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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다
경기장의 선수 대기실을 거쳐 나오는 코너길.
그 길을 돌아 바깥으로 나가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나를 덮쳤다.
사람의 급소라 할 수 있는 허리를 와락 감싸 쥐어졌다.
"현장 검거 완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만 목소리에서 유추하건데 확실하다.
마음 같아선 뒤를 돌아서 확인하고 싶지만 불가능.
남사스럽게시리 양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놔주지를 않는다.
"변명은?"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곧 간다고…."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
아직 술자리 간다고 동의한 건 아니기 때문에 일단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데 예은이 어째서 여기에?
궁금하긴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다른데 있다.
'설마 확 허리를 분지르는 건.. 아니겠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장난이고, 솔직히 감동을 느낀다.
시끌벅적 사람 많은 곳 돌아다니기 껄끄러워하는 예은이 여기까지 오다니.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대구에 위치한 삼선 라이온즈 파크다.
이곳까지 오려면 최소로 잡아도 다섯 시간은 소요된다
혹시 2차를 가게 됐을 때 핑계를 대서 하루 자고 가려고 했을 정도로 많이 멀다.
마중을 와줬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고 고맙다.
"아냐, 차 몰고 와서 별로 안 걸렸어."
"차? 웬 차? 설마 아버님이.. 오셨다거나?"
혹시 하는 생각에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른다.
자동차가 땅에서 솟아나진 않았을 테고.
예은이 친구 차를 타고 왔을 리는 더더욱 없고..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지만 그건 너무 지레짐작이었다.
"아…버지랑은 상관없어. 그냥 앞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 차 한 대 뽑았어. 봐, 저기 있잖아."
예은이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게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고 한다.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입에 상당히 익은 듯 자주 말실수를 해온다.
어쨌든 아버님과는 상관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만에 하나 만난다면 어색한 공기가 한없이 감돌았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차를 샀다니?
"어디 있는데?"
"으이구 바보야, 저기, 저기!"
내가 하도 못 찾자 예은이 내 허리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줘서 방향을 틀었다.
기지배가 힘 하나는 억척스럽다.
어쨌든 바라본 곳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세단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정말로..? 진짜 비싸 보이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차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내가 봐도 두 가지는 알 것 같다.
하나는 국산은 아니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 한두 푼으로 살만한 차는 아니여 보인다는 거다.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자, 팀원들이 기다리잖아."
예은이 한 번 더 손에 힘을 줘 방향을 틀자 그 앞에는 씨지맥 이하의 팀원들이 떨떠름하게 서있다.
잠깐 정신이 팔린 바람에 잊고 말았다.
"오늘따라 옆구리 왜 이렇게 시리냐~."
"그러게나 말이야. 대구 밤 날씨 쌀쌀하다!"
인식하자마자 능청스럽게 놀려온다.
그럴 만한 짓을 하기는 했으니 변명할 말은 없다만.
그리고 부러움 받는 기분도 나쁘진 않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하긴 해야 할 듯하다.
"두 분이 뜨거운 밤을 지새우시겠다면야 저희에겐 말릴 방도가 없지만요. 그래도 가능하면 같이 가서 한 잔 하시죠? 딱 한 잔만."
명진이가 소주잔 홀짝이는 모양새를 연기하며 예은을 꼬득인다.
그렇게 깝죽대다 한 대 맞으면 겁나 아픈데.
내가 맞아봐서 아주 잘 아는데.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헤친 예은이 명진이에게 꿀밤을 쥐어 박으며 한 소리 한다.
"누구 놀리냐? 차 끌고 와서 술 못 먹거든?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고 하면 무임승차 정도는 해주지."
삼선 블루의 결승전에 회식에 예은의 동참이 결정되었다.
코치를 제외하고는 이전에 한 번 만남을 가졌기에 어색함 따위는 없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정말 잘 놀았지.
예은과는 할 말이 정말 많이 있는 만큼 일단은 배부터 채워야겠다.
.
.
.
* * *
약간의 술상을 겸한 저녁 식사 자리는 즐거웠다.
하지만 예은 데리고 2차, 3차를 가기에는 조금 그랬다.
때문에 가벼운 1차,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나와 예은은 따로 빠졌다.
그러한 흐름이 될 거란 사실을 모를 정도로 팀원들은 눈치 없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정말로 완벽하다.
오늘 예은과 주고 받을 말은 보통 분위기에선 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로맨틱한, 그런 걸 원한다는 건 아니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평소처럼 둘만 있는 자리에서 넌지시 건네려고 했다.
생각처럼 되지 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네가 이렇게 면적 적은 옷 입은 건 처음 보네.."
"무슨 조선시대 사람이냐? 요즘 길거리 여자들 미니스커트 길이 최소 이거보다 짧거든?"
나는 예은이 몰고 온 차의 조수석에 올라탄 채 어딘가로 가는 중이다.
목적지는 모르겠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무릎 위를 훌쩍 넘기는 미니 스커트를 입은 예은이 운전석에 앉아있다.
'엄청..긴장되네.'
상당히 신경 쓴 듯한 옷차림.
검은 색의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 그리고 살짝 비치는 또 검은 가디건을 걸쳤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시크함을 자아낸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예은에게 엄청 어울린다.
범접하기 힘들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됐다.
그렇다고 맨다리는 아니고 살색 스타킹을 신었다.
하지만 또 평소와는 다르게 얇다.
노출을 극도로 꺼려하는 예은이 정말 큰 마음 먹었다.
그 탓에 나까지 긴장돼서 입을 떼기가 힘들다.
"자, 다 왔어."
짧막한 두 마디와 이후에 이윽고 차가 멈춰 섰다.
그 전부터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대체 여긴 어디인지.
주위는 어두컴컴하고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는다.
'도로 한 가운데인가? 여긴 왜?'
시간도 늦은 데다 나도 예은도 피곤해서 당장 집에 가지는 않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듣고 왔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이렇다 할 특징이라곤 없는 나무들 적당히 우거진 사람 잘 안 다닐만한 오솔길이다.
이곳에 무슨 목적을 갖고 찾아왔는지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다.
"그냥, 우리 서로 할 말도 많잖아. 그래서 조용한데 찾아온 거야. 뭐, 불만이냐?"
아까부터 유난히 까칠한 상태인 예은이 나를 향해 툭 쏘아붙인다.
뭐, 불만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원하는 바지만.
예은이 차의 조명을 키자 나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어두운 계열의 옷과 새하얀 피부.
애매하게 밝은 조명 탓인지 눈에 띄게 대조된다.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적잖이 야시시한 분위기다.
예은과는 제법 오래 알고 지내왔지만 지금 내 가슴에 일어난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부류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본래의 목적만을 떠올렸다.
'고백.., 고백이라….'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당연히 사전 연습은 몇 번이나 해봤다.
머릿속은 물론 입으로 직접 소리 내어 말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하려니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학창 시절 시도해본 기억이 딱 한 번 있다.
그때는 주위에서 사겨라! 사겨라! 등을 떠밀어 준 덕도 있고
그냥 내가 젊은 혈기에 용기가 섰던 덕도 있어서 어찌저찌 잘 풀렸다.
결과야 지금의 내 꼴은 보면 설명이 필요없지만 해본 적은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밥상이 차려졌음에도 쉽사리 운이 띄어지지 않는다.
"흐응.., 할 말 없으면 나부터 할까?"
"아, 그래도 돼."
남자로서 솔직히 쪽팔린 일이다.
그래도 당장은 예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짜낸다 하더라도 그게 진심으로 전해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나는 몰라도 예은은 할 얘기가 딱히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았다.
예은도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 중 뭐부터 들을래?"
조금 생뚱맞은 화두를 꺼내왔지만 흥미가 생긴다.
지금 내가 들을 수 있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뭐가 있을까?
골똘이 생각해봐도 집히는 부분이 없다.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멘탈이 안 상하게 좋은 소식부터!
"이 차 있잖아. 어디서 났게?"
음흉한 표정을 지은 예은이 의자의 시트를 팡팡 치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고 보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말해준다고 했었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까먹고 있었는데 기억났다.
직접 타보고 나서 더욱 절실히 깨달았지만 이 차.. 최소한 자릿수가 다르다.
예은이 CLC에서 받은 급여와 상금을 합친다면 가능한 액수일 수도 있겠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니 통장 비밀번호 겁나 쉽더라? 1573? 민번 뒷자리?"
"그건 아니지!!"
순간 울컥 솟아서 덮쳐버릴 뻔했다.
진짜로 1573 맞다.
까먹지 않게 주민등록증 번호 뒷자리로 등록했다.
아니, 그 전에 내 민증 뒷자리는 네가 어떻게 아는 거니?
"농담이고 아빠가 사줬어. 우승 기념 선물이래."
"......진짜로?"
머릿속으로는 당연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이게 또 액수가 액수인지라, 예은이 평소에 장난끼가 하도 심해서 깜빡 속아버렸다.
너무 디테일하게 통장 비번까지 깐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람 무안하게시리 소리 지르게 만드냐..
"그래서 좋은 소식이라고 했잖아. 너 바보?"
말했지만, 말하긴 했지만!
답답하고 깝깝하고 억울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게 맞다.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소리 지른 부분에 대해 사과를 구하자.
"는 개뿔이 네가 내 민증 번호를 알면 안되지!"
"쳇, 바보라서 금새 까먹을 줄 알았는데."
예은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언행 하나하나가 얄밉고 미쳐 돌아가게 만드는 녀석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민증 번호를 알아낸 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 였다고.
소유자를 내 명의로 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개인정보는 알아야 했단다.
직접 물어보는 수도 있었겠지만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맞춰 몰래몰래 알아봤다고 한다.
내 책상 서랍을 이잡듯 뒤진 건 조금 많이 사생활 침해긴 했어도 기쁘게 봐줄 수 있는 일.
이렇게 챙김 받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정말 많이 기쁘고 설렌다.
"뭐, 쨌든 고맙다. 잘..쓸게."
버럭 소리친 주제에 고맙다는 말을 하려니 쑥스럽다.
나는 벌개진 얼굴로 눈길을 돌리며 최소한의 인사를 마쳤다.
솔직히 쌍방과실이다.
술도 마셔서 감정 제어도 잘 안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자.
그렇게 마음 먹은 나는 떠올렸다.
운전면허, 따놓기만 했지 사실상 잠롱면허인데.
이런 고급차를 묵혀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언제 한 번 날 잡고 예행 연습 좀 해야겠다.
그리고 아버님..께도 어떠한 방식이든 인사를 한 번 드려야 할 듯싶다.
"다음은 나쁜 소식이야."
음흉함을 넘어 성격 나쁘다는 게 표정으로 드러난다.
이래서 내가 사과를 안 했지.
이 녀석 한 번 넘어가 주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다.
"너, 술냄새랑 땀냄새 뒤죽박죽 섞여서 장난 아니야."
왜 또 시비십니까?
그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결승전 경기 좀 치르다보면 긴장해서 땀 좀 흘릴 수도 있지!
내가 살면서 한 번이라도 국민신문고를 울릴 날이 온다면 분명히 예은 때문일 거다.
이 녀석이랑 함께 있다 보면 나 자신이 생각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놀리려고 꺼낸 말 만은 아니었는지 예은이 이야기를 마저 이어왔다.
"그래도 오늘 정말 수고했어. 그리고 잘했어. 자, 오늘의 상."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두 팔을 내밀듯 벌린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볼이 살짝 상기돼 있는 것 보면 부끄러운 모양이다.
여기서 수 초만 지나면 서로 창피해져서 흐지부지 되고 만다.
내가 나서서 기회를 만들진 못했어도 오는 기회를 마다하는 바보가 될 수는 없다.
포옥.
안는다기 보단 안긴다는 모양새다.
예은이 두 팔을 오므려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나의 얼굴이 예은의 가슴팍에 파묻히자 적잖이 부끄럽다.
그렇지만 이대로 쭈욱 있고 싶은 게 솔직한 욕망이다.
'따듯하고, 부드럽다….'
이렇게까지 밀도 높은 스킨십을 가진 것은 처음이다.
남자로서 흥분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오히려 모성애에 가까웠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기를 10년.
나는 의외로 외로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방금 깨닫게 됐다.
명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두 눈에서 폭포처럼 흐르는 눈물은 그것 외에 설명할 방도가 없다.
예은의 가슴께가 축축하게 젖고 나서야 나는 오랜만의 방황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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