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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다
'분명히 같이 잤었던 것 같은데..'
막상 잠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니 아무도 없다.
혹시 어젯밤 일어났던 일이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표식이 남아있었다.
'역시..!'
쇄골 위 쪽에 남아있는 붉은 반점.
예은의 입술 자국이다.
복수라면서 아주 진하게 남겨 놓으셨다.
'와아.., 이거 설마 찰과상은 아니겠지.'
옷깃에 은은하게 남아있는 체취가 이를 부정한다.
사실이라면 정말 기쁜 일이지만 이 모든 일을 함께 한 장본인은 어디 가신 걸까.
벗어 놓은 옷을 한 번 팡팡 털어 주워 입은 나는 방 밖으로 나섰다.
"…."
"……."
나서자마자 예은과 눈이 마주쳤다.
예은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빵을 하나 베어 물고 있었다.
거실 탁자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잘 잤어?"
먼저 말을 건네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온다.
빵을 물고 있는 상황이라 맞인사를 할 수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가 조금 많이 돈독해졌으니 다른 걸 원한다.
나는 예은의 옆 의자를 쭈욱 빼서 앉았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며 능청스럽게 예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제서야 빵을 삼킨 예은이 반응을 해온다.
"어쭈구리?"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이 정도는.."
손톱으로 내 손등을 꼬집는 선에서 봐주신다.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그래도 손을 내리진 않았다.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런데 그거.. 술 아니야?"
예은이 빵과 함꼐 마시고 있던 투명한 주스.
사과 주스같은 건 줄 알았는데 술이다.
어젯밤 질리도록 마셨던 그 브랜디의 향이니 틀릴 리가 없다.
이 기지배가 아침 댓바람부터 정신이 나갔나.
"너 때문에 속 상해서 마신다. 꼽냐?"
"그래, 꼽다. 내가 너한테 뭘 했는데?"
그거 아저씨, 아줌마들이나 할 법한 변명이잖아.
장난기 어린 얼굴로 피식 웃는 게 일단 진담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속뜻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너 때문에 아직까지도 턱이 얼얼하잖아."
찌릿 째려보는 예은의 눈길은 정말로 무섭다.
지나가다 만났으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겠지.
물론 지금의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소리다.
예전처럼 호락호락 당해줄 턱이 있을까.
"많이 아프면 또 먹여줄까?"
"윽, 말해두지만 이건 평범하게 마실 거니까. 또 이상한 짓 하면 죽는다?"
살기등등하게 째려보는 눈초리에 담긴 위협은 보통이 아니다.
순간 몸에서 소름이 돋을 만큼 흉흉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어제 너무하긴 했지.
예은이 처음이라는 점을 악용해서 조금 심하게 장난질을 쳐댔다.
"하? 키스따위 수십 번은 해봤거든?"
어제 일을 화두로 꺼내니 이 모양이다.
전부 들통나 놓고 이제 와서 뭐가 어째?
자존심 드센 예은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린다.
하지만 나도 물러나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엄마랑?"
"아니, 제대로 남자랑 했는데에~?"
예은이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약을 올려댄다.
이것 봐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따로 있지.
자존심 싸움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속에서 질투심이 들끓는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참는데 한계가 있다.
나는 예은의 술잔을 뺏어서 입 안에 전부 머금어 버렸다.
독한 알코올 탓에 입안의 혀와 점막이 알알하다.
자극을 넘어 따가울 지경이다.
'이런 걸 어제는 잘도 마셔 댔네.'
마시기만 했을까?
이런 짓 저런 짓 평소라면 상상도 못했을 엄청난 행위를 해댔다.
떠올리기만 해도 낯 부끄러운 상황이 수도 없이 연출됐다.
하지만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이제 곧 예은의 반격이 떨어지겠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나는 온 몸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이상하다.
등짝이든 뒷통수든 한 대 확! 후려치며 내가 못 살아! 지저귈 거라 생각했던 예은의 반응이 생각보다 시원찮다.
"야, 야! 그거 마지막 잔이라고..! 진짜 마시면, 마시면! 제발 마시지 마아.."
내가 당장 꿀떡 삼키기라도 할 듯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다.
표정이 사색이 되어 애걸복걸 매달려 온다.
이 술이 그렇게나 마시고 싶었나.
'어휴, 술에 환장한 기지배. 쥐어 박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걸 내가 쪼르륵 술잔에 다시 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제까지 입 안에 머금었다가는 입천장이 죄다 헐 것만 같다.
나중에 한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지, 각오하며 삼키려던 찰나.
예은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해왔다.
쪼오옥..!
정말 과감하게도, 믿을 수 없게도 예은 쪽에서 입을 맞춰왔다.
행동한 동기가 가히 불순하지만.. 그러면 좀 어떠한가?
부드러운 예은의 입술, 그리고 혀가 엉겨온다.
'그런데 이 녀석.. 키스가 아니라 정말로 술을 마시고 있구만..'
그것도 한 번에 쭉 몰아 마시는 게 아니라 내 입 안의 액체를 혀로 굴려서 조금씩 음미까지 하고 있다.
나와 입을 맞추고 있는 주제에 다른 곳에 신경을 쏟다니 질투가 인다.
사람도 아니고 술에 질투를 하다니 나 애인가.
하지만 솔직히 이건 예은이 잘못했다.
입 안의 술을 예은에게 밀어 넣기도 하고, 오히려 뺏기도 하고.
그렇게 혀로 장난질을 쳐대기를 어언 10분.
드디어 만족한 듯한 예은이 천천히 입을 떼며 호흡을 고른다.
"후우.. 삼켰으면 진짜 죽었어?"
먹을 거에 집착 심한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내가 쪼잔함은.. 약간 있기는 해도 어지간한 건 참는 주의인데.
남자 선언도 그렇고 내심 섭섭함을 감출 수 없다.
두 손으로 예은의 볼따구를 쭈욱 늘려 복수했다.
"그래서 남자는 누군데?"
"아야, 당기지 므아!"
여자친구의 과거에 의미부여할 정도로 내가 찌질하진 않다.
하지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입으로 꺼내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지.
이번 경우는 나도 정말로 화났다.
"아빠랑 뽀뽀 했다, 됐냐? …아빠도 일단은 남자잖아.."
"뭐, 그런 거라면 아슬아슬 용서의 범주에 들지."
진작 그렇게 말하면 좋았을 걸.
사실 반쯤 알고는 있었는데 역시 직접 들어야 속이 편해진다.
사람을 놀려 먹어도 놀려 먹을 만한 내용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런데, 놔주기 싫다.'
볼따구가 쭈욱 당길수록 늘어지는 게 만두 반죽 같다.
점성은 그보다 낮지만 부드러움이라던지 촉감은 그보다 위.
이대로 계속해서 땡기면 어디까지 늘어날지 두근두근하다.
"작작 해라?"
예은의 볼이 살짝 빨개질 정도까지 당겨버렸다.
다행히 아픈 건 아닌지 그대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빵을 먹는다.
내 몫의 빵도 있는 걸로 미루어봐 아침에 근처 가게에서 가볍게 사온 모양이다.
물론 해장은 따로 해야 겠지만.
"혹시 하지만.. 해장술로 마신 건 아니지?"
"..너 나를 막장 술꾼으로 보냐?"
사실 그렇게 보긴 하는데..
그리고 솔직히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예은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딱히 깊지 않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정이었다.
"이 술 엄청 비싼 거란 말이야. 아빠가 절대 못 꺼내 마시게 했어."
"아, 그러셔.."
고오급 술이라는 것만 알지 얼마나 귀한 술인지는 모르는 나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도 애주가인 예은이 이렇게나 집착할 정도면 어지간한 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한 번 마셨던 것까지 뺏어 마시는 건 조금 많이 그렇긴 하지만.
"이런 변태가 뭐가 이쁘다고 이런 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 마신 예은이 텅 빈 병을 황홀하게 쳐다본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거면 이름 기억해놨다가 기념일 선물로 하나 사볼까.
물론 가격대가 합리적인 경우에 한해서다.
예은이 없어서 못 마실 정도면 절대 한두 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님도 너 술 좋아하는 걸 아셔?"
"알지, 스무 살 넘고 나서는 같이 마시기도 했는 걸?"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말인 즉, 스무 살 전에는 몰래 마셧다는 거잖아?
"..원래 외국에서는 미성년자도 와인은 마시거든."
"너네 나라 와인은 도수가 40%를 넘어가니?"
검지 손가락으로 예은의 이마를 꾹꾹 누르자 애써 무시한다.
이윽고 말도 안되는 변명을 붙이며 무마하려 해온다.
"와인을 증류시켜서 만든 게 브랜디인데 괜찮지 않아..?"
"응, 않아. 너희 아버님도 망나니 같은 딸내미 때문에 참 고생이 많으시다.."
고급스런 취미 생활의 한 갈래로서 맛 보는 정도까지만.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해오기는 하지만 진실은 모를 일이다.
이 녀석, 생긴 것과 다르게 어지간히 말광량이로 자랐구나.
이렇게나마 예은의 과거를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딱히 밉다는 감정도 안 들고.'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어오면 정말 때리고 싶었는데.
때리고 싶었지만 역으로 쥐어 터질까봐 부들부들 떨기만 했는데.
옥신각신 다투는 게 싫지만은 않다.
예은이 사온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넌지시 내 딴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근데 있잖아, 우리 사귀는 거 맞지..?"
어제 분명하게 이야기를 끝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지 않는가.
아니, 혹시 이전에 기분 문제다.
솔직히 말해서 일어나서 바로 나왔을 때는 기분이 어정쩡 붕 떠있었다.
내가 이렇게 예쁜 여자랑 사귀는 게 정말로 맞는지.
확인하러 왔다가 난데없는 치녀의 습격을 받고 잠이 확 달아나긴 했지만.
"왜? 후회되냐?"
"그러게, 인생의 무덤을 파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
나름대로 밀당을 하려고 받아치긴 했는데 표정 관리가 안된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벌어지며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다행스럽게도 여유가 없는 건 예은도 마찬가지인지 평소 마냥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지 않는다.
이 녀석도 쑥스럽다는 감정을 아는 걸까.
하지만 예은은 조금 다른 부분을 생각하고 있던 듯했다.
"오늘 일어나서 생각을 조금 해봤는데.."
예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온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분위기 타서 실수를 한 거라고 해오면 어떻게 하지.
침 삼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초조해진 나는 예은의 다음 말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우리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왔잖아..?"
"어, 어어. 괜찮으니 말 계속 해.."
본심은 하나도 안 괜찮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어색한 미소까지 지으며 예은의 말을 경청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은은 가볍게 숨을 고른 후에야 이야기를 이어왔다.
"내 억지인데.. 낮에는 앞으로도 친구로 지내는 게 어때..?"
말을 꺼내는 것이 힘든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치켜 세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대답을 기다리는 예은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뭔 말하는지 모르겠다.
예은의 말을 토씨 한 자도 빠지지 않고 경청했건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낮에만 친구로 지내자는 게 무슨 뜻인지 진짜 하나도 모르겠는데.."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는 걸 억지로 참으며 되물었다.
애매하게 끊는다면 구차해질 것만 같다.
앞으로 친구로 지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장애가 될지도.
이래서 CC같은 거 하는 게 아니랬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예은이 정말로 싫다면 나도 어떻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잠깐. 오해하지 말고. 내 말은 그.. 사이 좋게 지내는 건 밤에만 하자는 말이거든..?"
당황한 표정의 예은이 횡설수설 해온다.
이 흔치 않은 모습을 오늘 벌써 두 번이나 봤다.
예은의 입장에선 좋게 돌려 말을 하려는 것 같지만 내가 제정신이 아니다.
도저히 울음을 참을 수 없어진 내가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예은이 내 멱살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니까! 야한 건.. 밤에만 하자고 이 바보 멍충이 똥대가리야."
중간의 말이 너무 작아서 안 들렸다.
하지만 대략적인 문맥은 이해가 갈 듯도 한데..
결국 답답해진 예은이 행동으로 표현해왔다.
이가 울릴 정도로 격하게 입을 맞춰왔다.
"..알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알 것 같다."
아무튼 알 것 같다.
낮과 밤.
정말 좋은 생각이고 적극 찬성한다.
동거하는 입장에서 서로 신경 쓰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다.
또 사이가 깊어졌다고 친구로서의 분위기와 감정을 잃는 것은 아쉬운 노릇이다.
"밤이라고 너무 엉겨 붙지는 말고 적당히, 알지?"
"응, 그런데 괜찮겠어?"
저지른 일이 무안하기는 한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예은이 억지로 눈을 마주 치며 이야기해온다.
나야 환영이고 거부할 이유 하나 없겠다만 예은은?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
"같이 노력해 보자. 나도.. 흥미 없지는 않고…."
말을 끝낸 예은의 얼굴은 완전히 터질 지경이 되었다.
여기서 더 건들면 아마 수습이 안 되겠지.
나는 예은이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말 대신 허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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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이제 막 사귀게 된 새싹과도 사이니 천천히 성장을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