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직 나만이 마스터다-500화 (500/803)

500====================

봄이 지나가고

최근의 나는 집에서 노닥노닥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잠깐 외출을 할 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끔.

대부분의 시간은 집 안에서 여유롭게 보낸다.

'대회도 끝마쳤는데 조금 한가하게 보내는 것도 괜찮잖아?'

뭐, 겜돌이 인생에서 한가하게 보내나 안 한가하게 보내나 큰 차이는 없긴 하다.

하지만 내가 한가한 것과 예은의 활동이 제한되는 것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얼마 전, 찜질방에도 못 가게 생겼다며 나를 쪼아댔던 것은 솔직히 비약이 크다.

진지하게 따지자면 이건 예은의 탓이 맞다.

토옥.

나는 엄지 손가락을 움직여 핸드폰에 동영상을 틀었다.

동영상은 얼마 전 스프링 시즌 당시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오는 내용은 아니었다.

<게임은 제가 좋아해서 하는 거고요. 오늘은 제 남자친구 될 사람 우승 보러 왔어요~.>

참을 수 없는 오글거림.

며칠 전에 이걸 예은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적반하장으로 내 볼을 꼬집었다.

꼬집어서 쭈욱 당기면서 한 마디 해왔다.

<다 알고 있었어, 짜샤.>

애시당초 약속된 고백이었으니 나도 막 부끄럽다는 건 아니다.

예은도 이런 거 가지고 하나하나 창피해 할 성격도 아니다.

문제는 이 영상이 하필이면 9시 뉴스에 나왔다는 거지.

"너 때문에 내가 막 집에서 예쁜 여친이랑 알콩달콩 야릇한 신혼 생활을 보내는 줄 알잖아."

"그럼.. 안 예뻐?"

예은이 나를 찌릿하게 노려 보며 게임패드로 허벅지를 때려온다.

둔중한 타격이 살을 울리며 적지 않은 데미지를 나에게 가한다.

방금 전 격투 게임 안에서도 맞았는데 현실에서 또 맞았다.

눈물이 찔끔 나온다.

"아니, 그 부분 말고.. 낮에는 거의 동성 친구랑 다를 바 없는데 너무 날조 아니야 이거?"

나는 스마트폰을 주륵 내려 영상 밑의 댓글을 보여줬다.

댓글의 내용은 참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누가 보면 내가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줄 착각할 정도다.

-와, 9시 뉴스 얼짱녀가 뮴뮴 누님이었다니ㄷㄷ

-Amazing! Queen MyumMyum in the Korea News!!

-올마스터 여친 생겼다 하더니 뮴뮴 여왕님이었어? 헐, 대박.

-저런 여친 있으면 얼굴만 보고 살아도 행복하겠다.

-동거도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저런 미인이랑 매일매일 으쌰으쌰.. 캬아~

-성지순례 왔습니다. 뮴뮴 누님 반만 되는 여자친구 생기게 해주세요.

└응 안 생겨.

응, 못하고 있어.

낮에는 놀아주지도 않아.

근데 얼굴만 보고 살아도 행복한 건 맞네.

적어도 반 정도는 거짓과 선동으로 얼룩져 있다.

'가끔 이렇게 게임 정도야 해주지만.'

나와 예은의 방을 제외한 제 3의 방.

본래라면 안방으로 쓰여야 할 이곳은 그냥 게임방이다.

안에 컴퓨터부터 TV에 연결하는 오락기까지 잔뜩이다.

종종 예은과 로드 오브 로드 이외에 대전 게임을 즐기고 한다.

"흐응…."

내가 건넨 핸드폰을 낚아채서 댓글들을 주르륵 살펴보더니 기묘한 한숨을 내쉬어온다.

혹시 성희롱이 심한 내용이 있었던 걸까.

미간을 찡그린 채 무언가를 신중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핸드폰의 화면을 닫은 예은이 나를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너도 내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

그렇게 다이렉트로 물으면 대답하기가 껄끄로운데..

예은이 다른 의미를 담아 물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이렇게가 무엇이냐고.

"여자친구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라던가.. 한 마디로 이상형 말이야."

얘가 갑자기 뭘 잘못 먹었나.

잇달아 몰아치는 곤란하기 그지없는 질문은 지극히 당황스럽다.

평소 예은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정도쯤은 서로가 알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원할 때 야한 거 해주는 여친이라던가.

"나는 지금의 모습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

개뿔이! 용기를 짜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도 나쁘진 않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을 들은 예은은 아까보다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주름진다고 한 마디 해주려던 찰나, 미간을 푼 예은이 나에게 툭 쏘아붙였다.

"너 혹시.. 고자냐?"

"니가 할 소리냐!"

예은과 사귀게 된 첫날에 있었던 사건.

혹시라도 트라우마가 돋을까 그 이후로도 많이 엄청나게 신경을 쏟았다.

잘못 건들면 깨지는 유리 인형 다루듯 스킨십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걸 네가 따져오면 안되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내가 남자였으면 진작 덮쳤을 걸? 봐바, 이렇게 이쁘잖아? 몸매도 좋고."

예은이 액정이 꺼진 핸드폰 화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쳐본다.

예쁜 건 사실이지만 나를 너무 무시하는 발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나쁜 마음 먹으면 그대로 넌 녹아웃이다.

나는 확 두 손을 내 뻗어 예은의 손을 마주 잡듯 깎지 꼈다.

그대로 힘을 줘서 예은을 밀어 넘어뜨렸다.

레슬링으로 따지자면 마운트라도 시킨 모양새다.

"야, 야. 지금 낮이거든? 죽을래?"

"먼저 도발한 건 너잖아. 넌 진짜 한 번 혼나야겠다."

그 자세 그대로 서로 힘겨루기를 한다.

예은의 악력이 세다고는 하지만 팔힘에서는 아무래도 남자를 이길 수 없다.

이래 봬도 난 운동을 꽤나 한 편이고 진심전력을 쏟는다면 여기서 정말 거사를 치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뭐, 거기까지야 안 하겠지만.'

방금 전 예은이 한 말은 어디까지나 나를 놀리기 위해서다.

정말 트라우마가 다 해소가 됐더라면 내가 진작에 덮쳤다.

나라고 예은과 한 꺼풀 진도를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니까.

물론 나를 놀린 대가는 톡톡히 돌려줄 작정이다.

그렇게 서로 부둥켜 안은 채 땅바닥을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게임방은 꽤나 넓은 편이라 간간히 부딪혀 방향을 조정하는 것으로 거의 무한정 부대낄 수 있다.

푹신한 카페트도 깔아둬서 딱히 아프다는 느낌도 없다.

""하아.. 하아..""

서로가 땀과 먼지에 흠뻑 젖을 즈음 호흡이 가빠지며 자연스럽게 멈춰 섰다.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나는 힘이 빠진 예은의 양 쪽 볼에 침 범벅이 될 정도로 뽀뽀를 해주며 벌을 주었다.

"바보야, 더럽잖아."

"어차피 샤워해야 할 텐데 뭐 어때."

제대로 한바탕 뒹굴었다.

굳이 침이 아니더라도 땀과 먼지가 뒤엉켜 엉망이 돼버렸다.

목적 했던 대로 벌은 제대로 준 셈이다.

"으윽.., 머리도 헝클어졌네. 그럼 나 먼저 씻는다?"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것으로 복수를 한 예은이 게임방의 화장실로 들어간다.

정확히는 화장실 겸 샤워실.

나와 예은이 아직 사귀지 않을 적에 정해놓은 룰이다.

어쩌다 실수하는 상황이 나올지도 모르니 예은은 안쪽 화장실, 나는 바깥쪽 화장실을 쓰자고.

지금에 와서는 한탄만이 가득하지만 당시에 그런 룰이 없었으면 내가 이성 통제를 못했을지도 모른다.

툭, 툭.

나는 샤워기의 물 떨어지는 소리에 유혹받기 전에 게임방을 벗어났다.

몸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내며 방문을 닫았다.

타이밍이 아슬아슬 했는지 아찔한 물소리가 상상력을 자극해온다.

'이렇게 노닥거리는 것도 정말 좋아하긴 해.'

언젠가 선을 넘을 날도 기다려지지만 지금의 생활도 한없이 소중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노력해야 한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의 고백을 예은이 받아준 까닭.

두루뭉실 듣기는 했다만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단다.

여성들은 성실한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낀다고 하던가.

나 자신이 성실하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못하겠지만 예은은 그렇게 봐준 듯하다.

솔직히 말해 언제 예은을 실망시키지 않을까 매일매일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다가오는 서머 시즌에 대한 대비를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다 막혀버렸었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여러 프로게임단에 혹시 선수를 팔 생각 없냐, 의사를 던져봤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부디 한 명 정도 걸렸으면 하는 선수가 있었다.

"스프레이, 폭스, 코코볼 등 아까운 선수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현 시점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미래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는 한참은 걸려야 할 미래지만..

내가 키운다면 그 시기를 분명 앞당길 수 있다.

'걔네들을 데리고 있는 팀들이 전부 거절해버린 바람에 불가능하게 됐지만.'

계약 기간도 남아있어 개인적으로 꼬시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건 상당히 민감한 사항인지라 뜨거운 감자로 달궈진 내가 섣불리 시도하기는 뭣하다.

소문이라는 건 안 좋은 쪽으로는 지나치게 잘 퍼지기 마련아니겠는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도 아니니 조심해둬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리고 내가 진짜로 노리는 바는 따로 있었다.

딸칵.

나는 컴퓨터를 켜서 곧바로 즐겨찾기 해놓은 인터넷 창을 띄웠다.

인터넷 창에 띄워진 내용은 LCL, 아마추어 리그의 일정.

향후 세워 놓은 계획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여기에 나가서 꽁승을 하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그건 많이 아니잖아.'

고작 시드권 얻으려고 내가 아마추어 대회에 나간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어도 할 말이 없다.

농담으로라도 생각해 볼만한 일이 아니다.

나갈 생각이 없음에도 LCL의 일정을 살피는 데에도 당연 의중이 있다.

'분명히 스프링 시즌에는 없었어. 그렇다면 서머 시즌의 LCL일 가능성이 농후하지.'

내 기억에 따르면 그가 프로게이머로서 데뷔한 것은 2013년의 후반기다.

그 이전까지는 아마추어팀으로 활약했다.

즉, LCL에는 언제 한 번 반드시 나온다는 말.

그런데 LCL 스프링 시즌의 선수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LCL 서머 시즌. 고질라는 반드시 나올 거야.'

향후 떠오르게 될 서포터 선수들.

손가락에 꼽자면 고질라는 최소 세 손가락 안에는 든다.

하지만 결코 최정상급이다 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어떤 선수보다 그를 원한다.

내가 만들게 될 게임단에 있어 고질라는 가장 적절한 인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

* * *

결승전이 끝나고 벌써 2주가 흘렀다.

4월의 막바지에 이르렀건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한 남자.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씨지맥은 아직도 고민 중이다.

'프로게이머라….'

윈터 시즌에 연이어 스프링 시즌까지.

연달아 우승을 거머쥐으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탑라이너로 이름을 떨쳤다.

탑라인에 있어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기도 민망한 지경이다.

'라는 것이 세간에서의 평이지만..'

잉벤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검색해본 씨지맥은 한숨을 쉬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최고의 탑라이너라니?

프로게이머에게 있어 이보다 더 명예로운 칭호는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씨지맥은 무언가가 심히 못마땅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서머 시즌까지 3개월 남았어. 메타는 180도 변하고 이전까지의 픽은.. 아마 사용할 수 없게 되겠지.'

너무도 당연한 소리다.

불과 1개월만 흘러도 전혀 다른 게임이 돼버리는 게 로드 오브 로드다.

그런데 3개월이 흐르면 과연 어떻게 될까.

수많은 챔피언들이 너프를 당하고, 다른 수많은 챔피언들이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혹은 신규 챔피언들이 나타나 기존의 틀과 관념을 깨부순다.

한 발 더 나아가 메타 자체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시즌2 당시 천천히 파밍하며 용싸움을 바라보는 한타 메타에서, 스플릿 등의 운영이 중요시된 현재 메타로 변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프로게이머는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럼에도, 그럼에도다.

올마스터는 매 시즌 당연한 듯이 해낸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스프링 시즌은 단단히 죽을 쑤었을 게 분명했다.

감사할 따름이지만 한 편으로는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에게는 할 만큼만 하겠다고 했지만 정말 그러고는 싶지 않아.'

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흐름이지만 어디 과연 쉬울까.

'올마스터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전부터 자신에게 답을 주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현실의 올마스터,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또 한 명의 올마스터.

물음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더 이상 기대지는 않기로 했다.

타다닥.

그처럼 하나하나 생각해서 결론에 다다를 재능은 자신에겐 없다.

재능이 없다면 남은 길은 노력 뿐.

남은 4개월 동안 그 누구보다 피땀 흘려 자기 자신을 갈고 닦자.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프로게이머로서 오롯이 서보자.

격렬했던 스프링 시즌이 지나간 후 누군가에게는 한가하기 그지 없을 주말의 오후.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씨지맥은 갓 데뷔한 아마추어들 이상으로 연습에 피를 쏟았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