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
천대받는 서포터
8강의 경기는 시원스레 종결되었다.
패배로 시작해 연이어 두 번 챙긴 값진 승리.
삼선 블루가 가짜에어 독수리를 꺾고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만큼 보람찼지.'
두 번째 세트와 세 번째 세트.
모두 MVP를 챙김으로서 단독 인터뷰 자리도 보장받았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질문을 던져오는 건 아닐까.
지레짐작도 해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나운서가 물어올 질문은 준비돼 있던 것들 뿐.
첫 출전인데 긴장하지 않았냐느니.
어떻게 그런 특이한 픽을 꺼낼 생각을 했냐느니.
본인이 생각했다기 보다는 대본에 적혀있을 만한 부류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나운서 아가씨가 롤에 대해 잘 알 리가 없다.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해줬지만 끄덕끄덕 고개만 주억일 뿐 알쏭달쏭한 눈치다.
하나 재밌었던 점은 인터뷰 침착하고 재치있게 잘하시네요, 말해왔던 것 정도.
나는 너스레를 떨면서 아나운서 아가씨의 치장과 몸매를 칭찬해줬다.
평소 내 인터뷰 컨셉이 원래 좀 촐싹맞다.
그런데 그것이 예은에게는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오늘 아주 재미 좀 보셨더라? 좋았냐? 좋았냐?"
경기장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예은이 딱 버티고 서있다.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눈초리.
나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한 소리 하신다.
"그냥 방송 멘트지 방송 멘트. 네가 백배는 더 예뻐."
"흐응.., 그 말 슬슬 물리는데."
그래도 싫지는 않은지, 조금은 표정이 풀린 예은이 고개를 휙 돌려 길을 열어준다.
몇 초 전까지 예은이 있었던 바닥을 딛여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땀냄새가 풍겨 온다.
얇고 면적이 적은 복장에서 눈치 챘지만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트레칭이라도 했어?"
"그냥 요가를 좀.."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의 종류는 많지 않다.
운동기구는 딱히 들여논 적 없으니 간단한 스트레칭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러고 보니 요가도 있었다.
여성들이 몸매 관리 차원에서 가장 선호하는 운동이라나 뭐라나.
'운동하고는 담 쌓던 녀석이 웬일이래.'
요가는 이러저러 복잡한 동작을 하는만큼 신축성이 좋은 옷을 입고 해야 한다.
그냥 청바지 같은 거 입었다간 가랑이 사이가 쫘악! 찢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예은이 입고 있는 옷은 몸에 달라붙는 레깅스 운동복.
평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싫어하는 바람에 볼 경우는 자주 없지만 역시 잘 빠졌다.
"..왜 또."
그만 넋 놓고 쳐다보고 말았다.
시선에 꽤나 민감한 편인 예은이 그새 눈치채고 볼을 부풀려온다.
다행스럽게도 딱히 싫은 분위기는 아니다.
그보다 다른 쪽이 신경 쓰이나 보다.
"나 땀 흘렸으니까 거기서 그대로 네 방에 들어가. 알았지?"
현관문을 기준으로 내 방은 들어가자마자 바로 좌측에 있다.
예은이 내 방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건넨다.
상의의 위쪽과 아래쪽의 색이 달라진 것에서 알아봤지만 꽤나 열심히 요가를 하신 듯하다.
아직 환기도 하지 않았는지 집안으로 들어가자 땀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러니까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와서 정말.. 너네 팀은 회식도 안 하냐?"
"하려고 했는데 파투났어. 대신 주말에 만나기로 했지."
게임을 이겼으니 당연히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그놈의 감독.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회식 자리는 물 건너 갔다.
나도 딱히 술자리에서 그 감독 비위 맞춰줄 생각은 없으니 잘된 일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내가 집에 조금 빨리 도착하게 됐다는 사실.
운동을 하던 예은은 집안 정리는 커녕 샤워도 하지 못해 땀에 아주 흠뻑 젖은 상태다.
어쩐지 조금 더 쪼아댈 거라 생각했는데 손가락으로 몇 번 쿡쿡 찌르는 선에서 봐주더라.
나는 피식 웃으며 예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바보야, 가까이 오지 말라고.."
"괜찮아. 괜찮아."
예은의 머리르 쓰다듬으며 다른 쪽 손으로 등을 당겨 살포시 안아준다.
살짝 신경질이 돋아있을 때도 이렇게 머리를 만져주면 금새 풀린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은은했던 땀냄새가 더욱 짙게 풍겨오지만 불쾌감은 없다.
미인의 땀냄새는 향수라더라.
그런 헛소리를 믿을 만한 나이는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예은의 체취는 진실로 매혹적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
실제로 어린 아이들은 땀을 흘려도 그다지 냄새가 나진 않지 않은가.
예은이 딱 그런 느낌이다.
그리고 솔직히 예은의 땀이라고 생각하면 안 좋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도 샤워해야 하는데 같이 할까?"
"죽을래?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살짝쿵 폭 안긴 상태에서 예은이 오른 팔을 휘둘러 내 허리를 퍽퍽 때려댄다.
다른 곳은 몰라도 허리는 남자의 생명인데 보복은 살살 해줬으면 싶다.
크게 힘이 실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일까.
적당한 자극이 척추를 타고 기분 좋게 울린다.
.
.
.
* * *
일련의 이야기가 시작된 건 이틀 전이다.
이틀 전이라 함은 바로 근래의 잉벤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롤챔스 스프링 시즌의 8강.
그 둘째날인 삼선 블루 대 가짜에어 독수리의 경기가 있었던 날이다.
아, 보나마나 겁나 지루하겠네, 하던 시청자들의 예상을 깨고 이게 웬걸?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게 흥해버렸다.
만약 가짜에어 독수리가 선전했다면 그러한 흐름이 절대 나올 수가 없었으리라.
삼선 블루의 새로운 서포터, 올마스터가 서포터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신규 챔피언인 쓰렉귀의 선전.
물론 바로바로 쓰렉귀가 꿀챔으로 퍼진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쓰렉귀가 안 쓰이던 이유 중 하나가 플레이 난이도다.
주목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싶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보여준 올마스터의 몇몇 슈퍼 플레이.
짧막한 몇 개의 동영상으로 나뉘어 잉벤 화젯글의 가장 윗 켠을 자랑스럽게 차지했다.
─8강 1,2조 경기 정말 꿀잼이었는데.
주말까지 어케 기다리냐ㅋㅋ
매일매일 해서 후딱 끝내면 안되나?
기다리다 목 빠지겠네.
└인간적으로 선수들 스케줄도 생각해줘라..
└재밌는 경기가 인스턴트 컵라면처럼 나오겠냐? 빨리 해달라면서 메밀 막국수급 퀄리티 바라지?
└문제의 가짜에어도 독수리도 떨어졌으니 앞으로의 롤챔스는 꿀잼 보장이야! 천천히 기다려.
└한국 사람들의 빨리빨리때문에 잘 진행되는 경기도 용두사미로 끝나는 거야.. 자중해라. 가능하면 그 국뽕 오지는 녀석도.
이틀 전 시작해서 이제서야 구설수에 오르게 된 이야깃거리.
한 잉벤 유저가 주구장창 어그로를 끄는 탓에 강제로 떡밥이 생겨버렸다.
해당 유저가 주장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어처구니만 없는 게 아니라 같은 한국인으로서 낯부끄럽기까지 하다.
글쎄, 올마스터가 CLC의 Error선수 본인 아니냐?
손발이 오그리토그리 말려 올라갈 지경이다.
저런 애들이 꼭 길가다 외국인들 만나면.
Do you know 킴치?
Do you know 강남 스타일?
묻고 다니며 국가 망신 톡톡히 시키더라.
어쨌든 해당 유저가 주장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올마스터가 잠적했던 반년간 무슨 일을 했을까.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분탕종자놈의 추측은..
올마스터가 게임 접었던 사이에 미국에 갔고.
CLC에서 Error라는 선수명으로 활동했고.
NA롤챔스 우승하고.
내친김에 LCF도 우승하고ㅋㅋ
그러고서 한국에 귀환했다, 이 말이지?
크~! 롤드컵 우승을 빼먹어서 아주 섭하셨겠어?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바리 추가요!
└이 정도면 국뽕도 치사량급ㅋㅋ
└소설을 써도 정도껏 써야지. 막장 드라마에서 나올 스토리~
└아니, 시간상 들어맞잖아;; 추측도 못하냐?
└엌ㅋㅋ 국뽕 빌런 본인 등판ㅋㅋㅋㅋ
글쓴이-생각 좀 하고 살아라ㅋ 그게 됐으면 한국 리그가 해외 리그에 아직도 밀리고 있겠냐?
올마스터와 Unknown Error.
그 둘이 같은 사람 아니냐?
말이 나온 건 사실 처음은 아니다.
LCF가 끝난 직후, 한국에 막 입소문을 탔었을 때도 한 번 짚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다.
한국 로드 오브 로드 팬들은 기본적으로 해외 리그에 관심이 없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한국 해설이 제공되지 않는다.
영어 해설 듣다간 멀미가 나버리는 대다수의 한국인들로선 넘을 수 없는 진입 장벽!
그래도 롤드컵 이전에는 해외 리그가 수준 높다고 억지로라도 찾아보는 매니아층이 두터웠다.
바로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뽕 빌런은 지난 LCF 수준이 어땠는지나 알고 어그로 끄는 거임?
니가 롤알못이 아니면 알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그냥 미쳐 돌아갔음.
특히 준결승부터는 넘사였는데 안 봐서 모르지?
너같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도차도 준결승에서 떡이 됨. 팀원 수준이 유럽 최강팀 중 하나인 AOA였는데.
└도차가 한국 프로의 기준은 될 수 없겠지만 Unknown Error한테 영혼까지 털린 건 사실이지. 걍 쨉이 안됨.
└그 Unknown Error가 한국인이면 해결되는 문제 아냐..?
└주모오! 이번 국뽕은 서비스당가?
글쓴이-그냥 아직 한국이 해외한테 비빌 수준이 안된다니까? 물론 언젠가 따라잡겠지만 국뽕도 좀 눈치 봐가면서 해라. 무조건 호응해줄 거라 생각했나.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입롤에 가까운 올스타전 수준이었지.. 북미빠돌이로서 보고 싶은 명경기가 다 나왔어.
1년에 한 번 열리는 올스타전.
세계 각 지역, 예를 들어 한국/북미/유럽 등에서 포지션 별로 가장 인기 있는 선수를 1명씩 선발해 자웅을 겨루는 이벤트전을 뜻한다.
실력이 좋다고 인기가 많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해당 지역의 탑클래스의 선수들로 팀이 구성되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의외로 수준이.. 엄청나게 높진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 간에 호흡이랄 게 거의 안 맞춰져 있으니까.
아무래도 게임단 소속이 다른만큼 당연하다.
자기 팀에서 뼈 빠지게 연습한 선수들이 이벤트전인 올스타전에서조차 쉬지 못한다면 나가고 싶겠는가.
물론 간단한 팀랭크, 스크림 정도는 하겠지만 사실 그마저도 안 하는 경우가 잦다.
애초에 팬들도 이를 기대하진 않는다.
괜히 이벤트전이 아니다.
한 마디로 재밌자고, 웃자고 하는 게임이다.
이기면 좋겠지만 공식전이 아니니 팬들도 승패를 개의치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솔직한 심정으로는 보고 싶다.
날고 기는 선수들이 최대한으로 호흡을 맞춰 대회 수준의 게임을 하는 광경이.
안타깝게도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더라.
두 달 전 LCF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올스타전 그 자체였다.
세계의 모든 팀이 참가한 것도, 진짜로 올스타전도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그러했다.
─지난 LCF는 그냥 입롤급이었어.
팬들이 이 팀은 ~~만 고쳤으면 좋겠다 하는 거 다 고치고 나왔지.
운영 안되던 투르칸에 피지컬, 운영 정상급임 미터스가 와서 큰형님 노릇해주고.
미드 챔프폭이 걸렸던 TSL에서 미드가 바뀌니까 정글러까지 날아다니고.
원래 북미가 유럽에 비해 조금 약세였는데 밸런스 조정 완벽했어.
저기에 불밤이나 마진 공격대 꼈어도 준결승전 가면 잘한 수준이었을 걸? 물론 얼밤이 갔다면 결승전 노려볼 만도 했지만.
└맛밤 냄새 코를 찌르고요..
└글쓴놈 솔직히 말해봐. 얼밤충이지?
글쓴이-그만큼 북미와 유럽의 수준이 높았다는 거임. 걍 까놓고 한국이 아직 안돼.
└글 내용은 좋은데 막줄에 맛밤 냄새 배겨서 추천 안 누름.
그런 날고 기는 북미와 유럽팀들을 모두 제치고 우승해버린 CLC.
CLC의 에이스인 Error선수가 한국인이다?
외모가 다소 비슷하다고 이야기는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한 정도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반마다 비슷하게 생긴 애들 꼭 한 쌍 씩은 있다.
그렇다고 그 둘이 아주 똑같은 것도 아니고, 애초에 느낌이 전혀 다르다.
올마스터가 그냥 대충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동네 청년A의 느낌이라면.
Error선수는 몸도 좋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훈남이다.
실제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도 많은 편.
그 둘을 같은 사람이라 이야기하는 건 비약이 도를 지나쳤다.
─애초에 올마스터랑 Unknown Error는 챔프폭이 상이함.
그리고 롤 잘하는 애들은 알겠지만 피지컬도 많이 다름.
올마스터 솔직히 꿀빨러 느낌나잖아.
Unknown Error는 꿀도 잘 빠는데 피지컬도 좋아.
LCF 결승전 챙겨본 사람은 있으려나?
자드 대 자드 미러전에서 미역슨을 떡바른 피지컬임.
└그러니까 그 반년 사이에 잘해진 걸수도 있잖아..
└국뽕 빌런 개끈질기네.. 학원 안 가니? 숙제 안 해도 돼?
└국뽕아, 엄마다. 엄마는 국뽕이가 잉벤에서 어그로 안 끌고 학원 잘 다닐 거라고 믿어!
└ㅋㅋ잉벤러들 어그로 겁나 잘 끌려주네. 적당히 좀 무시하지.
그럼에도 혹시,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진 않다.
다만, 국뽕 빌런이 하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탓에 나서기가 꺼려진다.
만에 하나 확증이 나온다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이야기를 꺼내지는 몰라도 솔선수범 욕먹을 이유가 굳이 있겠는가.
그렇게 아주 잠깐.
화제도 아니고 소소한 떡밥 정도가 흘러 지나갔다.
어쩌면 크나큰 강이 될 물꼬가 트이게 된 것일지도.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이는 지금 시점에선 많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