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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다
삼선 라이온즈 파크.
입석을 마다하지 않고 모인 2만 명의 추가 관중.
총 5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의 시선이 대형 스크린 화면에 집중된다.
송출되고 있는 영상은 그야말로 서포터의 귀감이다.
누가 어떻게 봐도 죽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게 리심이 너무나도 잘 노렸다.
어떻게 저기서 당구를 찰 생각을 했을까?
탈리반을 까서 토이치까지 1타2피를 해버렸다.
연이은 팀원들의 호응은 선수들도 아닌 관중들마저 깜짝 놀랐을 수준.
세 명이 한순간에 호흡을 맞춰 한 명을 노린 셈이다.
나이즈가 점멸 속박으로 토이치를 옭아매고.
잭트가 봉을 돌리며 도약해왔다.
생존템이라곤 하나 없는 토이치가 이에 노출됐다.
이건 꼼짝 없이 죽었다.
경기장의 수만 관중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덩도로 임팩트를 자랑했으나 결과는 정반대.
올마스터의 슈퍼 세이브에 의해 살아난 6코어의 토이치가 쏟아내는 화력에 적들이 녹아났다.
관중들로서는 굉장히 흥분되는 경기였다.
하지만 경기를 치렀던 선수들은 아니었다.
삼선 레드의 부스 안에는 침울함이 감돌고 있었다.
'완패했다.'
세 번째 세트의 온갖 작전들을 제안했던 이청호 코치가 손톱을 으득 물어 뜯었다.
분명히 스타트는 좋게 끊었다.
아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아는 한 필승.. 더럽다고 생각될 만한 수까지 모든 것을 동원했다.
동 게임단 내 선수의 안 좋은 습관을 이용해서까지.
들키지 않고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구설수에 오른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다못해 이기기라도 했다면….'
그렇게나 투자를 했건만 결국 지고 말았다.
패배를 한 요인을 따지자면 다대기.
첫 번째 한타에서 주력 딜러가 어처구니 없게 잘리고 시작한 건 결정적이었다.
"아니.. 진짜로! 물방울이 안 풀려서 죽었다니까?"
그 장본인, 다대기가 큰 목소리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설사 그 말이 맞다고 해도 애초에 들어간 게 잘못이었다가 공통된 의견이다.
이청호 코치의 입장도 별반 다를 바 없이 같았다.
그냥 천천히 앞라인부터 녹이기로 해놓고 판단을 바꾸다니..
개인의 판단을 앞세운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대기를 탓한다 한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제길, 이게 다 감독 자식 때문이야.'
지더라도 그냥 깔끔하게 졌다면 최소한 마음은 편했을 텐데.
켕기는 일을 해버린 이청호 코치는 싱숭생숭 가시방석이었다.
슬금 벤치 쪽으로 향해 눈길을 흘기자 지금의 상황을 만든 원흉이 태평하게 기대어 앉아 있다.
가장 마음이 무거워야 할 이가 오히려 여유만만이다.
대체 생각을 하고 살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은.. 다음 세트 구상이 먼저다.'
고민마저 사치다.
아직 결승전이 끝난 건 아니니 당장의 고비를 넘기는 게 급선무였다.
네 번째 세트를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을까.
이청호 코치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고민하고 있던 사이.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감독이 갑자기 일어나서 한 소리 내뱉었다.
"내가 보기엔 말이야.. 저 올마스터를 어떻게 하면 되지 않겠나?"
두 번째 세트에서 씨지맥을 저격했던 것처럼.
미안하지만, 감독의 이야기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번씩은 떠올려봤던 내용이다.
그리고 안 하는 쪽으로 결론이 지어진 데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올마스터가 무언가 하나 준비해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준결승전에서 조아라로 불밤의 뒷통수를 때렸을 때처럼 말이다.
반쯤 확신이 섰던 이야긴데 아니나 다를까.
인어라는 새로운 카드를 또 꺼내왔다.
인어를 포함하자면 올마스터가 다루는 서포터 챔피언만 네 가지다.
일반적인 서포터까지 고려하자면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다.
"서감독님, 그 선수는 밴으로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이청호 코치는 딱 잘라 막아섰다.
더 이상 감독의 말대로 흔들려서야 될 것도 안된다.
설명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선수들이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차라리 인어를 해주는 편이 낫긴 해."
"아까와 비슷한 구도에서 실수만 안 한다면 할 만할 것 같은데?"
선수들 사이에서 감독의 말 자체는 타당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솔직히 세 번째 세트를 패배한 이유도 실수가 겹쳐서 그런 거지.
제대로 꽝! 맞붙었다면 자신들에게도 승산이 충분했다.
실수가 한두 번 나온 것도 아니고 심각히 많았다.
봇라인의 갱승, 미드라인의 로밍, 다대기의 앞점멸 꼴아박기 등.
그 중 절반만 줄였어도 승산이 5할은 넘었으리라.
"이번에도 올마스터가 공격적인 서포터를 못하게 만든다면…."
"그래, 게임만 정상적으로 흘러가면 중반 한타에서 우리가 무조건 우위야."
게임 내적인 내용에 문외한에 가까운 감독이 그런 부분까지 깊이 생각해서 말을 했을 리는 없다.
올마스터 때문에 게임이 비벼진 경우가 많으니 올마스터를 견제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도달했을 결론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수들이 설득 당했다는 게 중요.
또다시 감독의 말대로 되는 것은 언짢았지만 그 이상의 해결법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별다른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은 이청호 코치는 일단 대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네 번째 세트의 밴픽이 시작되었다.
"근데.. 쓰렉귀, 배티, 조아라 이거 세 개 다 밴해버리면 젤리맨이 살잖아?"
시간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밴픽을 진행해야 했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올마스터는 충분히 마크할 수 있지만 문제는 씨지맥.
씨지맥이 두 번째 세트에서 꺼냈던 젤리맨의 공포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분명히 성공했을 다이브를 실패로 돌려버린 어처구니 없는 패시브.
한타에서는 말도 안 나오는 거리를 한 번에 점프해서 좁혀버린다.
그렇게 이니시가 걸리면 도망갈 수도 없는데.. 젤리맨을 죽일 수도 없다.
주위의 젤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체력이 뭉텅뭉텅 차오른다.
게다가 데미지는 어찌나 센지.
탱커 주제에 게임이 끝나고 나니 딜량이 1등이었다.
"마차, 혹시 너 저 세 개 중에 할 수 있는 챔피언 없어?"
"나한테 묻지마. 나도 지금 머리 터질 것 같아. 그런 이상한 챔피언들 연습을 했겠냐고.."
일단 블루팀인 덕에 첫 픽은 가져갈 수 있었다.
불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챔피언 하나를 뺏으면 완벽.
하지만 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평소 스케줄만 소화해도 빠듯한 참에 쓸지 안 쓸지도 모를 챔피언들을 추가한다?
불밤처럼 오래된 팀들은 몰라도 자신들에게는 여유가 없다.
애초에 상정하지도 않았던 상황이다.
그런데 정말 얼척이 없게도 상대 측에서 이를 해결해주었다.
"뭐야.... 조아라 밴? 농락하는 거야?"
"이번에는 인어도 밴했는데? 쟤네, 설마..?"
자신들이 쓰렉귀에 배티를 밴하자 상대는 조아라 밴으로 응대했다.
젤리맨을 밴하자 인어까지 알아서 밴해준다.
웃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삼선 레드의 선수들은 낯빛은 점점 붉어졌다.
농락 당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럽다.
의도가 읽힌 데다 해볼 테면 해봐라 선고까지 당해버렸다.
도저히 얼굴 들고 게임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독한 마음을 먹은 한 사람.
이청호 코치가 선수들을 향해 좋은 말로 구슬렸다.
"너희들 심정은 알겠지만.. 이건 기회야. 오히려 저 쪽도 신경을 써준 걸지도 모른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자신들의 주요픽을 알아서 밴하고 게임까지 져준다?
커뮤니티등에서 무어라 들을지 모르는데 구태여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지 선수들 모두가 이를 눈치 챘다.
그렇다고 게임을 안 할 수도 없고..
모두가 떨떠름하게 침묵하고 있던 상황에서, 팀의 1픽으로서 유일하게 손을 놀리던 호모가 깜짝 놀라 외쳤다.
설마 하던 챔피언이 살아버렸기 때문이다.
"자드 살았는데 가져올까...?"
상황이 어떻든 간에 결국 게임은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침체돼버린 분위기에서 경기를 한다고 과연 이길 수가 있을런지.
머리가 미어 터지려던 팀원들에게 한 줄기 햇살이 내려왔다.
상대가 자신들의 카드를 스스로 밴한 탓에 다대기의 18번인 자드가 살아버렸다.
"그래, 자드라면.. 100퍼센트 이길 자신이 있어."
다대기는 카지트도, 나이즈도 수준급으로 다루지만 트레이드 마크는 역시 자드였다.
솔로랭크에서 자신의 자드를 본 이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에러갓도 이 정도는 못 다루겠다고.
흔한 띄워주기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다대기였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드를 하는 자신과 다른 챔피언을 하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일단은 어쩔 수 없으니.. 해볼까?"
"쟤네가 밴한 거지 우리가 해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 그렇지?"
엎지른 물을 돌이키는 건 불가능하다.
나중에 사죄를 구한다고 해도 일단은 이기는 게 최선.
선수들의 의견이 한 갈래로 모여졌다.
그리고 내심 바라고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우승만 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
프로게이머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
롤챔스의 우승은 목표이자 도달점이다.
해낼 수만 있다면 나중에 어떤 지탄을 받는다 한들 기쁘게 감수할 수 있었다.
양심이고 나발이고 당장 눈 앞에 황금덩이가 떨어져 있는데 주워야지.
나중에 주인을 찾아주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 줍는 게 맞지.
줍고 나서의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어쩌면 이번 세트가 마지막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수들의 집중력은 크게 올랐다.
패배로 시작해서 드라마 같은 대역전극의 시나리오.
심심치 않게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들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쟤네 진짜로 대충 할 생각인가 본데?"
"리심 서폿? 아니 끠들스톡 서폿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이기자."
이유야 모르겠지만 방심을 해준다면 이용해준다.
그리고 방심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준다.
삼선 레드의 선수들은 모든 것을 불태울 각오로 네 번째 세트에 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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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상당히 불안불안 했던 세 번째 세트.
결과적으로나마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세 번째 세트에서 나는 정말로 서포터였다.
물론 서포터가 맞긴 하지만 지금까지 거의 서포터 노릇을 안 했으니까!
원딜러인 헬멧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라 이제는 그러려니 알아서 와드를 사온다.
하지만 세 번째 세트에 한해서는 서포터로서 정말 원딜러에게 올인했다.
이는 사실 내 나름의 사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잘 맞춰줬으니 한 판 정도는 원하는 게임을 해봐라.
이에 헬멧은 기대 이상으로 부응했다.
세 번째 세트를 캐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헬멧이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MVP도 받았다며, 서포터보다 딜량도 많다며 좋아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밴해도 괜찮겠어요? 오해를 사게 되는 건 아닌지.."
씨지맥이 나를 향해 걱정스레 물어온다.
어떤 염려를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스스로 주력 챔피언을 잘라버리다니?
패기 돋보이는 행위이지만 악수가 될 우려가 크다.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한다면 일부러 져준 거 아니냐? 의혹이 반드시 불거질 거다.
"이기면 그만이잖아요?"
"뭐, 그렇기는 하죠. 시현씨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
나의 말에 씨지맥이 피식 웃는다.
당연하게도 봐주려고 밴한 게 아니라 이길 작정이다.
그것도 아주 묵사발을 내줄 생각이다.
'설사 씨지맥이 용서해준다 하더라도 내가 그러질 못해.'
백보 양보해서 씨지맥을 저격밴한 건 넘어 가줄 수 있다.
얼마나 우승을 하고 싶었겠나.
그 마음이 조금 넘쳐버리는 것은 충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첫 한타에서 물방울 때문에 녹아버린 나이즈가 조금 불쌍하기도 하고 말이야.'
현재 인어에게는 눈치채기 힘든 버그가 하나 존재한다.
하도 안 쓰여서 출시된 지 반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픽스 된 물방울의 판정 버그.
기절이라 명시돼 있지만 사실은 에어본이다.
비슷한 CC기라 오해받는 둘은 명백히 다르다.
에어본은 강인함에 의해 지속 시간이 감소하지 않는다.
즉, 아테나의 신발을 올려도 하등 의미가 없다.
만약 이 버그가 픽스된 상태라면 나이즈는 조금 더 반항하다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됐으면 한타가 뒤집힐 여지, 분명히 있었다.
'그거 하나로는 밴픽질 장난질 친 거밖에 용서 못해줘.'
세 번째 세트에서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처음 키나키나가 잘렸을 때부터 설마 했는데 그것을 제외하고도 몇 가지.
그저 실력 차라고 보기에는 정글 동선이 너무 빤히 읽혔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아군이 박는 와드의 위치를 거진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첫 번째 세트에서도 그랬다면 내 지레짐작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심증도 이 정도 쌓이면 확증이나 다름없다.
'어디 가장 자신 있는 픽과 조합으로 열심히 발버둥 쳐봐라.'
다른 팀원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처럼 애매한 심증에서 끝나는 부분은 처벌 사항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다.
트라우마가 남으리 만큼 박살을 내주마.
내가 이 챔피언을 픽한 데는 결코 곱지만은 않은 심중이 깔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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