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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결 밑에 예은의 뽀얀 가슴골이 보인다.
깊게 파여있는 검은 블라우스의 안 쪽은 땀에 젖은 듯 습기가 맺혀있다.
나 뿐만 아니라 예은도 상당히 흥분감에 달아올랐다.
꽈악.
두 손으로 예은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평소라면 아플 수도 있는 힘의 세기지만 이 정도가 적당하다.
부드러운 침대의 쿠션이 충격을 흡수해준다.
침대에 파묻히듯 누운 예은과 입을 맞추던 것도 잠시.
여기까지 온 목적으로 잊지 않은 나는 손을 움직였다.
블라우스의 가장 위부터 하나하나 단추를 풀어나갔다.
"잠깐.. 맨 정신으로는 조금.."
두 번째 단추를 풀으려던 나는 예은의 손에 제지 당했다.
딱히 힘을 줘서 말린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건 아니다.
나야 식사 자리에서 두어잔 마셨다지만 예은은 알코올이라고는 입도 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행위, 맨 정신으로 하란다면.. 과연 할 수 있었을까.
내 성격을 감안하면 십중팔구 줘도 못 먹었을 게 분명하다.
일단은 한 번 참자.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가까스로 이성을 일깨워냈다.
"화장 고치고 올 테니까 밑준비 해줘. 맡길게."
예은이 방 밖으로 완전히 나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예은을 덮쳐버렸다.
장난이라던지 무슨 오해가 있다던지가 아니라 진짜로.
억지로 한 건 아니지만 놀랍다.
나 생각보다 용기 있었구나.
'예은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던 같은데..'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오늘 반드시 무언가 하나 결과물을 만들겠다.
다짐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예은이 일어나면서 주변의 공기들이 움직인 결과였다.
'냄새 엄청 좋다아.'
향긋하기만 하진 않다.
미약한 땀냄새가 섞여있는 체취는.. 장난 아니게 감미롭다.
가라앉을 뻔했던 흥분은 다시금 일어났다.
예은이 누워있던 자리에 조금 더 깊이 남아있는 체취, 그리고 온기.
얼마간 침대에 얼굴을 뭉개며 행복을 속삭였다.
.
.
.
* * *
화장을 고치러 간다고 했던 예은이 다시 나오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30분 정도가 흘렀는데도 나올 기미가 없다.
솔직히 다행이다.
침대에서 온갖 진상 짓을 해대느라 밑준비가 많이 늦어졌다.
'부끄럽게시리..'
회상하자면 한없이 잊고 싶은 흑역사다.
하지만 오늘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부엌을 겸한 세면대에 있던 와인잔 두 개를 거실로 옮긴 나는 두리번두리번 냉장고를 찾았다.
호텔 내에 술을 반입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냉장고 안에 있기 마련이다.
나중에 따로 가격을 치러야 하긴 해도 그게 뭐 대수겠는가.
가능하면 안주 거리도 있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현관 쪽에 종이 봉투가 하나 보였다.
언제 이런 짐을 가지고 왔더라?
'예은이 들고 온 짐인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투숙객이 두고 간 걸지도.
마음대로 여는 것이 실례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안 쪽을 흘겨봤다.
고급스런 곽에 묵직한 무게.
높은 확률로 술이었다.
"그것도 아빠가 선물해준 거야."
화장을 고치고 온다던 예은이 하필 지금 타이밍에 나타났다.
소지품을 훔쳐본 듯한 모양새라 상당히 뻘쭘하다.
하지만 예은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거실 탁자의 의자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퍼뜩 와서 한 잔 따라."
술잔을 까닥까닥 흔들며 명령해댄다.
딱히 기분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귀엽다.
"역시 화장 옅게 한 편이 훨씬 낫다."
"..바보, 비행기 태워도 뭐 안 나오거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던가.
예은도 싫은 눈치는 아닌지 피식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쿠웅.
술이 든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자 제법 느낌이 둔중하다.
천천히 상자를 개봉해보니 역시나.
술병을 보자마자 느낌이 딱 왔다.
문외한도 알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런 디자인과 액체.
액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알았다.
'돈을 마시는 구나.'
평소의 나라면 다시금 상자를 고이 닫았을 거다.
아까워서라도 못 마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또 큰 마음 먹고 이런 고급 양주를 따보겠는가.
"아, 얼음 잊었다."
"브랜디는 그냥 마셔도 돼. 온도가 최적이지 않은 건 조금 아쉽지만."
어? 양주는 물이나 얼음 타서 마시는 거 아니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예은 말 들어서 손해본 기억은 없으니 접어두자.
나는 양주 뚜껑을 살짝 힘을 주어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코르크 같은 게 아닌 따기 쉬운 구조였다.
"촌놈, 어여 한 잔 따라봐."
"어여도 사투리다 이 기지배야."
홧김에 술을 콸콸콸 따라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한탄스럽게도 서민스러운 내 몸이 의지를 거부한다.
졸졸졸 손을 벌벌 떨면서 예은의 술잔을 채웠다.
그러고 나서 내 술잔에는 조금 따른다.
한 병 가득히 있는데도 아까워서 못 마시겠다.
"자, 건배."
익숙지 않은 짓을 하자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나지 않는다.
예은이 내뻗은 술잔에 나의 잔을 들어 가볍게 마주쳤다.
액체가 든 탓에 짧게 울리는 파동.
한 차례 소리가 울린 후에 잔을 기울어 입술에 가져다 데는데.
"콜록! 뭐 이리 세?"
"이 바보! 무슨 소주 마시냐? 키키키킥."
아주 배꼽 빠질 기세로 웃어대신다.
처음 마시면 실수 좀 할 수 있지!
생각 이상으로 독했던 지라 헛기침을 조금 하긴 했지만 다시 마셔보니 썩 괜찮다.
그윽한 향내가 입안을 감돈다.
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 이 술이 맛있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상당히 독한 것 같은데 이런 걸 잘도..'
독한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면 예은도 어지간히 애주가다.
엷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한 모금, 한 모금 맛있게도 마셔댄다.
음식도 그렇지만 술도 정말 보는 사람 침 넘어가게 하는 재주가 있다.
"왜? 먹고 싶냐?"
술이 아닌 다른 쪽의 의미.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섹드립을 쳐대는 것 보면 참 말괄량이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술만 마시는 것도 뭣하고..
나는 문득 일어난 궁금증을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그.. 아버님이 걱정하시거나 하진 않았어..?"
딸내미가 외간 남자와 밤을 지새우다니.
그 남자가 책임감이 있고 없고를 떠나 보통은 말릴 것 같은데..
이렇게 분위기 좋아지도록 차에, 술에.
골똘이 곱씹어볼수록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너, 호구같아 보여서 괜찮데."
"................"
사실이지만!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아버님 팩폭 어마무시 하시네!!
그걸 돌려 말하지 않고 고대로 전해주는 예은의 입술도 얄밉다.
확, 복수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예은의 손을 잡아 당겨 끌어당긴 후, 입술과 입술을 부딪힌다.
차 안에서처럼 간 보는 일없이 곧장 혀를 밀어 넣었다.
아직 채 삼키지 못한 알코올이 입 안에 남아 알싸하게 혀를 자극해왔지만 이게 또.. 엄청나다.
향기로운 맛 이상으로 독했던 브랜디가 금새 적절한 농도까지 떨어졌다.
만약 브랜디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이것이 정답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정도로 예은의 입 안에 남은 브랜디는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꼴깍꼴깍 서로의 침을 탐내다 술이 떨어질 때쯤 입을 뗀다.
그러고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일련의 행위는 나와 예은의 술잔이 텅 비어버릴 때까지 반복됐다.
"여기 만져도 돼?"
예은의 허벅지를 향해 손을 내밀어 천천히 감싸 쥐자 고개를 끄덕 흔들어온다.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놀랍게도 스타킹을 벗은 상태였다.
살색이라, 그리고 정신이 딴 데가 있어서 바로 눈치를 못 챘다.
부드러우면서 탄력있는 피부가 내 손가락에 착 달라붙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든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까처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침대까지 모시는 게 좋을까.
아니다.
예은의 주량을 생각한다면 조금 더 마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허벅지가 아니라 정말 부끄러운 부위까지는 가야 진실된 허락이다.
나는 한 손으로 브랜디의 뚜껑을 술술 돌려 따낸 후 한 잔에 가득 담았다.
함께 마시고 있는 만큼 굳이 두 잔에 걸쳐 따를 이유가 없었다.
"바보, 얼마나 해댈 생각이야."
타박을 해오기는 하지만 말리는 기색은 없다.
이번에는 브랜디를 볼이 부풀을 정도로 머금은 후에 입술을 겹쳤다.
쪼르르 입을 타고 전해지는 알코올은 두 사람 분의 침에 의해 금새 희석됐다.
서로의 입에 밀어 넣기를 반복하자 서늘했던 술은 체온에 의해 덥혀져갔다.
안 그래도 진했던 향내가 후끈하게 입안의 점막과 코를 자극한다.
끈적하고 농밀한 키스.
단순하게 서로를 마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술까지 달라 붙으니 중독성이 있다.
와인잔에 한 잔 가득 따른 브랜디가 바닥이 날 때까지 멈추지 못하고 저질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은의 눈동자가 살짝 풀려있는 게 반쯤 맛이 갔다.
"괜찮아? 많이 힘들어?"
"갠..차나."
맛있는 술, 그리고 분위기 탓인지 취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은은 나 이상으로 자극스런 키스에 면역이 없나 보다.
키스가 끝나자 넋이 나간 채 가뿐숨을 몰아 쉬고 있다.
봉긋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헐떡여댄다.
이런 약한 모습의 예은은 처음 본다.
잔뜩 무언가 해버리고 싶은 기분.
허벅지를 만지작 거리던 내 손은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안으로 손을 넣는다던지 엄청 과감한 짓까지는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는 예은의 가슴팍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예은에게 제지되었지만.
"변태야.."
으아, 이것도 안되나.
아니면 흔히 여자들이 말하는 '안돼..지 않아!' 일까.
잠시 주저하던 나는 한 번 더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살짝 꼬집는다.
여기까지 와서 대체 왜?
예은의 안색을 살핀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뒤늦게서야 잘게 떨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딱히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는데..
이해가 가고 안 가고 이전에 하나 취해야 할 행동이 있다.
나는 두 팔을 뻗어 예은을 꼬옥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며 이마를 내 가슴팍까지 당겼다.
나머지 한 쪽 손으로 등을 토옥토옥 두들겼다.
자연스럽게 행해진 일련의 행동.
예은이 나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행위다.
"진정되면 얘기해."
"으응.."
방금 전의 격렬한 입맞춤도 무척 좋았지만 이렇게 플라토닉한 포옹도 애틋한 맛이 있다.
오히려 나는 이 쪽이 취향일지도.
고개를 살짝 숙여 코를 예은의 가르마 사이에 갖다댔다.
브랜디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향기가 코를 타고 흘러들어오니 이것 또한 적잖이 흥분된다.
필사적으로 참으며 예은을 더욱 꼬옥 안아줬다.
그렇게 5분 정도 흘렀을까, 예은이 내 가슴팍을 입술로 간지럽혀왔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 사실.. 남자에 대해 조금 트라우마가 있어."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지만, 예은의 목소리보다 숨결이 신경 쓰일 정도지만 주위가 워낙 고요하다.
또박또박 들려오는 한 자, 한 자는 내 귓구멍을 타고 머릿속에 울린다.
아차 싶었다.
근래에야 워낙 활기차진 예은이지만 정말로 얼마 전만 해도 이 녀석 인간 혐오증이라도 걸렸나.
그런 생각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떠올려 보니 예은과는 아주 서서히, 느리게 가까워졌다.
서스럼없이 지내는 게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예은의 안에는 아직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바보, 그 정도는 아니고.."
"됐으니 조금 더 기대."
이제 됐다는 듯 내 품을 벗어나려는 예은을 더욱 힘을 줘 안으며 생각했다.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어쨌든 오늘은 아닌 성싶다.
아쉽지만, 정말로 아쉽지만!
지금은 절제해야 할 타이밍이다.
스스로를 타박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는데.. 이어진 예은의 한 마디에 내 마음은 혹할 수밖에 없었다.
"정 참기 힘들면 나 완전히 취한 다음에 해도 돼..?"
뭘 해도 된다는 건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적어도 농담은 아니다.
정말로 확 저질러 버릴까.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가까스로 버텨냈다.
남녀 사이의 진도가 한 번에 훅 나가는 일이 잦다고는 해도 이건 아니다.
내 생각만으로 예은에게 손을 대면 기껏 겨우 가라앉게 된 트라우마가 재발할 우려가 있다.
예은과 하루이틀 볼 사이가 아닌 만큼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관계를 키워나가려 한다.
그래도 허락한다면 하나 정도는 욕심을 부리고 싶다.
"키스, 조금 더 해도 될까?"
기다려서 허락을 얻은 후에야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장소가 달랐다.
예은의 입술을 가볍게 핥고 나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다.
볼을 지나 목덜미로, 목덜미를 지나 쇄골로.
이 아래에는 예은의 트라우마 스위치가 될지도 모를 봉긋한 가슴이 자리잡고 있다.
쇄골부터는 천천히 입술을 미끄럼 탔다.
피부가 하도 부드럽고 고아서 굳이 침을 묻힌다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예은의 몸이 흠칫 움직인 시점에 정확히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부근을 살짝 힘을 줘서 빨았다.
내 나름의 각오이자 욕망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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