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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받는 서포터
오직 이기기 위한 게임.
선수 개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쪽으로 많이 기운다.
선수의 값어치, 연봉 협상을 할 때 많은 부분을 따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적이니까.
인기가 이러했고, 커뮤니티 반응이 저러했고, 이러저러한 특이한 플레이를 해냈고.
당연히 영향을 미치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인이다.
그리고 꼭 긍정적으로만 평가를 받으리란 보장은 없다.
인기가 있다는 건 그만큼 어깨가 무겁다는 소리다.
커뮤니티 반응이 잦다는 건 팀의 입장에서 괜시리 신경 쓸 게 늘어난다는 의미다.
특이한 챔프폭은 달리 말하면 메타를 적응 못한다, 라고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혹여 그런 선수를 딱딱 원하는 팀이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이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마인드다.
즉, 어떤 것도 전 시즌에 몇 승 몇 패했고, 몇 강까지 갔고 하는 전적만은 못하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라는 말이 있어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
그렇기에 한 판, 한 판의 승리에 목을 매는 전략은 팀에 속한 개개인의 입장에선 이해해줄 만하지만.
'난 진짜 싫은데.'
E-스포츠의 판은 선수 혼자서 만들어갈 수 없다.
팬도 있고, 이를 후원해주는 기업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맞물려서 상호 작용을 한 결과 게임이 하나의 스포츠가 되었다.
그렇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프로게이머는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자신의 기록을 딱딱 끊어서 과시하는 게 본업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과 비슷하지만 다른 한 가지.
연기력이 받혀주지 않는 배우가 인정을 받기 힘든 것처럼 프로게이머에게 있어 실력은 중요하다.
게임 실력이 안된다면 컨셉이 아무리 재밌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보니 치우쳐졌다.
어느 순간 프로게이머들은 단순하게 이기는 게임만 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한국 E-스포츠의 성장이 멈춰버린 이유가 본질적인 아닐까.'
정말 흔히 있는 나 혼자 쯤이야의 논리다.
여러 사람 같이 먹는 부대찌개에서 자기 혼자 스팸만 쏙쏙 골라 빼먹는다.
나도 햄 먹고 싶었는데, 일부러 아껴둔 건데.
어느 순간 보니 부대찌개가 아니라 김치찌개 되어 있더라.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제 목 조르기라는 것을 몰랐던 거지..'
그렇게 얌체짓을 해서 차곡차곡 모은 승리.
그 따위 승리도 값어치를 갖는 까닭은 E-스포츠가 흥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행하고 있지 않다면 짐바브웨 달러, 휴지 조각과도 다를 바가 없다.
미래를 팔아 현재를 얻는 멍청한 행위.
가짜에어 독수리에게 심판을 박아 넣는다.
<어떤 고문을 선사해줄까?>
나는 이미 삼선 블루의 서포터로서 선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세트의 밴픽은 현재 진행형이다.
픽할 차례가 되자마자 선택한 챔피언은 쓰렉귀.
출시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따끈따끈하지 않은 신규 챔피언이다.
"조금 불안한데.. 안정적인 픽 가져가는 게 어때요? 하다 못해 풀츠라던지? 그랩 잘하시던데."
나와 봇듀오를 서게될 삼선 블루의 원딜러 헬멧 선수.
그가 내 챔피언 선택을 보자 난색을 표해왔다.
대회 무대에서 조합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가져가고, 가끔 선수의 흥미에 따라 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가 느끼기에 쓰렉귀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픽이었는 듯했다.
"그거 유틸성도 부족하고 그랩도 애매해서 제가 호응하기가 힘들어요."
"아하.., 그런가요?"
헬멧 선수가 말하는 평이 현재 쓰렉귀가 가진 선입견이다.
이는 절대로 헬멧 선수의 눈이 낮기 때문이 아니다.
나온 지가 꽤 됐음에도 쓰이지 않았다는 말은 그만큼 안 좋다는 뜻이니까.
신규 챔피언이라고 무조건 사기일 리 있겠는가.
올해만 해도 바위라던지, 여왕이라던지 꽤나 여러 챔피언들이 나왔지만 결국 안 쓰였다.
쓰렉귀도 마찬가지다.
올해에 나온 신규 챔피언들은 흉작이라는 소리가, 그리고 게임사가 눈치를 본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하긴, 지난 해의 신챔프들이 그렇게나 사기였으니 솔직히 눈치 좀 봐야겠지.'
자드도 그렇고, 카지트도 그렇고, 거미여왕도 그렇고.
그 외에도 상당 수의 신규 챔피언들이 스펙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가 나왔다.
개중 반 이상이 칼질에 쓱싹! 당했음에도 살아남은 챔피언이 적지 않다.
게임 밸런스팀에서 제작팀에게 신규 챔피언들 작작 OP로 만들라고 눈치 좀 준 모양.
이러한 연유로 쓰렉귀는 따끈따끈하지 않은 신규 챔피언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한 마디로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현재의 쓰렉귀는 풀리츠크랭크 하위 호환이라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어.'
그랩을 위주로 생각한다면 두 챔피언의 스킬 구조는 비슷하다.
그런데 풀리츠크랭커는 자신의 위치까지 확실히 당겨오고, 쓰렉귀는 당기다가 마니 영 아니올시다.
결정적으로 풀츠의 그랩은 모션이 깔끔하기까지 하다.
낫을 두 번이나 휘휘 돌린 다음에 날리는 쓰렉귀의 그랩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건 필연이었다.
"내가 쓰렉귀를 많이 준비해와서 그런데.. 한 번 해보죠? 이 챔피언이랑 아예 안 서본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그런데…. 아시겠지만 저희 이번 판 지면 그냥 끝나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듣기는 들었을 거다.
적어도 특이한 챔피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정도는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어지간한 상황도 아니고 3판 2선승제의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린 대위기다.
탐탁찮은 헬멧 선수의 마음 이해해주지 못할 건 아니여도 난감하다.
뭐라 설명해야 납득을 할지 골치가 조금 아프다.
"내가 책임질 테니 강행하자. 코치님도 한 번만 믿어주세요."
삼선 블루의 에이스이자 주장, 씨지맥이 내 골치 아픔을 덜어줬다.
그에 대한 팀원들의 믿음은 굳건하다.
찜찜함을 다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쓰렉귀의 픽은 일단 수긍받았다.
'감독이 무어라 한 소리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감독의 질책조차 무마할 정도로 씨지맥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만큼 실패시 책임을 질 부분도 적지 않다는 소리.
이번 게임은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이겨야 한다.
'서폿 캐리, 그 첫 번째 시발점이다.'
마우스를 딸칵! 클릭해서 픽을 박아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 아니, 강행 뿐이다.
쓰렉귀로 거하게 한 건 일으켜 준다.
"와, 진동 좀 봐. 특이한 픽했다고 말이 많나 본데?"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나는 맥형 말대로 믿어보련다."
씨지맥과 헬멧 이외의 선수들 쓰렉귀의 픽에 대해 이야기가 오간다.
진동이라 함은 부스 안으로 전해지는 떨림.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방음을 자랑하는 데다 선수들은 헤드폰도 쓰고 있어 바깥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없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음파가 만드는 진동 정도는 느껴진다.
'한국은 이런 면에서 꽤나 고지식하단 말이지.'
내가 알고 있던 미래에서 해외 리그가 북미잼, 북미잼 하면서 무시 받았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선수들이 기존의 고정 관념을 무시하고 독특한 픽과 플레이를 주저 없이 시도했다.
솔랭에서 인기 있는 픽조차 실패할까 두려워서 잘 안 쓰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북미잼이니 뭐니 해도 선수들이 팬들의 재미를 신경 써 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아했다.
실력 이전에, 선수로서의 마인드가 정말로 존경스러웠다.
그렇기에 나는 CLC의 입단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더 이상 안돼.'
삭초제근, 뿌리를 뽑아 놓는다.
노잼 메타를 알려버리는 가짜에어 독수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사신.
서폿계 유일의 캐리머신이 될 쓰렉귀가 첫 번째 출범을 알렸다.
.
.
.
* * *
정말로 탄식을 금치 아니할 수가 없다.
삼선 블루에 식스맨으로 들어간 올마스터.
그의 경기를 기대했던 팬들은 정말로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팬들만이었다면 오프게임넷 측에서 당황했을 리 있겠는가.
오프게임넷에서는 올마스터를 띄워주기 위해서 상당한 노고를 들였다.
그야말로 준비된 스타.
윈터 시즌이 씨지맥이었다면 이번 스프링 시즌은 올마스터가 되지 않을까?
두 명의 선수가 같은 팀 소속이 된 만큼 그에 대한 기대감은 남달랐다.
늘 같은 전략, 재활용되는 챔피언, 비슷한 게임 구도.
조금씩 다를 뿐 Crtl+c, Crtl+v와도 다를 바 없던 한국의 롤판에 색다른 해법을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이는, 그리고 준비했던 이는 김은준 해설이었다.
단순하게 아마추어 때 조금 날고 기었다.
그 정도라면 주목할 가치가 떨어졌겠지만 올마스터는 문어발이 상당했다.
특히 게임 내 지식이 수준급이라는 사실을 해설을 통해 보여줬다.
아무래도 중계진도 해설을 맡고 있는 만큼 그 차이가 가시적으로 와닿는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자신감 넘쳤던 올마스터의 방송 멘트.
자신이라면 저 다람쥐 쳇바퀴같은 게임 구도를 일탈 시킬 수 있다.
프로 데뷔가 확정된 상황에서 그런 호기 넘치는 발언을 할 수 있다니.
김은준 해설이 올마스터에게 특별함을 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올마스터 선수가 주포지션으로 알려진 미드가 아닌 서포터로 출전을 했네요. 삼선 블루의 용병직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고, 대회 적응 기간을 길게 가지려는 모양입니다..>
김은준 해설의 목소리에서 상실감이 숨겨지지 않았다.
쏟았던 노고가 물거품이 된 것 그렇다 치고 올마스터 본인에 대한 극도의 실망이다.
다른 포지션도 아니고 서포터.
캐리력이 지극히 떨어지는 포지션인 서포터로는 당연히 그가 호언장담했던 일탈이 가능할 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그의 특색.
LCL에서 보여준 다양한 픽이라던지, 2주만에 세기말 솔로랭크 2위를 달성했던 압도적이면서 안정적인 실력이라던지.
본연의 색이 묻어날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 상에서 자신감 넘쳤던 태도와는 달리 올마스터는 지극히 평범.
그저 프로가 아니었기에 내비칠 수 있던 허무맹랑한 패기였다.
-이건 그냥 도망간 거지ㅋㅋ
-아마추어 최강자로 남는 게 날 걸 그랬다..
-왜 괜히 롤챔스 나가서 이미지만 깎냐~
-서포터로 무난하게 1인분 하다 지는 분위기네.
-이럴려고 서폿 연습한 거야? 복선이었어??
시청자들 또한 김은준 해설 못지 않게 실망감이 컸다.
현재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로드 오브 로드판이 전세대 E-스포츠인 갤럭시 크래프트를 따라잡을 계기가 되는 선수일지도.
가졌던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과 비판도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배신에 가까운 행위다.
서폿이라는 포지션으로 도망가서 자신의 안위를 꿈꾸다니.
아마추어 시절, 그리고 BJ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다.
파프리카TV 등의 채팅창들은 물론이고 잉벤을 포함한 커뮤니티에서도 여론이 곱지 않았다.
<삼선 블루에서 봇라인이 비교적 취약한 건 맞습니다만. 서포터로 가는 것보다는 본래 잘하던 미드, 혹은 정글을 해서 씨지맥 선수와 아마추어 시절의 호응을 노리는 편이 승산이 조금 더 높지 않았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아무리 파투가 났다고 해도 준비해온 자료가 어디 가진 않았다.
김은준 해설은 올마스터에 대해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주포지션이 미드 혹은 정글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솔로랭크에서 서포터의 승률이 비교적 저조하다는 사실까지.
그렇기에 더욱 서포터라는 포지션 선택에 불만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는 짓은 더욱 더 가관.
첫 출전에서 무언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 챔피언은 아니된다.
<신규 챔피언을 잘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올마스터 선수의 아마추어 시절 컨셉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아니죠. 조금 까놓고 말해서 저 스마일 선수가 그랩을 맞아주는 모습이 상상되지가 않거든요..?>
올마스터가 픽한 챔피언은 쓰렉귀였다.
여러 챔피언을 잘 다루는 자신의 특색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지만 최악의 선택.
안타깝게도 가짜에어 독수리의 원딜러 스마일 선수는 극한의 피지컬을 타고났다.
스마일 선수를 마크하기 위해서는 필히 타겟팅 CC기를 가진 서포터를 꺼내야만 했다.
풀리츠크랭커 앞에서도 대놓고 무빙을 틀며 농락할 정도인데 고작해야 쓰렉귀의 그랩으로?
모션도 큰 데다 모든 스킬이 논타겟인 쓰렉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고 관짝까지 박아버린 셈이다.
더 볼 것도 없는 게임.
올마스터가 자신의 해설 방송으로 그토록 말했던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건 그냥 게임 끝났어. 여기서 더 안 봐도 돼.'
그리고 밥먹으러 가면 된다.
실제로 현재 시청자의 수는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
중계진 중에서도 가장 열혈로 손꼽히는 김은준 해설도 맥아리가 없어 보인다.
이 경기, 기대할 가치가 남아있기나 할까.
99%의 불신과 남아있는 1%의 기대치.
그나마도 올마스터가 아니었다면 마지막 한 줌의 불씨조차 남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 한 편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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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