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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가고
방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히 정리했다.
생각이 많아져서 인지 그것만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 샤워까지 마치고 나오자 예은은 이미 거실 쇼파에서 한 캔 하시고 계셨다.
"콜?"
한 마디 묻더니 가볍게 던져온다.
아니, 그런데 맥주를 던지면 어떡하냐고.
혹시 몰라 조금만 간보듯 땄더니 역시나.
거품이 보글보글 가공할 속도로 올라온다.
"키키키키키킥! 흔들었지롱~"
"너 임마.."
흘러내리는 맥주를 혀로 열심히 핥아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 녀석이 장난을 안 쳐 놨을 리가 있나.
나는 맥주를 들고 예은의 옆에 털썩 앉았다.
"샤워 하고 마시는 맥주, 죽여주지?"
"난 누구 때문에 샤워를 다시 할 뻔했다만.."
살짝 삐진 연기를 하자 예은이 엉겨 붙어온다.
이미 시곗바늘은 10시가 지나 나와 예은 사이의 친구라는 장벽은 허물어졌다.
갓 샤워를 마친 탓에 뽀송뽀송한 애기 피부 같은 살결이 달라붙으며 나를 곤욕스럽게 만든다.
서로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는 터라 상당히 선정스러운 상황이다.
"안주, 먹을래?"
간혹 삐진 나를 달랜답시고 해오는 뻔한 유혹은..
안타깝게도 넘어가지 안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예은의 연분홍색 입술은 참으로 탐스럽다.
어지간한 마른 안주보다 수백 배는 식욕을 자극한다.
'후우.. 비누 냄새 좋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은은했던 비누향이 더욱 진하게 풍겨온다.
몰아 쉬듯 빨아들이자 살짝 흥분된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기분이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예은의 머리를 살짝쿵 박았다.
"내가 박았는데 왜 내가 아프냐.."
"나 마빡 딴딴하거든? 까불지 마라아?"
입에서 쌉싸름한 알코올 내가 풀풀 풍기는 예은이 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인다.
쇼파 위에서 예은에게 덮쳐져서 깔아 뭉개졌다.
그대로 내 품 안에 포옥 안긴다.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긴 하다만.. 남자 가슴 설레이는 시츄에이션 만드는 재주는 타고난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슬슬 팀이 갖춰지고 있다고 말했던가?"
"햇찌이~. 그보다 나한테 말없이 일 벌리면 죽는다?"
팀 구성이나 스카웃은 나한테 전적으로 맡긴다만 돈문제라던지.
특히 금전과 계약 사항이 관련된 부분은 상담 안 하면 때린단다.
뭐, 그렇게 위협 하지 않아도 물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예은의 전문 분야인 법에 저촉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스폰을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은의 아버님이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는 소린 아니다.
오히려 귀찮아질 부분을 예은이 도맡아 해결해주는 지라 많이 편하다.
"탑은 씨지맥, 정글은 너, 서포터는 아마추어 중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애가 있는데…."
깔려진 상태에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은은 이를 묵묵히 들어준다.
나는 예은의 귀에 속삭이듯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흐응.., 그러면 원딜러는?"
"그러게, 그게 문젠데.."
이렇게 되면 팀의 공석은 두 군데다.
미드와 원딜.
그 중에 원딜이 구해지는 편이 사정에 좋았겠지만 사람 인생 뜻대로 풀려줄 턱이 있을까.
현재 시장에서 원딜과 서폿 인재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사람을 넣을 수도 없고.'
너무나도 식상한 말이지만 로드 오브 로드는 팀게임이다.
팀원들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비슷해야 한다.
어느 하나가 특출난 거야 밀어주는 느낌이니 그럴 수 있지만 그 반대.
한 명이 구멍이면 전체적인 벨런스가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데 전에 말했던 걔는 어떻게 됐어?"
"야아.. 너무 달라붙지 마. 나, 힘들다."
육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힘들다.
목욕 가운 한 장만 걸친 예은이 나에게 몸을 밀착해온다.
평소에도 왕왕 대쉬를 해오는 탓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예은처럼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여자가 몸을 부비부비 해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게임방에서의 잔금이랄까.. 뭔가 고마워서."
꾸욱 체중으로 나를 누르며 한껏 기대온다.
목욕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의미.
평소라면 당연히 입고 있어야 할 속옷조차 없다는 소리다.
부드럽고 따스한 살덩이의 감촉이 다이렉트로 전해진다.
"한 마디로 서비스?"
"천박하게시리.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해줘."
당돌하기를 넘어 늠름하기까지 한 예은이지만 서투른 것 정도야 있다.
아직 연인간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듯 한 마디 내뱉은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최근에 들어 점점 귀여워지는 예은 때문에 나도 이성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졌다.
언제 한 번 절간에라도 가서 수행을 해야 할 성싶다.
'따지고 보면 별 말 아닌데도 예은이 해주면 왜이리 기쁘냐..'
평범한 연인들이라면 애교도 떨고 애정 표현도 자주 주고 받고.
그래야 하겠지만 예은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서투르다.
자존심도 세서 어지간하면 먼저 굽혀오는 일이 없다.
희소 가치가 높아서 일까?
가끔 가다 귀여운 짓 한 번 하면 장난이 아니다.
아니, 희소 가치라는 표현은 틀렸다.
정말로 내가 예은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정의 동요가 이는 것일 터다.
아마 그것이 옳다.
"걔, 언제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까톡 보내 왔더라.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지?"
"하? 내가 그 꼬맹이한테? 너 혹시 로리콘이냐?"
만에 하나도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예은도 그걸 알고 있을 테지만.
묘하게 짜증스러워 보이는 얼굴에는 꼭 그렇지 만도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는 예은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기며 진정시켰다.
정수리 톡톡 두들겨 주는 호흡에 잘 넘어간다.
"그럼.. 만약 걔가 오면 넌 어디 가는데?"
솔직하지 못한 예은의 스킨십.
내 볼을 꾸욱 잡아서 늘려온다.
예은과는 달리 탄성이 적은 내 피부는 비명을 지른다.
붙잡힌 상태 그대로 나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원딜 하면 되지 않을까? 나 나름 하는 편이고."
"데뷔이 무대애 인 데에? 그렇게 대충 결정 해도 되겠니이?"
예은이 내 볼따구를 잡은 채로 손가락을 흔들어댄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새버렸을 정도.
하지만 결코 대충 결정한 문제는 아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두 가지나 존재한다.
"알다시피 내가 원딜 좀 하잖아? 그리고 뭣보다.. 원딜러를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다."
하나는 현실적인 이유.
선수 시장에 선수가 없다.
그것도 원딜러는 눈 뜨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약간 작위적인 느낌이 있긴 해도 이상한 수준까진 아니야.'
그도 그럴 게 솔로랭크만 해도 최상위권에서 원딜러의 비율은 적다.
여기에서 정말 프로의 가능성이 있는 원딜러를 추리자면 한 줌이다.
확률적으로 봐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도 시간 남았잖아?"
"그 남은 시간 안에 구하면 전처럼 식스맨 돌리는 거고. 못 구하면 내가 때우는 거지."
예은이 나를 지긋이 노려본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눈싸움.
근데 이렇게 밀착한 거리에서 서로 체온을 교환하고 있는 와중에 눈길을 마주치는 것은 역효과다.
눈싸움을 한지 20초가 채 지나지 않아 나와 예은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핥듯이 키스를 나눴다.
"흐응.., 맥주랑은 안 어울리는데."
"안돼. 매일 마시는 건 안 좋아."
방금 예은이 눈길을 돌린 베란다의 맞은 편에는 술병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취미와 기호에 따라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갖춰져 버린 양주장.
안 쪽에는 위스키, 브랜디를 비롯한 갖가지 저렴한 가격대의 양주들이 개봉될 날 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절대로 마음대로 꺼낼 수는 없는 게 자물쇠를 달아 놨다.
열쇠는 내가 맡기로 했다.
이 녀석한테 맡겼다간 집 안에 양주병이 굴러다니게 될 테니까.
"한 잔만, 그것도 맥주 타서!"
"쇼부치지마. 오늘은 맥주로 만족해."
손날을 세워 예은의 머리를 한 대 탁 때린 나는 일어나며 맥주캔을 잡았다.
양주도 맛나긴 한다만 역시 나는 소주나 맥주가 잘 맞는다.
가성비 이전에 몸에 맞는 술이다.
"으.. 아쉬운데…."
영 만족을 못하겠는지 맥주캔을 낼름낼름 핥아댄다.
날이 갈수록 혀의 움직임이 요염해진다.
만약 예은이 나를 유혹한다면 백빵 넘어가겠지.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알코올 중독자 되겠다 이 기지배야."
"나름대로 선은 긋고 있으니.. 아마 괜찮아."
그 아마가 위험한 거다.
그래도 술의 관리를 나한테 맡긴 것도 예은이고.
유혹하면 그냥 넘어갈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안 하는 것 보면 정말 나름대로 절제 중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이번 서머 시즌에 원딜러가 가장 알맞기 때문이지.'
나는 다 마신 맥주캔을 살짝 찌그러뜨려 탁자 위에 내려두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캔을 깠다.
그러고서 알코올이 감돌게 된 머리로 찬찬히 떠올린다.
예은에게는 말 못한 두 번째 사정.
원딜러를 택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슬슬 원딜 신챔프들이 쏟아져 나올 시기기도 하고 아무래도 지금만한 타이밍이 없어.'
2012년부터 2013년 중반기까지.
의도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신챔프 중에 원딜이 없었다.
여왕 같은 예외도 있기는 했다만 기본적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중반기에 갑자기 연달아 나온다.
이 두 챔피언 모두 초반에는 평가가 엄청나게 낮았다.
이건 절대로 쓰일 수가 없는 챔피언이다.
프로들과 코치들이 SNS에서 이 챔피언에겐 일말의 희망도 찾을 수 없다며 혹시 모를 희망을 즈려밟았다.
일반 유저들 또한 당연히 게임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이들 말이 맞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야.'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두 번째 맥주캔을 홀짝이는 사이.
어느샌가 소주와 대형 유리잔을 들고 온 예은이 벌컥벌컥 따르기 시작했다.
정말 능숙한 솜씨로 소맥을 말아낸다.
"너.. 절대로 나 없는 데서 술 마시지 마라?"
"바보, 걱정 안 해도 난 혼자 마시는 타입이야."
여친이 술을 좋아하면 남친은 걱정되기 마련이다.
예은이 다소 외톨이 기질이 있어 지금까지야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나는 예은을 확 밀어 넘어뜨려 한 차례 레슬링을 한 끝에 기어코 확답을 받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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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굳이 찾아보자면 다른 대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대회는 오프게임넷 주관으로 치러진다.
LCL도 그렇고, LML도 그렇고, 그 유명한 롤챔스도 그렇고.
하지만 그렇다고 오프게임넷의 권한이 엄청나다는 소리는 아니다.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오프게임넷 본부.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업무를 처리하는 5층의 회의실.
중앙의 테이블을 둘러싸듯 앉아 있던 정장을 차려 입은 남녀 여덟 명이 일제히 일어났다.
조금 전,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속보를 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얏호오!"
"역시 말이 통하는 구만! 하기사 안 통하면 말도 안됐지!"
여덟 명의 남녀는 오프게임넷에서도 직위가 높은 이른 바 중역이다.
그들의 안색이 대놓고 밝아지며 체면을 집어던질 정도로 안건은 중요했다.
대회의 흥행과 극히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자. 게임사에서도 요구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에요. 일단 서류들 받아 보시죠."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는 듯 꽤나 두꺼운 서류들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를 손에 받아든 중역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류철을 넘겼다.
혹시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면 재고해야 할 여지가 있었으니까.
"중요 서류라기보다는 신경을 써달라, 그런 느낌인 것 같은데…."
"딱히 상관없어 보이지? 그런데 이 마지막 페이지는 대체.."
두껍다고는 하지만 앞 쪽은 형식적인 내용.
그럴 만도 하다.
자신들 오프게임넷이 요구한 내용은 대회의 시기를 각각 한 달 가량 앞당겨 달라.
다른 부분도 있기야 했지만 큰 틀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오프게임넷의 입장에 대해, 전세계의 대회를 총괄하는 로드 오브 로드의 게임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직접적인 흥행과 상관이 깊다면 허용될 수 있는 범위다.
하지만 동시에 열리는 타지역 대회를 생각해 날짜 계산에 신경 써달라고 참고 자료를 정리해서 보내왔다.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지만 이래 봬도 게임사는 한국 지역의 대회에 관심이 큰 탓일 거다.
"우리나라가 갤럭시 크래프트때부터 시작한 E-스포츠의 종주국이니 이만한 대우는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확실히 이 마지막 페이지는 납득이 안 가는데."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서류철 마지막 페이지를 손에 들어 펼쳤다.
나머지 일곱 중역의 시선이 거기에 꽂힌다.
가장 첫 문단에서 눈에 띄게 적힌 두 단어 「Unknown Error」.
유능하다고 하나, 일개 프로게이머에 지나지 않을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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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500화가 넘게 됐네요ㅎㅎ
앞으로 꾸준히 달리겠습니다!
보라색맛님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다 읽어봤어요.
근데 말씀하신 예정과는 조금 다르게 됐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