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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받는 서포터
8강 마지막 경기가 치러지는 일요일의 오후.
삼선 레드 대 KTX 롤러 코스터 B팀의 첫 번째 세트가 TV화면을 통해 송출되고 있다.
경기의 흐름은 삼선 레드가 무난하게 선취점을 따고 시작하며 유리한 라인전을 진행한다.
아직 승패가 결론지어지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른 시점이지만.
딸칵.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TV의 채널을 돌렸다.
경기 자체도 당장 준결승전에서 만날 팀이 아니거니와 다른 한 가지.
삼선 레드가 이길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딱히 잠시나마 삼선 게임단에 속한 이로서 의리가 적용된 판단은 아니다.
'그럴 만도 하지. 삼선 레드는 스프링 시즌의 우승팀이었으니.'
어디까지나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다.
현재의 흐름은 이곳저곳 많은 구석이 다르다.
이번 스프링 시즌의 대진표만 대충 훑어봐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참가팀이 늘어난 건 그렇다 치고.. 8강의 대진표부터가 바뀌었어.'
본래 열두 팀이여야 할 롤챔스의 참가팀이 열네 팀으로 늘었다.
그리고 8강의 대진표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뭐, 강팀의 수가 늘어난 건 아니니 근본적인 변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얼밤과 SKY T1 K가 다소 이르게 만났다.
본래라면 준결승전에서 떨어져야 했을 얼밤이 8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나비 효과라…. 하지만 내가 한 건 날개짓 정도가 아니지.'
나비가 날갯짓을 하자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일어난다더라.
듣기로는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고는 하던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몇몇 분기점이 갈라지면서 미래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
바뀐 부분은 한두세네 가지가 아니다.
이미 여러군데에서 조짐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아웃섹.
내가 보기에 삼선 레드의 전력은 내가 알던 이상으로 막강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항상 나오던 소리다.
다대기 선수가 아마추어 시절 듀오인 아웃섹을 항상 그리워 한다고.
시즌2 당시에 어떤 사건이 있어 다대기와 아웃섹은 갈라서게 됐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해결이 돼버렸다.
심지어 그 둘이 같은 삼선 레드팀 소속으로 현재 경기를 뛰고 있다.
'과거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영원히 고통받던 아웃섹이.. 뭐, 잘된 일이기는 해.'
로드 오브 로드라는 게임은 참으로 짓궂다.
아무리 탑 급의 기량을 가진 선수라도 시대가 선택해주지 않는다면 도로아미타불.
실제로 씨지맥은 그냥 묻혀버렸다.
프로로 데뷔하지조차 못한 채 재야에서 그대로 퇴물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자신이 가장 혈기왕성했던 시즌3에 제대로 프로 데뷔를 마쳤다.
그러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날뛴다.
아웃섹도 마찬가지다.
한 때의 잘못으로 인해 팀을 탈퇴.
그 이후로 프로 인생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로드 오브 로드는 팀게임이다.
개인이 아무리 잘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그것은 나라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
LCL에서 깨달았고, 그 이후로는 주의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아웃섹은 조금 안일했다.
자신의 기량을 못 받쳐주는 팀원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포지션까지 꼬여서 정글에서 탑으로 라인을 바꿔야 했다.
포지션 변환이 잘된 케이스의 선수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웃섹은 해당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정글을 그렇게나 잘하는 선수가 탑까지 잘한다면 가당키나 할까.
'그래도 중간은 갔지만.'
정글러로서 탑클래스에 꼽히던 선수가 다른 라인으로 중간쯤 해먹고 있다.
팬들도 팬들이지만 본인이 어지간히 답답할 거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정글 자리를 찾기에는 프로판이 너무 좁았다.
이는 아웃섹이 해외를 전전하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해외에서라도 잘되면 좋았을 텐데.
거기서조차 사정은 나아지지를 않더라.
한 마디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다대기와 갈라서게 된 그때의 실수를 분기점으로 인생이 꼬이고 꼬여버렸다.
그러했던 아웃섹.
'지금은 아니지.'
삼선 레드의 일원으로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본래도 우승을 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팀원들.
여기에 아웃섹까지 얹혀졌다.
단순히 강력한 정글러가 한 명 보태진 게 아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오던 다대기와 아웃섹 듀오다.
"뭐야, 롤챔스 안 봐? 난 다른 팀 경기는 딱히 관심없으니 상관없지만.. 왜?"
입이 심심할 거 같다며 간식거리를 가지러 갔던 예은이 쟁반을 내려 놓으며 의아한 듯 물어온다.
보다 보니 마음이 기울어져 채널을 돌리긴 했지만, 사실 할 거 없으면 롤챔스나 보자고 말을 꺼낸 사람이 나다.
뭐라 설명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나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게임이 일방적이더라고. 물론 레드가 이기고 있는 쪽."
"흐응.., 가짜에어 독수리 경기는 잘만 봤으면서. 딱히 상관은 없지만."
예은은 그다지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쟁반에 담겨 있던 스콘 하나를 칼로 서걱서걱 자르기 시작했다.
잘라서 직접 만들었을 딸기잼을 듬뿍 발라 나에게 건넸다.
마치 먹여주는 듯한 모양새다.
"바보,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손가락까지 먹냐?"
당연히 작게 베어 물으려고 했지만 스콘이 조금 작았다.
그 탓에 예은의 손가락까지 조금 입 안에 들어갔다.
그럼 네가 끝부분 잡아서 건네줬으면 됐잖아.
내가 화를 내야 할 상황같긴 하지만 딱히 따지고 싶진 않다.
여느 때와 같은 한가로운 오후가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
.
.
* * *
한국의 게임단이 해외에 비해 연습량이 많다, 그런 평이 있기는 해도 다 사람 사는 세계다.
말도 안되게 선수들을 굴린다면 버티지를 못한다.
밥 시간 있고, 쉴 시간 있고, 휴일도 다 주어지고.
애초에 한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평균적인 근무 시간이 긴 편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엄청난 수준까진 아니다.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조금 의문이 드는 일이었다.
얼밤의 주장, 클끼리는 연습실에 있는 불밤의 팀원들을 쭈욱 둘러봤다.
그들은 지난 8강 이후로 하루에 다섯 시간씩 자며 오직 게임에만 몰두했다.
심지어 오늘 일요일에조차 여느 때와 같은 연습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대회 기간에 연습량이 많아지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긴 해도..'
준결승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모든 팀들의 사정은 다 비슷할 것이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이번 반드시 결승전에 진출, 그리고 우승을 손에 거머쥘 야망을 꾸고 있겠지.
한국 게이머들 중에서도 가장 경력이 긴 편에 속하는 클끼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잠자는 시간을 줄인 건 둘째 치고 밥 먹는 시간, 휴식 시간까지 얄짤이 없다.
같은 게임단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형제팀으로서 불밤 팀원들이 너무 불쌍했다.
결국 참다 못한 클끼리는 불밤의 주장, 빅빠따맨에게 한 소리 하기로 마음먹었다.
"빠따맨아.. 너무 과한 거 아닐까? 최소한의 휴식 시간은 보장해주는 편이 연습 효율 면에서 낫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클끼리도 사실 얼밤의 주장으로서 연습 스케줄은 상당히 깐깐한 편이었다.
팀원들도 가끔 너무한 거 아니냐고 불만을 표할 정도로 빡빡하게 굴려댔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팀원들을 혹사하진 않았다.
얼밤은 지난 2시즌의 롤드컵에서 결승전까지 갔지만 그 때도 최소한의 휴식은 가졌다.
클끼리가 보기에 불밤의 상황은.. 수능을 대비하는 고등학생과도 같았다.
밤낮도, 사생활도 없다.
어찌나 굴렸는지 애들의 낯빛이 새파랗다.
눈 밑에는 다크 써클이 짙게 맺혀 있고 눈동자에는 영혼이 없어 보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빅빠따맨이 팀원들을 억압하는 건 아닌지, 못내 안 좋은 추측까지 떠올랐다.
"형님, 다 애들이 좋아서 하는 겁니다. 제가 딱히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애들 눈초리가 쪼오금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불밤의 정글러인 빅태양맨이 클끼리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비 오는 날 상자 속에 버려진 고양이를 바라본다면 이런 표정이 아닐까?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제발 저희를 구원해주세요!'
이를 반쯤 알아본 클끼리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생각했다.
혹시 애들이 팀분위기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만에 하나 정말 힘든 거라면 입장의 난처함을 무릅쓰고 조금 더 말을 꺼내볼까.
아직 결단을 못 내린 채 불밤 팀원들의 주위를 서성이는 클끼리를 향해 빅빠따맨이 자신감 있게 단언했다.
"정 걸리는 게 있으시면 직접 물어보도록 하죠. 애들아, 혹시 힘든 사람 있니? 다들 대답해봐."
""아닙니다!!""
빅빠따맨의 물음에 나머지 네 명의 불밤 팀원들이 한 입 모아 대답한다.
클끼리는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군대에서 간부가 생활관을 시찰하러 올 때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더라.
그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려던 찰나에 빅빠따맨이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형님, 당연히 다들 힘듭니다. 하지만 다 참고 하는 겁니다. 이번 준결승전을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
전장의 출전을 앞에 두고 비장한 각오로 다짐하는 장군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그런 빅빠따맨의 말에 무언가 느낀 게 있는지 클끼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불밤에게 있어 이번 준결승전은 의미가 남다르다.
지난 윈터 시즌의 우승을 좌절케 했던 삼선 블루.
그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클끼리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팀 내의 분위기는 생각 이상으로 더한 모양이었다.
'맞아. 빠따맨이 조금 진중할 뿐이지 근본은 착한 애니까. 내가 너무 넘겨 짚은 걸 거야.'
본인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두에서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
팀원들을 규합해서 하나로 만든다.
이것이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되는 일인지 얼밤의 주장인 클끼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불밤의 팀원들들 다시 한 번 둘러봤지만 눈동자에서 딱히 이상은 없어 보였다.
빅태양맨의 눈초리가 애처롭게 보였던 건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찜찜함이 전부 털어진 건 아니었지만 클끼리는 그런 데로 납득을 하였다.
동생뻘인 빅빠따맨이 자신과 친하고, 착하니까 묵묵히 들어주는 거지 조금은 선을 넘은 것도 사실이다.
불밤에는 불밤의 방식이 있는 법.
얼밤의 주장인 자신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아무리 얼밤이 불밤보다 먼저 구성된 형뻘되는 팀이고 실제 연배도 높다고는 해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그럼 다들 열심히 하고, 우리 얼밤은 이번 스프링 시즌 공쳤지만 불밤이 우승까지 가 줄 거라 믿어 화이팅!"
삼선 블루에게 패배했던 게 얼마나 분했으면 저렇게까지 노력할까.
우리 얼밤도 이대로 있어선 안되겠다.
클끼리는 불밤의 팀원들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건넨 후 연습실을 나갔다.
이 이상 있었다간 분위기만 해치는 꼴인 데다, 선수들의 열정에 대한 실례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이었다.
"갔지?"
"예, 그렇습니다."
클끼리가 연습실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빅빠따맨이 묻자 팀의 막내인 빅욕망맨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는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서.
"태양맨아, 내가 요즘 너무 잘해줬지?"
"..아닙니다."
빅태양맨은 분명히 입도 벙끗 하지 않았지만 클끼리를 향해 눈치를 보냈었다.
안타깝게도 빅빠따맨은 이를 알아봤다.
하지만 그는 고작 그런 것을 탓할 정도로 마음 씀씀이가 좁지 않은 팀의 주장이었다.
"태양맨아, 알겠지만 내가 한 번은 봐줘. 만약 두 번째가 된다면 나와 담배 한 대 더 피러 가자. 무슨 얘기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네가 우둔하지는 않다고 믿는다."
"예, 알아 들었습니다."
빅빠따맨이 컴퓨터 본체에 기대듯 세워 놓은 야구 방망이의 손잡이 부분을 만지작 거리며 말을 잇자 빅태양맨은 전력으로 수긍했다.
두 살 어린 동생, 빅태양맨이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 하자 빅빠따맨은 웃으며 연습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 것인지.
그날 이후로 불밤 팀원들에게서는 피곤함 대신 씩씩함만이 감돌았다.
클끼리가 걱정스런 이야기를 건네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얼밤 쪽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번 시즌에선 탈락했다고는 하지만 놀지 말고 서머 시즌을 대비해 미리미리 연습을 해놓자.
클끼리를 중심으로 얼밤 팀원들 또한 하나로 뭉쳐 연습에 매진했다.
게임단 자체의 분위기가 열과 성을 띄게 되니 이토록 훈훈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화기애애한 얼밤과 달리 불밤의 팀원들은 다소 과묵해졌다는 것 정도.
복수가 걸린 준결승전의 중압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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