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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가 캐리한다
첫 세트를 패배한 상태에서 게임을 넘겨 받는다.
지난 8강 때와 마찬가지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두 가지 다른 점이 존재한다.
'그때는 분위기가 엄청 암울했지.'
당시에는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나.
답은 커녕 사이즈도 안 나오니 팀원들 한 명, 한 명의 인상이 아주 죽을 상이었다.
더군다나 엎친 데 덮친 격.
기량 불명의 아마추어가 본래 있던 서포터를 대신해 들어온단다.
심지어 자기 멋대로 챔피언을 고르기까지 한다.
일단은 주장이 믿어보라니 게임을 진행했지만 영 꺼림칙했을 거다.
물론 지금은 전혀 다르다.
'실력이 보증되는데 어련할까.'
지난 주말에 있었던 8강 뒤풀이.
그 자리에서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조금 걱정도 했지만 기우였다.
오히려 못 알아봐서 죄송하다.
왜 못 알아봤지? 이런 분위기.
사실 나도 궁금했다.
'솔직히.. 나처럼 얼굴이랑 실력까지 전부 되는 선수가 어딨다고?'
예은이 들으면 양심있냐고 쏘아 붙이겠지만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그러한 연유가 있어 현재 팀원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지 않다.
3전 2선승제가 아니라 5전 3선승제인 만큼 조금 여유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대충 하겠다.. 그런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선수석에 앉아 새로 세팅을 하는데에 잠깐의 시간이 소요됐다.
익숙한 일인지라 길게 시간 끌 필요없이 뚝딱.
두 번째 세트의 밴픽은 시작한 지 오래다.
"쟤네 역시 쓰렉귀 밴하네. 징글 맞은놈들. 말카림도 잘랐어."
"어쩔 수 없지. 지난 8강에서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으니까."
천천히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서포터 챔피언 쓰렉귀.
아직 연구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선수들 사이에서 평가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서포터 매일라이프가 8강 경기에서 꺼내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패배를 했다고는 해도 플레이 자체는 썩 훌륭했으니 이견이 붙을까.
물론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는 거지 절대적인 기준에서 높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현 시점에서 쓰렉귀를 다룰 수 있는 유저는 거의 없으니 당연하다.
그럼에도 상대는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해 밴이라는 선택지를 취해왔다.
그렇게 쓰렉귀가 묶임으로서 나의 챔피언 폭은 조금 제한되었다.
'쓰렉귀 밴이라.. 고작 이 정도 견제라면 학교 슬리퍼 바닥에 낀 모래알갱이 수준밖에 안 될 텐데.'
슬리퍼를 살짝 띄워서 땅을 긁으면 치리릭! 소리 나는 게 거슬려서 학창 시절 유독 신경 써서 뺐던 기억이 있다.
가끔 가다 큰 놈이 깊게 박히면 그렇게 짜증날 수가 없더라!
하지만 거슬리는 거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모래 좀 껴도 복도에서 전력질주 충분히 가능하다.
"올마형 배티 서폿할 거에요? 오늘은 제발 와드 좀.."
"알아, 임마. 타이밍 봐서 사줄게."
나의 픽을 본 명진이가 다소 걱정스러운 듯, 하지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네온다.
뭐, 그렇게까지 안 말해도 당연히 산다.
그때는 가짜에어 독수리라는 팀의 줜략에 맞춰 안 샀던 거지.
내가 원래부터 서포터로 이상한 짓은 적당히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일까..? 혹시 내 배티는 그다지 위협이 안된다고 느낀 걸까?'
밴이 된 건 오직 쓰렉귀 뿐, 준하는 임팩트를 선보였던 배티는 살아있다.
내 과민반응일지도 모르겠다.
한 선수에게 밴카드를 두 개나 소비하는 것이 보통 부담되는 일이겠는가.
평소에 하도 견제 당하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너무 넘겨 짚은 걸거다.
그래도 왜인지 남아있는 찜찜함.
찜찜함의 이유는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불밤에서는 내 배티에 대한 파훼법을 나름대로 찾아낸 모양이었다.
상대팀의 원딜러, 배인이 클린즈를 들었다.
'아, 빅캡틴맨.. 클린즈 반응 속도가 예술이었지.'
현재 시점에서 원딜러들이 선택하는 스펠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아군과 자신을 체력을 소량 회복시켜 주는 힐.
둘은 자신에게만 두터운 보호막을 씌워주는 실드.
마지막은 적팀의 CC기를 풀어내주는 클린즈.
이 세 개중에서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스펠은 실드다.
가장 범용성이 높을 뿐더러, 첫 번째 스펠인 힐이 시즌3에 와서 너프됐다.
클린즈의 경우 잘 쓰면 물론 좋지만 그 잘 쓰기가 겁나 힘들더라.
솔로랭크에서 클린즈를 들면 아군이 기겁할 정도다.
<원딜님.. 클린즈는 천상계에서나 드는 거임….>
스턴 시간 다 끝나가는 와중에 클린즈를 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아군 원딜러!
점멸과 착각해서 쓰는 경우도 왕왕 보이더라.
비슷한 경우를 몇 번쯤 겪다 보면 아군 원딜러의 클린즈 선택만 봐도 소름이 끼치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잘 쓰면 좋다.
한타에서 원딜러에게 가장 장애가 되는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암살자도 분명히 짜증나지만.. 역시 1순위는 CC기다.
특히 점멸 이니시같은 거 한 번 잘못 걸리면 연계 공격에 그대로 순삭.
그런 위기의 순간에 클린즈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된다.
물론, 후반에 가서 금은 장식 머리띠가 나온다면 클린즈를 대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금은 장식 머리띠가 나오는 타이밍은 빨라 봐야 2코어 이후.
그 전에 뽑는다면 심각한 딜로스가 유발된다.
그리고 솔직히 2코어 이후에도 타이밍 잡기 겁나 애매하다.
금은 장식 머리띠의 가격이 싸지도 않을 뿐더러 원딜러는 2코어부터가 진짜니까.
3코어, 4코어 맞춰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해진다.
CC기 거슬린다고 수비적인 아이템을 사기에는 아쉬운 타이밍이다.
'클린즈를 들면 장기적으로 금은 장식 머리띠의 가격을 아낀 셈도 되니 두고두고 이득이긴 해.'
상대팀에서 배티의 대처법에 대해 꽤나 많은 분석을 해온 듯하다.
더욱이 불밤은 가짜에어 독수리와 다르다.
정글러의 갱킹을 항상 유념해서 라인전을 진행해야 한다.
배티의 라인전이 강력하기는 해도 갱킹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단점이다.
'뭐, 생각한 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만.'
땀을 흘려 준비하고 머리 싸매서 노력한다.
하지만 반드시 결과물이 좋게 나오리란 보장이 없다.
배티에게 과연 클린즈가 파훼법이 될지..
안타깝게도 나는 많이 부정적인 입장이다.
─소환자의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해요!
지난 8강 무대에서 배티를 꺼냈을 때, 나는 성우의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W스킬, 인페르노를 찍었었다.
우물에서부터 부지런히 스킬을 사용해 패시브를 축적시키기 위함.
배티는 네 번 스킬을 사용하면 다음 스킬에 1.75초의 스턴이 묻어나간다.
이를 인베에서 적극 활용해 선취점을 야무지게 따냈었다.
'하지만 똑같은 걸 또 당해줄 리는 없겠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라는 말이 있기는 해도 고작 1주일 전의 일이다.
상대팀인 불밤이 설마 대비를 해오지 않았을까.
깜짝 이니시를 대비해서 상당히 사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 경우는 오히려 나가지 않는 게 좋다.
"쟤네 전진 와드 엄청 박는데요? 절대 인베 안 당하려고 그러나 봐요."
"우리는 딱히 인베 갈 생각 없는데 개이득이네. 키키킥."
현재 시즌3에는 장신구 와드가 없다.
서포터가 돈주고 구입해서 박아야 한다.
상대는 그 귀한 와드를 소비해 인베를 철저하게 방어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팀은 갈 생각이 없었으니 소소한 골드 이득을 본 셈이다.
결정적으로.
"올마형.. 근데......... 진짜 와드돌 살 거 맞죠..?"
아군의 인베에 쫄아버린 상대팀의 대응에 웃고 떠드느냐 몰랐다.
내 아이템 칸에 있는 건 두란링.
처음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명진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살 거야. 그냥 시작 아이템만 그래."
"어떻게 잘 풀리긴 했지만.. 형 원래 초반에 서포터가 와드 안 사면 인베가 많이 불안해요."
명진이가 착하긴 한데 조금 많이 소심하다.
사실 과거의 나도 비슷한 스타일이었어서 이해는 하지만 선수로서 반드시 극복해 나가야 하는 문제다.
나의 경우 북미와 유럽에서 겪었던 프로게이머의 경험치.
그 외에도 몇몇 일이 있어 자신감이 대폭 상승했다.
적게는 예은의 섹드립을 스무스하게 넘기는 것에서부터 많게는 게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의 플레이는 한층 더 과감해졌다.
상대가 인베에 수비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미리 예상을 했기에 아싸리 두란링을 구입해왔다.
라인전을 아주 강력하게 가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말이 필요없다.
그리고 혹시 부족할까 하나 더.
나는 1레벨 스킬로 Q를 찍었다.
"헬멧아, 라인전 많이 공격적으로 가보자. 지난번 보다 더욱."
"저번보다 더요? 그거보다 더라니.. 잘 상상이 안 가는데.."
지난 주말의 술자리 이후로 팀 멤버 전원에게 말을 놓게 됐다.
따지고 보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씨지맥 말고는 없더라.
어쨌든 고개를 갸우뚱하는 헬멧의 반응은 그럴 만도 한 일이다.
'내가 그때 조금 많이 몰아붙이긴 했어.'
8강에서 나는 공격적인 라인전의 끝을 보여줬다.
적어도 같이 라인전을 진행한 헬멧의 눈에는 그리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
그 이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1레벨 스킬로 W를 찍은 배티와, Q를 찍은 배티의 라인전 강함은 차원이 다르다.
더군다나 나는 당시 인베에서 스펠을 모두 소비해 킬각까지 노릴 수는 없었다.
스펠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라인전 압박에서 하늘과 땅.
슬슬 시동을 걸 때다.
툭.
리시를 마치고 라인에 도착하자마자 빅캡틴맨의 배인에게 날리는 평타 한 방!
배인의 카운터가 헤이클린이라는 소리는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나는 부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집요하리만큼 툭툭 갈겨댔다.
그러자 상대 쪽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아.. 와드 박혔네. 역시 두란링은 오바였던 것 같아요."
"흐음.. 아쉽게 됐네."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상대 서포터 랄라가 부쉬에 와드를 박아왔다.
8강에서의 경기를 분석해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해온 모양이다.
내 평타 짤짤이의 핵심은 평타를 날리고, 부쉬로 빠져서 미니언 어그로를 빼는 것.
그런데 이렇게 와드가 떡 하니 박혀버리면 미니언들이 반격한다.
미니언이 깡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평타 견제에 지장이 생긴다.
'그러면 평타 견제를 안 하면 되지.'
내가 시작 아이템을 두란링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스킬 견제에 힘을 싣기 위함이다.
애초에 평타 짤짤이에 미련이 있었다면 반지가 아니라 검을 사왔을 거다.
데구르.
챵!
랄라가 와드를 박은 이후로 내 평타 견제가 시원찮아진 것도 사실이다.
자신감을 얻은 배인이 앞구르기를 해왔다.
내가 평타를 던지는 타이밍과 맞물려 구른 후 한 대 치고 빠져나간다.
수준급의 원딜러답게 노련미가 돋보이는 플레이.
나를 클릭했을 때 패시브 스택이 안 보이니 때려도 상관이 없다고 판단했을 터다.
하지만 지난 번과 같은 배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우핫!
배티의 오른손에서 날아간 화염구가 배인의 체력을 한 움큼 뜯어낸다.
만약 논타겟 스킬인 인페르노였다면 타이밍이 애매했겠지만 화염구는 타겟팅 스킬.
미스없이 정확하게 딜교환에서 우위를 선점한다.
이제 시작이다.
지옥같은 라인전이 뭔지 보여준다.
'서포터가 라인전 승패의 7할, 8할을 좌우한다는 소리가 어째서 나올까.. 사실 입감이 잘 안되는 부분이야.'
봇라인전은 정말 묘한 면이 있다.
분명히 라인전은 길면 10분, 20분씩도 하는데 승패는 1, 2렙에 정해진다.
1, 2렙에 딜교환을 실패한 쪽은 정글러가 풀어주기 전까지 계속해서 압박 당해야 할 운명이다.
원딜러들이 서포터 때문에 못해먹겠다, 그런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 1,2렙 구간에서 원딜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평타 열심히 때려서 CS먹기가 끝.
딜교환도, 라인 푸쉬도, 주도권도 모든 것이 서포터의 손에서 판가름 난다.
그런데, 이 1, 2렙 구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서포터가 바로..
'1레벨에 Q를 찍은 배티, 그것도 너프를 안 먹은 버전.. 한 마디로 지옥 시작이지.'
경험치를 나눠먹는 봇라인의 특성상 초반 라인전은 상당히 길다.
한 번 고통 받기 시작하면 3레벨 찍을 때까지 서렌 생각만 댓 번은 날 정도.
원딜러들의 멘탈이 약하다 약하다, 하는데 이러한 구도를 겪어 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밖에 없다.
곧 빅캡틴맨이 연겨푸 떠올릴 생각이기도 하다.
우핫!
쿨타임이 고작 4초에 지나지 않은 배티의 Q스킬.
화염구가 배인의 옷자락을 또 한 번 타올라 말아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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