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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한국 리그
준결승전의 승리.
사실 조금 우습게 본 감이 있었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세트를 이긴 이상 승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 아닐까.
풀어졌던 마음은 네 번째 세트에서 고쳐 잡혔다.
결과적으로 이기긴 했지만.. 불밤은 역시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머릿속 똑똑히 각인되었으리만큼 땀을 쥐는 접전이었다.
앞선 두 세트처럼 라인전에서 짭짤한 이득을 내지 못했다.
한나라는 챔프의 특성 덕분인지 꽤나 잘 버티더라.
원래 매도 계속 맞다 보면 의외로 맞을 만한 법이긴 하다.
그걸 감안 해도 확실히 적응력이 뛰어났다.
일류 팀이 어째서 일류인지, 그 이유를 마지막까지 보여주며 분전했다.
'뭐, 그것도 오늘까지겠지만.'
별은 수명을 다하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뿜어낸다고 하던가.
스프링 시즌을 이후로 불밤은 쇠퇴.
계속해서 하락세를 걷게 된다.
물론 역사는 변한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나조차도 예측할 수 없다.
어쩌면 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결승전 상대로 누가 올지.
그리고 감독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도 마찬가지로 모른다.
'그 썩을 감독의 썩은 표정을 한 번 봤어야 했는데.'
첫 경기를 패배로 시작했던 삼선 블루.
이후로 내가 내리 출전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나의 출전을 못마땅하게 여긴 감독이 얼마니 민망해 했는지는 안타깝게도 간접적으로 밖에 알 수 없었다.
네 번째 세트 진행 도중, 코치에게 일이 있다고 한 마디 건넨 후 살금살금 사라졌단다.
"회식 자리가 이렇게 또 즐거울 수가 없네!"
"그러게, 누구 한 명 없으니까 정말로 분위기 좋다."
지난 8강 때는 회식없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주말에야 모였다.
하지만 오늘에 한해서는 그럴 연유가 하나 없다.
경기가 끝난 시각은 대략 일곱 시.
마침 시간도 적절하니 득달같이 달려갔다.
승리의 여운을 곱씹으며 거하게 한 자리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이대로 헤어지면 섭하니.. 역시 2차 콜? 나 이 근처에 분위기 좋은 바 하나 아는데."
"야, 그건 3차로 밀어두고 2차는 역시 노래방 땡겨야지?"
명진이와 씨지맥이 식사가 끝나기 전에 빨리 코스를 정해두려는 듯 분주하다.
1차라고 해야 할까.
간단하게 라고 하긴 뭣하지만 소고기 좀 맛깔나게 구워 먹으며 식사를 일단 마쳤다.
이후에는 당연히 2차, 3차가 이어진다
남자들끼리 회포를 풀 때 어디 밥만 먹겠는가.
이쁜 아가씨가 껴있지 않은 건 조금 아쉽긴 해도 분위기가 너무 좋다.
노래방으로 2차, 바에서 3차 하고 나오면 정말로 깔끔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지만 씨지맥이 예의상 이야기를 건네온다.
"시현씨도 갈 거죠? 말할 것도 없지만 전부 운영비에서 나간다고 코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팍팍 써도 돼. 이미 연락 받았지만 구단주님이 어딜 가도 괜찮다고 하셨어. 알겠지만 삼선이 선수들에게 돈 좀 쓰는 편이야?"
"오늘 같은 날 안 가면 섭하지! 우리 삼선 블루가 2회 연속 결승전에 진출했잖아. 가자, 형 가자."
명진이가 내 손을 붙잡아 끌고 간다.
내가 정식으로 삼선 블루의 소속이 아닌만큼 행여라도 눈치 볼까.
팀원들이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고 있다.
뭐, 그런 거 눈치 보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만 솔직하게 고마운 일이다.
부르르르.
공짜 밥, 아니 공짜 술.
그것도 비싼 걸로 골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떡 하니 떨어졌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말 안 해도 갈 생각이었다며 싱겁게 이야기를 꺼내려던 찰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왔다.
밀어서 잠금 해제를 한 순간 나는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진짜 미안한데.. 나 빨리 가봐야 할 거 같다..."
정말로, 안타까워 미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목숨이 더 아깝다.
분위기에 하도 취했던 탓에 그만 까먹어버렸다.
내가 잡혀 사는 주의는.. 솔직히 조금 그런 것 같기는 해도 아주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약속을 했으면 지키는 게 옳다.
오늘은 가능한 일찍 오겠다.
경기장에 나서기 전에 예은과 나눴던 이야기가 까톡을 보고 나서야 떠올랐다.
<일찍 온다고 해 놓고.. 죽기 직전까지 맞아볼래?>
상황을 놓고 보니 마누라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잡혀 사는 남편 꼴이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한 약속을 어기기는 뭣하다.
집 밖을 나갈 때만 해도 감독 거슬려서라도 회식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일이 꼬여버렸다.
"혹시.. 여친 분이?"
"크으~! 부럽다. 나도 예쁜 여친한테 꽉 잡혀 살고 싶어라-!"
부끄럽게시리 큰 소리로 떠드는 명진이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렇게 하나하나 져주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는데.
다음부터는 반드시 대처를 잘해야겠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발걸음 가볍게 밤거리를 걸어갔다.
.
.
.
* * *
경기가 끝나고.
남자는, 김다균 코치는 경기장 밖을 터벅터벅 나가며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현장의 중계진들이 무어라 설레발을 떨고 있었다.
<만약에.. 올마스터 선수가 우승까지 해버린다면 서포터에 대한 기존의 상식이 완전히 뒤엎어지지 않을까요?>
<아니죠. 이미 엎어졌습니다. 꼭 서포터가 정해진 흐름대로 갈 필요가 있느냐? 무려 대회에서 시원하고, 호쾌하게 성공해냈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로드 오브 로드 프로판이 흘러가는 구도에 대해 항상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내비쳤던 김은준 해설이 괘씸히 미워졌다.
SKY T1 K의 가능성을 그토록 높게 점찍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올마스터를 주인공 마냥 띄워주고 있다.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마스터의 기량이 어떠한지, 김다균 코치는 오늘 두 눈 똑바로 뜨고 전부 봤으니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지. 그만한 기량의 선수가 바닥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자신도 어지간하면 인정하기 싫었다.
애시당초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해외에서 이미 성공할 대로 성공한 선수가 금의환향이라니.
자국의 국민들 입장에서는 정말 감동적인 일이지만 만약 자신의 지인이었다면 뜯어 말렸으리라.
'막말로 받는 페이의 격이 다를 텐데.'
지난 LCF를 기준으로 해외의 프로판은 급변했다.
슬슬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잡아먹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투자를 주춤하고 있던 기업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이제 겨우 기업들이 슬금슬금 판을 훑기 시작한 한국과는 비교가 안된다.
듣기로는 기존 선수들의 값어치가 최소 1.5배.
몇몇 선수들의 경우 그냥 부르는 게 값이 되는 경우도 흔하단다.
뭐, 선수를 돈으로 보는 것은 전직 프로게이머였던 자신도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존경하는 선수였어.'
갤럭시 크래프트의 임요한 선수.
그 어떤 프로게이머에게 물어봐도 다들 존경한다고 답한다.
단순히 선배에 대한 예의, 사회적 이미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가 아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E-스포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이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관계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임요한 선수가 프로게이머들의 롤모델,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비단 게임을 잘해서 만이 아니다.
핍박 받던 인류 종족을 탑티어로 끌어올린 것도 공적 중 하나겠지만.. 진짜는 E-스포츠 판의 활성화.
지금껏 그에 준하는 업적을 세운 선수는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한 명이 더 나타났다.
'제 2의 E-스포츠 신화를 써내려 가고 있는 셈이니….'
아직은 과도기.
전설은 아직 탄생해가는 와중이다.
하지만 그 여파는 이미 여실히 영향을 미쳐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Unknown Error가 아니었다면 프로판, 특히 해외의 프로판은 기세가 크게 꺾였을 거라고.
한국의 프로판이 갑자기 주목을 받으며 크기를 키우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발 빠르게 E-스포츠 판에 뛰어든 SKY T1은 만약 주식 회사였다면 두 배, 세 배 가뿐히 뻥튀기 되었을 정도.
게임단을, 선수를 돈으로 취급한다는 게 좋지 않아 보이긴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가시적인 척도, 즉 가치다.
선수들의 가치가 오를수록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은 선망 받으며, 당당한 하나의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어째서 한국에 온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알리는 편이 낫겠지.'
Unknown Error가 조국인 한국에 재능을 기부하러 왔다.
한국 프로판의 부흥이 목적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기엔 김다균 코치는 나이와 경험이 지나치게 많다.
선수로서의 그는 존경스럽지만, 개인으로서의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은 데다가 원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한국의 프로판에 속한 이로서 조심을 해두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톡.
톡.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굳이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는 없다.
김다균 코치는 익명으로 잉벤 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잉벤에서 이미 한 차례, 아니 두 차례나 퍼졌던 이야기다.
너무 얼토당토 하지 않아 자신도 피식 웃으면서 지나친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가벼운 인터넷 유머, 루머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딱딱 들어맞는다.
올마스터가 사라졌던 타이밍과, 다시 한국에 온 타이밍.
선수의 특색이 넓은 챔프폭과 라인이라는 것도 얼추 비슷하다.
사실 이 점은 지나친 비약이다.
지금껏 논란이 제기되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라인은 몰라도 개인의 챔프폭이 그렇게 넓을 수가 없을 테니까.'
챔프폭이 넓을 뿐이지 선수의 색이 겹치는 건 아니었다.
올마스터가 주로 쓰던 챔피언은 AP마이, 개서스, 리심 등..
그에 비해 Unknown Error는 자드부터 시작해서 산다라, 탤런 등..
Unknown Error는 개인기 위주의 챔피언을 잘 사용한다.
물론, 올마스터도 솔로캐리가 가능한 챔피언을 다루곤 했지만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는 올마스터는 한계가 뚜렷한 선수라고 생각했었는데..'
SKY T1 K 내에서도 올마스터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다.
그를 스카웃하는 게 어떻겠냐?
팀 내부에서 회의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무산됐다.
무사된 이유는 자신이 테이커를 영입하는 게 더 낫다고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후회하진 않는다.
만약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한들,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당시의 올마스터는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기워 입은 얼간이였어.'
장기적으로 내다본 판단이었다.
딱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올마스터가 테이커보다 훨씬 나았다.
그 사실 자체는 김다균 코치도 인정하는 바지만 자신들 SKY T1 K의 출범은 빨라도 윈터 시즌, 7할 이상의 확률로 스프링 시즌으로 이미 정해두었다.
당장이 아닌 미래를 봐야 한다.
더욱이 하루이틀 갈 팀이 아니니만큼 성장 기대치가 높은 선수를 뽑아야 한다.
그런데 올마스터는 어떠한가?
꿀챔.. 넓은 챔프폭.. 여러 라인을 다룰 줄 아는 능력.. 물론 대단하다.
대단하지만 그 뿐이다.
안타깝게도 올마스터의 능력은 선수가 아닌 코치진으로서 대단한 능력이다.
게임을 하는 게 선수라면, 선수가 가진 바 기량을 최대한 뽐낼 수 있게 만드는 이가 코치.
한 마디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의 분리다.
마법사가 전설의 대검과 명장이 일 천 번 두들겨 만든 혼식의 역작과도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다고 한들.
낮은 레벨 대에서는 전사를 이길지 몰라도 고레벨이 될수록 클래스 차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게 된다.
즉, 코치로서의 능력을 가진 자가 자기 자신의 실력을 여러 꿀챔과 메타 적응으로 강화한다고 해도 뛰어난 피지컬을 가진 선수를 따라가기 힘들다.
멀리 찾아볼 것도 없이 적적한 예가 두 명이나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클끼리는 진작에 나와 같은 길을 걸었어야 해.'
얼밤의 주장, 그리고 정글러인 클끼리는 훌륭한 선수였다.
과거형인 이유는 더 이상 그는 현 프로 판국에 적응할 실력이 없다.
시즌2 때야 선수들의 평균 피지컬이 낮아 어느 정도 먹혔지만 이제는 두뇌만으론 안된다.
그 사실을 진작에 깨달았던 자신..
김다균 코치는 시즌2 초중반에 선수의 꿈을 접고 코치로 전향했다.
올마스터는 피지컬적인 면에서 테이커에 비해 뒤쳐졌다.
'분명 그랬을 텐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Unknown Error….'
북미에서도 유럽에서도 마법같은 게임을 선보였던 프로게이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기적을 가볍게 일구어내는 마술사와도 같았다.
반년 사이에 성장을 했다..
그 한 마디로 일축을 하기엔 감춰진 비밀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쨌든 그를 코치로 받아드리려 했던 본래의 계획은 없던 셈 쳐야겠군.'
선수로서는 글쎄올시다 여도 코치로서는 일류 이상이었다.
만약 올마스터가 코치를 희망했다면 김다균 코치는 어떻게든 한 자리 더 팀 내에 만들어낼 생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올마스터가 용병 계약을 끝낸 후에 제의를 해보려고 점찍어뒀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일.
Unknown Error라는 사실이 명실상부 해진 이상 떠나간 비행기다.
탐나는 선수.. 물론 맞지만 그를 감당해낼 자금력은 SKY T1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어떤 한국팀이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앞으로 어떤 행보를 밟을진 몰라도 쉽지만은 않을 거다.'
김다균 코치는 손가락을 마저 움직여 글을 작성했다.
기존의 추측과 더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를 정보를 더한다면 필히 화제가 되리라.
잉벤의 자유 게시판에 하나의 글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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