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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가고
결승전이 끝난 이후.
삼선 게임단은 오히려 대회 진행 전보다 바빠졌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계약 관련된 문제들도 문제지만 그 외의 것들도 상당했다.
"서지훈 감독, 제가 무슨 이유로 당신을 부른 건지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에.."
터벅터벅.
삼선 게임단의 구단주, 이혜설은 힘없이 문을 닫고 나가는 전 감독을 보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솔직히 토로하자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얼마 전 우승과 준우승을 동시에 차지한 삼선 게임단이 말이다.
다른 게임단 구단주들이 보기엔 행복한 고민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실상을 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리라.
현재 삼선 게임단의 내부 상황은 반쯤 뒤엎어진 상태였다.
'이걸.. 어찌 해야 한담.'
이혜설은 게임단의 구단주로서 이하의 일은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다.
책임감이 없다기보단 업무 특성상 어쩔 수가 없는 부분.
삼선 게임단의 구단주는 맡은 바 프로젝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사실 말이 구단주지 팀장이나 다름없는 기업의 중간다리 역할이다.
'어떻게 사고를 쳐도 커버가 불가능한 멍청이 짓을 해댄 거지?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어.'
넓은 사무실의 한 켠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책상 앞.
중역 의자에 오도카니 앉은 이혜설은 곰곰이 곱씹었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건지.
당장 살아남기 위해선 타인의 발바닥 핥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남자가 어쩌다 그런 빅실수를 저지른 건지.
서지훈 감독이 능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방관하고 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능글맞고 눈치 빠른 게 적어도 사고는 안칠 것 같았으니까.
괜시리 일벌리는 것보단 백 배는 나았다.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는 편이 사정에 알맞았다.
'이제는, 아니지만..'
다른 기업들도 하는데 삼선이 안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런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했던 프로 게임단을 윗사람들이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처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책임이 물어질 수도 있었다.
결국 서지훈 감독을 확실하게 끊어야만 했고 그 밑에 이청호 코치 또한 마찬가지로 처리됐다.
저지른 실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 조치에서 끝나는 게 다행인 수준이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남긴 짐덩이를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는 현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는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말이 반이지.., 감독도 코치도 새로 구해야 한다는 건 게임단의 존속 위기야.'
엄지 손톱을 질겅 물은 이혜설은 벌어진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숫자로 계산하자면 반쯤 뒤엎어진 상황이지만 실상은 더욱 심각하다.
차라리 선수를 구하는 거면 이렇게 속을 썩지 않았겠지만..
감독과 코치를 다시 알아봐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뼈아팠다.
구단주 입장에서 중요한 건 선수가 아니다.
밑사람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이를 통제할 윗사람은 정말 심혈을 기울어서 뽑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적당히 능력 있고 처세술 뛰어난 감독은 제격이었는데.
'당장의 성과도 있으니 한동안은 머리 아플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진짜, 짜증나!'
자신이 굳이 신경을 할애할 일이 없도록 충분한 권한을 주었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될 줄이야.
이혜설은 중역 의자를 빙빙 돌리며 짜증을 해소했다.
마음 같아서는 A4용지를 쫙쫙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체면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한동안은 직접 운영에 개입하는 것이 맞겠지….'
감독과 코치 뿐만 아니라 팀도 하나 갈려 나갔다.
삼선 레드의 선수들은 무사히 재계약이 됐지만 다른 한 쪽.
블루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원 뿔뿔이 흩어졌다.
계약상 문제되는 부분은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원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게 선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그 감독 자식.
축소해서 보고 해왔지만 실상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삼선 레드의 선수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끝난 일은 아무래도 됐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 인데.'
최우선으로 삼선 게임단을 살펴라.
이혜설은 얼마 전 있었던 회의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상부가 로드 오브 로드의 프로판을 적잖이 주시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맡았던 어깨가 급무거워지는 일이었다.
'이럴 때 믿을 만한 사람이 딱 한 명만 있었어도.. 가만, 그러고 보니?'
망할 놈의 감독 자식이 떠넘긴 짐덩이 중에 큰 거 하나.
우승시 열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기로 한 선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감독이 하도 설레발을 치길래 허락을 했다만..
결과적으로 삼선 블루가 우승을 하고 나니 지불해야 할 금액이 산더미다.
그래도 뭐, 우승이란 결과물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라 아깝다고 만은 볼 수 없었다.
삼선이 주머니가 가벼운 게임단도 아니고 위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시시콜콜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 자신이 그 이야기를 회상한 것은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해외 프로 리그의 절대자라.. 이건 반드시 돈이 돼.'
이혜설은 직책상 어쩔 수 없이 우두머리 역할을 맡았을 뿐이지 로드 오브 로드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공중파까지 타며 일약 인기스타 덤에 오른 올마스터에 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해외에서 유명세를 떨치다 귀국을 마음먹었다고 하던가?
비교할 이가 없으리 만큼 실력이 대단하다며 얼마 전 9시 뉴스에서 띄워졌을 정도다.
당연히 어느 정도 과장이야 섞여있겠지만 지금부터 조사해도 늦지는 않다.
애초에 그가 용병으로 계약했을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리 로드 오브 로드를 잘 모른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게임단들에게 자신을 과시한다. 보다 뛰어난 계약 조건을 잡아채기에 실력 증명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스포츠 업계가 으레 그러하다.
현지 적응이 증명되지 않은 선수와, 증명된 선수의 연봉은 천지차이다.
만약 올마스터가 스프링 시즌의 우승없이 자신의 가치를 들이밀었다면?
한국 게임단들로서는 떨떠름, 감수할 수 있는 기회비용 만큼의 액수만 제시했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자신도 그것이 정론이라 생각하고 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면.. 보통 내기가 아니야.'
그런 상황에서 올마스터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우승시 10배라는 성과제 계약, 그리고 우승까지.
자신의 가치를 의심할 여지가 없이 완벽하게 증명해냈다.
게임 실력뿐만 아니라 머리 돌아가는 능력도 더할 나위 없는 인재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그런 인재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줄 돈이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처리는 빨리빨리 하는 게 낫겠지.'
대회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밝혔다.
이는 자신을 스폰을 해준 게임단을 공개적으로 구한다는 소리다.
천천히 최고의 계약을 기다릴 게 십중팔구다.
하지만 세상에는 혹시라는 게 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제의가 올 일은 없겠지.
그렇게 착각한 채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게임단보다 위의 조건을 제시한다면 반드시 넘어올 거야.'
현재 상부는 E-스포츠의 성장을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재 영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혜설은 자신감 있게 상부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했다.
.
.
.
* * *
한국의 롤챔스 스프링 시즌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북미와 유럽.
윈터 시즌 때와 마찬가지와 한 시기 늦게 대회가 치러진다.
다소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Unknown Error가 은퇴하고 한국으로 가버렸다.
이는 상당한 파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한국 사람이었다니?
국적 문제는 그다지 왈가왈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다국적이 당연하다시피한 해외 프로게임단에서 한국인 한 명 있고 없고는 큰 화두가 될 수 없었다.
이전처럼 해외 프로판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하다.
진짜 문제는 그가 떠나버렸다는 사실.
Unknown Error가 없는 북미 리그과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런지?
래딧의 유럽 게시판에서는 은근한 비웃음을 엿볼 수 있었다.
─LCF 북미 우승은 솔직히 에러갓 빨이었지 LOOOOL
그 에러갓이 떠난 이상 북미<<<유럽.
이건 반박이 불가능함.
└아냐, 에러갓은 곧 돌아올 거라고!
└바보야, 너네 에러갓 한국 가있어.
└북미팬으로서 솔직히 반박하기가 힘들다T.T 그래도 아직 미역슨이 남아있잖아?
글쓴이-미역슨급 선수는 유럽에도 두어 명은 있고 전체적인 질에서 북미가 유럽 못 따라와~
유럽팬들의 비아냥은 북미팬들 콩닥콩닥 새가슴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팬들의 염려는 지나친 기우였다.
에러갓의 지분율이 크다고는 하나, 북미 리그의 역사는 하루이틀로 쌓아 올려진 게 아니다.
NA롤챔스 스프링 시즌의 조별 리그가 시작되자 불안은 빠르게 종식되어 갔다.
<에러갓이 없어도 건재하다, 조별 리그 A조의 첫 번째 경기! CLC가 팀 투르칸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옵니다!>
세인트조지아가 돌아오고, 빅풋이 제 기량을 회복함으로서 CLC는 굳건한 성세를 유지해냈다.
미터스를 중심으로 한 팀 투르칸도 만만치 않게 맞서며 명경기를 보여줬다.
─역시 이래야 빅풋이지!
힘 좀 빠졌을 때도 한타는 진짜 맛깔나게 잘했잖아.
그런데 라인전 기량까지 따라잡게 되니까 사실상 단점이 없다.
이 정도면 에러갓의 빈 자리 훌륭히 메꿔낸 듯?
다시금 전성기 시절의 포스를 보여줄 거라고 난 믿는다.
└내가 보기엔 현재 메타가 빅풋에게 웃어주는 것 같다. 미드에서 파밍만 해도 전체적으로 게임 풀기가 쉬워졌어.
└구리가스라는 챔피언 선택도 한몫했지. 라인 푸쉬하면서 적 압박하기 좋아.
└CLC가 에러갓이 몸담았던 여파 덕인지 연구를 제대로 한 느낌이야. 전체적으로 성장했어.
└REAL. 에러갓이 떠났어도 CLC는 문제없다!
CLC 뿐만이 아니다.
나머지 팀들도 각자 발전된 모습을 과시하며 팬들의 기대에 부흥했다.
지난 LCF때보다 결코 수준이 낮아지지 않은 NA스프링 시즌.
유럽의 팬들은 혀를 찼지만 자신들의 호적수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내심 싫지 만은 않았다.
현재 래딧에서는 북미와 유럽의 팬들이 옥신각신, 서로 얼마나 명경기가 나왔는지 자랑하며 스프링 시즌의 문제없는 흥행을 알렸다.
─에러갓이 자국 리그로 빠진 건 정말 아쉽지만.
요즘은 그게 꼭 나쁜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에러갓 떠난 후로 롤챔스 안 보다 할 거 없어서 다시 보고 있는데 의외로 괜찮더라?
누가 이길지 예상하며 천천히 관람하는 데에 재미 붙음.
잘 보니까 에러갓 말고도 괜찮은 선수들 많은 것 같아.
└요즘 잘하는 선수 많지. 미역슨이나 미터스처럼 각팀마다 최소 한 명씩은 있음.
└그렇기도 한데 전체적으로 선수들 기량이 엄청 올랐어! 예전처럼 어이없는 실수도 안 보이고.
└이번 스프링 시즌 누가 우승할지 진짜 흥미진진해. 듣기로 에러갓은 한국 리그 가볍게 정복했다던데 남은 북미 선수들도 분전해야지!
Unknown Error가 북미의 프로 리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갈 정도로 북미는 만만한 초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맹수의 왕 사자가 사라지자 우후죽순 고개를 내민다.
너도 나도 비어버린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진심전력을 아끼지 않는다.
팀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튀기 위해서 노력을 쏟고 있다.
지금껏 너무나도 큰 그늘 탓에 가려져 있었다.
크나큰 그늘이 치워진 것은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
자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떨칠 절호의 찬스였다.
─그런데 에러갓은 정말 한국에 짱박힐 생각일까?
솔직히 에러갓 실력이 아까운데..
두어 시즌 적당히 뛰다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대충 롤드컵 시기쯤 해서.
└글쎄, 그건 에러갓 마음에 달린 거겠지.
└롤드컵때 설마 한국 대표로 오는 거 아니야?
└What the hell…. 에러갓이 한국 대표로 오면 북미고 유럽이고 사이좋게 털리겠다...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네.. 제발 현실에서는 안 일어났으면;
로드 오브 로드 월드 챔피언 컵.
롤드컵이라는 속칭이 더 유명한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로드 오브 로드 대회다.
전 세계의 강호들이 이 날이 오기 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명성만큼이나 참가할 수 있는 조건은 까다롭다.
리그 포인트라는 제도가 있어 각 나라별 상위 두 팀만이 참전 가능하다.
그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프로팀들은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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