰라?"
준비를 마치고 방문 밖을 나서자 팔짱을 낀 예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가볍게 째려본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딸기를 다 먹어야 했는데.
모르고서 저러는 게 아니라 알고서 저런다는 게 정말로 예은의 못돼 먹은 점이다.
"그런데 점심도 먹게? 방금 아점 먹었잖아?"
"아점이랑 점심은 완전 다른 거지. 그리고 간만에 서울 가는 건데 뭣 좀 먹어야 하지 않겠어?"
최근 들어 다시 나 놀려 먹는데 재미들린 예은의 표정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예기는 온데간데없이 아주 생기발랄하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먹는 것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밝힌다.
"이제 치마는 안 입기로 한 거야? 조금 아쉬운데."
"조금만 아쉽냐? 오늘은 사람 많은 곳 가니까 바지가 나아."
청바지에 셔츠, 바람막이를 간단하게 걸친 옷차림.
그리고 군모를 푹 내려썼다.
경기장 안이야 사람이 북적거려도 실질적으로 시선이 가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있다.
가는 길에도 말썽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실 나로서도 내심 아깝기도 하다.
예쁘장하게 단장한 예은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싫다.
이것도 질투심이 한 종류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참 바보 같다.
나와 예은은 직행 버스를 타고 서울을 향했다.
운전면허 정도야 나도 예은도 둘 다 있지만 장롱 면허.
아직까지 자가용도 구입하지 않았다.
불편이 반복되면 조만간 구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어찌 됐건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어제처럼 팔짱까지는 아니여도 사이 좋게 손을 잡고 서울 마포구에 도착.
예은이 미리 조사해두었다는 맛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상암 E-스포츠 경기장을 향했다.
가는 길은 헷갈리지 않게 택시로.
택시비가 쪼오금 아깝기는 하지만 만원 버스 타는 것보다야 낫다.
목적지에 다다라 택시에서 내리자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 뿐만이 아니라 예은도 느낀 것이 있어 보였다.
"와, 여기 진짜 오랜만이네."
"그러네. 이곳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오는 내내 장난을 친 적은 있어도 기분이 나빠 보인 적은 없었다.
그랬던 예은이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말꼬리가 내려간다.
군모를 내려쓴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안색이 그다지 편한 기색은 아니다.
그 이유는 짐작이 간다.
지난 해에 이곳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다 지난 일이고 오히려 잘 풀렸잖아?"
"히히. 여기서 길 잃었던 멍충이가 생각나서 그랬어. 자, 가자."
예은이 억지로 밝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이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일도 있었다.
난생 처음 팬들과의 조우.
지나친 인파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을 때 예은이 팔을 잡아 당겨줬다.
생각해 보면 꼭 나쁜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재고를 했던 거기도 해.'
우연에 우연이 겹쳐 예은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게 됐을 때.
절대로 예은을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그 정도로 완강한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혹시 다른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책임감이 없었던 거라면 혼란에 휘말린 나를 나를 도와줬을 리 없다.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이 옳았다.
나를 구해준 이후에 '내가 너 혹시 리뮤아니냐?', 그렇게 물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더더욱이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예은과 리뮤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예은은 그런 위험부담을 짊어지고도 행했다.
알아보지 못하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의미모를 사과까지 했다.
일련의 사건은 혹시 예은이 본의 아니게 결승전을 불참하게 된 건 아닌지.
한 번쯤 심사숙고할 여지를 주었다.
사정이 있었다고 용서를 할 만큼 가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솔직히 내가 믿고 있던 사람이 이유없이 그런 판단을 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잘 풀려서 지금 이 자리에 있지만 정말 단추 하나만 잘못 틀어졌어도 영연 끊어졌을지 모르는 인연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야. 너무 꽉 쥐면 손 아파. 근데.. 뭐 봐?"
"아니, 잠깐만.. 저 사람 혹시 어디서 본 적 없어?"
나는 이곳 상암 E-스포츠 경기장에 선수로서 온 적이 있다.
프로게이머는 아닐지언정, 결승전 엔트리 당당히 포함된 준프로급의 아마추어였다.
즉, 정식으로 선수 대기실을 이용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반년 가량의 일.
내 기억력이 아무리 좋은 편이 아니라고는 해도 까맣게 잊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다.
'어디서 분명히 본 기억이 있는데..'
대부분의 일반 관람객들은 모를 수밖에 없는 선수 대기실의 위치.
한 남자가 그곳을 향해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손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부여잡고는 있지만 방향만은 틀리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과도한 팬심으로 사전에 조사를 하고 몰래 접근하는 열성팬들이 종종 있다고는 들었다.
그렇기에 경비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고, 일반인이 선수 대기실 가면 반드시 저지된다.
일반인들이 어찌저찌 알아낸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는 장소가 바로 선수 대기실.
그런 선수 대기실을 향해 올곧게 걸어가는 남자는 어디선가 한 번 본적이 있다.
정면이 아니라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앞으로 조금이다.
나는 예은의 손을 잠시 놓고서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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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조만간 3연참 한 번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