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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다
경기의 흐름은 역시나였다.
상대 쪽에서 슬금슬금 라인 스왑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안타깝지만 십중팔구 상대의 의도대로 될 가능성이 높다.
다름아닌 내가 와드를 안 샀기 때문이다.
"초반에 와드 없는 거 정말 적응 안된다.."
"올마형처럼 하면 대신 라인전이 세잖아. 근데 난 못 따라하겠더라."
내가 하도 두란링 스타트를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다들 익숙해졌다.
이야기를 듣기론 따라해보기도 한 모양.
하지만 따라하는 데에 꽃필 애로사항이 앵간한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갱킹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탑과 미드와는 다르다.
봇라인은 갱킹을 당하기 유난히 쉽다.
언뜻 납득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아니, 탑과 미드는 정글러가 오면 1:2 다굴이고 봇라인은 2:3인데 얼추 할만 한 거 아니냐?
그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2:3이라고 한들 반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결국 갱이 오면 그냥 쭉 빼야 하는데 그 때, 적 세 명이 한 명을 점사한다면 어떻게 될까?
초봄의 눈처럼 한 순간에 녹아 사라져버린다.
'정글러보다 레벨까지 낮으니 두란링 하나 정도로 메꿀 수 있는 차이가 아니야.'
나는 그 갱킹의 약점을 운영적인 지식을 통해 메꿀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아주 세세하게 보지 않는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볼까.
정글러가 3레벨을 찍은 후 탑을 찔렀다.
그런데 이때 CS가 10개였다.
이말인 즉, 늑대가 아니라 유령을 먹었다는 소리다.
탑에서 찌른 후 정글러가 귀환한다면 늑대가 남아있는 블루 쪽으로 걸음을 옮길 공산이 크다.
이것 외에도 탑라이너의 딜교환 추세라던지.
정글러의 움직임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만한 힌트는 많고 많다.
물론 차후에는 그러한 심리전까지 감안해서 게임을 진행하게 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는 것도 한몫하지.'
두 번째 세트에서 내가 고른 챔피언은 배티.
나는 평타를 툭툭 두들겨 상대를 견제하고 있다.
이 견제로 체력을 많이 깎아내면 깎아낼수록 갱킹의 위협은 줄어든다.
설사 갱킹이 와도 한 명 데려가거나 심하면 역관광이 나버린다.
이미 실제 경기에서 수 차례 증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웨이브 몰아서 천천히 가고 있으니까 명진이는 뺑 돌아서 와봐."
"내가 봇가면 쟤네도 분명 탑 다이브 칠 텐데.. 맥형도 조심해"
상대 쪽에서 라인 스왑을 걸어왔다.
내가 지금 부단히 때려대는 상대는 적팀의 탑솔러 전기쥐다.
그리고 아군 탑솔러 씨지맥은 익숙지 않은 챔피언으로 라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충분히 버틸만 할 거 같은데? 이거 라인 유지력 좋다."
"그래도 다이브는 조심해. 혹시 오면 쭉 빼고."
현재 씨지맥이 플레이하고 있는 챔피언.
연습량이 부족해 시작 전에는 상당히 불안해 했지만 직접 해보니 썩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서머 시즌을 장식하게 될 최강의 탑챔피언을 꺼내 들었으니까.
'딱히 내가 뭘 해준 건 아니지만 괜시리 뿌듯하네.'
내가 나서서 이 챔피언 해라, 저 챔피언 해라 왈가왈부 한 적 없다.
그저 내가 미국에 있었을 적, 전화를 통해 물어왔을 때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씨지맥 쪽에서 먼저 신규 챔피언에 대해 어떻게 보냐 이야기를 꺼내왔다.
별다른 말 하지 않았다.
나는 괜찮게 본다.
결정을 내리는 건 결국 자신이다.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라.
180을 훌쩍 넘어가는 몸집에 비해 자신감이 상당히 부족한 씨지맥이다.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가끔 울컥한다.
자신의 능력을 제 시기에 활용하지 못해 시대의 흐름에 묻혀야 했을 그가 진심전력을 발휘하다니.
그것도 한국 최고의 프로 리그라 할 수 있는 롤챔스의 결승전에서 말이다.
터억!
우리보다 먼저 탑라인에서 다이브가 이루어진다.
다이브 까다롭기로 첫 손에 꼽히는 거미여왕이 실뭉치를 던졌다.
연이어 적 봇듀오가 씨지맥을 향해 공격을 퍼붓는다.
어쩔 수 없다.
한 번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도 킬을 만들어낸다.
치지지직!
아직 아군 정글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벌써 눈치를 챈 것일까.
전신을 번개로 바꾼 전기쥐가 빠르게 도망간다.
하지만 아슬아슬 거리가 된다.
나는 점멸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화염구를 집어던졌다.
퍼엉!
맞점멸로 피하려 했지만 내가 한 발 빨랐다.
타겟팅으로 날아간 화염구가 전기쥐를 불태운다.
1.75초간의 스턴 효과는 전기쥐의 운명을 결정하기에 충분하다.
쿠! 챠앙!
적정글을 뺑돌아온 명진이의 탈리반 3세가 깃창을 때려박는다.
에어본된 전기쥐에게 레드를 묻히며 천천히 앞무빙.
순금의 방벽까지 터트리자 한없이 느려진 전기쥐는 결국 뒤를 잡힌다.
마무리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탑라인도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퍼스트 블러드!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일반적인 킬보다 100골드를 더 주는, 어시까지 생각한다면 그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 퍼블을 챙겨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알림음이 두 번 겹쳐 울렸다.
그것도 적에게 당했습니다가 아닌,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탑라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는 신호였다.
"탑 봤어? 나 마지막 젤리로 간신히 살았어. 1 대 3이었는데 역으로 한 명 따냈다."
"아니, 그걸 살았어?"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버틴 거야? 설마 그 패시브?"
씨지맥이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로 신나서 외쳐온다.
봇듀오가 정글러와 함께 진행하는 3인 다이브.
본래라면 절대 실패할 가능성이 없어야 할 다이브는.. 일단 성공은 했다.
상대는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씨지맥을 따냈다.
하지만, 따냈다고 끝이 아니었다.
'젤리맨…. 다이브 실수를 한 상대에게 애도를 표한다.'
출시된 지 열흘도 안된 신규 챔피언인 젤리맨.
젤리맨은 너무나 독특한 패시브를 가졌다.
죽게 되면 네 개의 젤리로 분열돼 잠시 후 부활한다.
그 네 개의 젤리를 전부 다 마무리 해야만 비로소 젤리맨이 죽는다.
상대가 당황해서 실수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패시브가 수호 악마라니.. 상대도 어지간히 억울할 거야.'
물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야 알고는 있었겠지만 다르다.
알고 있기만 해서는 예상과 엇나갈 때 대응 능력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이브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1초 단위의 미스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방금 탑라인의 상황이 으레 그러했다.
상대는 거미여왕의 실뭉치로 시작해 적절하게 스킬 연계를 해냈다.
젤리맨은 천옷 5포션으로 풀피를 유지하고 있어 순간적으로 녹아나진 않았지만 시간 문제였다.
거미여왕이 적당히 타워에 맞아주며 거미줄을 탄다.
그리고 서포터가 몇 대 더 몸을 대는 것으로 완벽하게 따낼 수 있었다.
실제로 이는 분명히 성공했다.
"쟤네가 나 죽고 나서 젤리 치려다가 미니언이랑 포탑한테 얻어 맞고 죽어줬어. 심지어 점멸도 빠졌다?"
"오 멋지네 굳~."
"와 맥형 멋있다~."
팀원들이 장난삼아 국어책 읽기로 호응하자 씨지맥이 풀 죽어서 아무 말도 안 한다.
당연히 장난이고 정말로 잘했다.
아무리 젤리맨의 패시브가 있었다 하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잘 버텨냈기에 가능했던 결과.
술술 풀리게 된 게임에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을 적팀이 기대된다.
'장난치다 걸리면 피본다는 거 어느 영화에서 분명히 봤을 텐데 이거 왜 이러시나."
할 거면 제대로 질러야 했다.
그런데 어쭙잖게 하다가 실패했다.
다음 세트부터는 우리도 한 명 제대로 자르고 시작할 텐데 곤욕 좀 맛봐야 할 거다.
─적팀의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젤리맨이 끝까지 살아남은 덕분에 큰 스노우볼이 굴러간다.
전기쥐를 따낸 아군은 적팀의 1차 포탑을 손쉽게 파괴했다.
미니언 웨이브를 몰아간 덕분에 빠른 철거를 할 수 있었다.
여유가 생긴 아군은 용까지 수월하게 챙겨갔다.
그에 반해 상대팀은 탑 1차를 철거하지 못하고 아직도 우물쭈물 해댄다.
"나랑 올마형 탑 가고 있으니까 적당히 귀환 타이밍 잡아. 재스왑하자."
"오케이. 전기쥐 노플이지? 잘하면 킬각 잡을 수 있겠다."
고작해야 2레벨인 전기쥐에 비해 젤리맨은 4레벨.
미니언 웨이브까지 아군에 웃어주니 전기쥐는 죽을 맛일 거다.
게임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이대로 승기를 굳혀나간다.
아니, 압도적으로 유린한다.
.
.
.
* * *
한국에서 가장 격이 높은 프로 리그 롤챔스.
롤챔스가 새로운 도전을 알렸다.
제 2의 E-스포츠로서 대중들을 향해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결승전이 빅 이벤트로 치러졌다.
분위기는 이미 성공적인 상태고 상당수의 방송 매체에서 취재를 위해 삼선 라이온즈 파크를 방문했을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물이 부실해서야 본말전도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중계진들은 피를 쏟는 노력을 받쳤다.
설사 용두사미로 끝나더라도 수준있는 진행으로 방송 분위기를 업시켜야 한다.
중계진들은 미리미리 결승전 예행 연습을 수차례나 했다.
노잼으로 빠질 수 있는 몇몇 상황을 예상해 진행 방향을 맞춰두었다.
실제로 갤럭시 크래프트에서는 중계진들의 재치로 위기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뭐, 안타깝게도 그 연습은 근본적으로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젤리맨 다이브 가나요? 설마 가나요?>
<전기쥐의 체력 관리가 잘 돼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포탑에 역관광 당합니다? 그래도 지르나요? 남자라면 질러야죠!>
롤챔스가 가장 흥할 때가 언제일까?
인기팀들끼리 맞붙을 때?
양 팀이 수준 높은 접전을 보여줄 때?
맹독 버섯을 심고 다닐 때?
아니다.
바로 신챔프가, 특이한 챔프가 꽉 막힌 메타의 흐름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줄 때다.
풍덩!
6레벨을 찍은 젤리맨이 포탑을 끼고 있는 전기쥐에게 대놓고 다이브를 행한다.
마치 말화이트 마냥 날아가서 전기쥐를 띄워버린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제부터는 역관광의 시간이다.
전기쥐가 뇌전 표창과 십만볼트를 연계해 젤리맨에게 스턴을 걸어버렸다.
패시브가 있으면 모를까, 아직 쿨타임인 젤리맨은 부활하는 일 없이 그대로 죽는다.
중계진들은 이 점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뚜루뚜 빠라빠라~!
젤리맨이 궁극기를 사용하자 에어본 상태이던 전기쥐가 또 한 번 튕겨나간다.
자신의 몸을 반액체 상태로 만든 젤리맨이 총 네 번 뛰어오르며 상대를 깔아뭉갠다.
둔화 효과까지 달려 있어 한 번 달라붙자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전기쥐는 속수무책 농락 당하지만 방법이 없다.
당연히 CC기가 풀리자마자 온갖 스킬을 쏟아부어 젤리맨을 기절시켰다.
그런데 그 스턴을 눈 깜빡할 새에 떨쳐내고 계속해서 전기쥐를 뭉개버린다.
젤리맨의 궁극기에 달린 효과.
반액체 상태로 변한 동안은 무려 75%의 강인함을 얻는다.
본래라면 1.25초 동안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전기쥐의 스턴이 고작 0.3초만에 풀렸다.
<풀피 다이브! 이건 굴욕이에요! 수비적인 라인전으로 이름 높은 호모 선수의 자존심에 금이 쫙쫙 가버렸습니다.>
<모순이라고 하죠. 창과 방패.. 호모 선수가 방패라면, 씨지맥 선수는 창입니다. 그리고 그 창에 방패가 보기 좋게 꿰뚫렸어요. 이건 사실상 라인전이 터졌습니다. 이제 곧 패시브도 돌아오기 때문에 다이브에 주저함이 사라질 거에요.>
전범준 캐스터와 김은준 해설위원이 신이 나서 떠든다.
노잼스가 되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 맞춰두었던 연습이 쓸모가 없어졌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애드립을 팡팡! 터트리는 것 만으로도 시청자들의 호응이 빵빵! 터진다.
-젤리맨이 전기쥐 하드카운터인가 보네? 전기쥐 진짜 싫어하는데 이참에 멸종 좀 했으면 좋겠다.
-격공한다. 탑라인에 전기쥐 오면 게임하기 진짜 싫어져. 나도 오늘부턴 젤리맨으로 카운터친다!
-근데 궁극기 있었으면 젤리맨이 역으로 죽지 않았을까? 레벨 차로 따낸 거 아님?
-스턴 걸려도 0.3초만에 풀리는데 뭔 상관이냐ㅋㅋ 그냥 박치기 맞은 시점에서 전기쥐는 죽은 거임 ㅇㄱㄹㅇ
6레벨을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 칼같이 실행한 씨지맥의 다이브.
스턴이고 나발이고 간에 간지럽다는 듯 맞으면서 따낸다.
전기쥐의 가장 짜증나는 점이 저 스턴인데 강인함이 75%라 통하지를 않는다.
씨지맥이 결코 생각없이 신챔프라는 무리수를 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씨지맥 선수가 몰래 연습을 해두고 있었나 봅니다. 신규 챔피언인 젤리맨을 탑으로 써보자. 사실 솔로랭크에서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정글로만 활용하는 실정이거든요?>
<그러고 보면 말카림 때도 그랬습니다. 씨지맥 선수의 손에만 걸리면 멀쩡한 정글러가 탑라이너로 탈바꿈해요. 한국의 에러갓. 탑라인으로 한정하자면 Error선수와 비견될 만한 기량과 특색을 가지고 있는 선수라 누구도 이견을 붙일 수 없을 겁니다.>
이번 두 번째 세트가 시작하기 전만 해도 상당히 불안했다.
저격밴을 엄청나게 당하니.. 멘탈이 나가서 즐겜픽을 한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게프로 리그에서 처음 나오는 챔프는 대부분 신고식을 제대로 치른다.
시간이 흘러 주류픽으로 자리잡는다 한들 첫 출전부터 날고 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씨지맥은 지난 윈터 시즌때부터 마술처럼 해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의 에러갓이라는 이명이 부족하지 않을 만하다.
<아, 잉벤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Error선수에 대해 최근 재밌는 루머가 하나 퍼지고 있는데요….>
젤리맨이 고조시켰던 흥분은 다시금 가라앉았다.
언제까지고 씨지맥의 젤리맨만을 칭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은준 해설은 그 잠깐의 공백동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잠깐도 기다려주지 못하겠다는 듯 이번엔 반대쪽 라인에서 사단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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