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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이 마스터다-502화 (502/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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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가고

3주일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 5월 중순.

본래라면 큰 가치를 가지지 않는 시기의 날짜다.

그랬을 텐데, 사정이 조금 많이 바뀌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앞당겨 질 줄이야.'

어찌된 영문인지 롤챔스 서머 시즌을 포함해서 모든 대회들이 대략 한 달씩 앞당겨졌다.

정확히 한 달은 아니고 조금씩 차이는 있다지만 대략 그 정도는 된다.

롤챔스가 한 달, LML이 3주, LCL이 3주.

가장 날짜가 가까웠던 LCL은 이미 시작했을 정도다.

예선이 끝마쳐지고 본선 무대가 막을 올렸다.

그리고 현재, 나는 모종의 목적이 그 LCL을 관람하러 왔다.

정확히는 LCL 본선의 32강 세 번째 경기에서 어떤 선수를 보기 위해서다.

터벅터벅.

나는 예은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용산 E-스포츠 경기장.

LCL 본선 무대는 결승전을 제외하면 이곳에서 치러진다.

"근데 정말로 맞아? 잘못 착각한 거 아니야?"

"맞다니까, 나 못 믿어?"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예은이 의아하다는 어조로 또 물어온다.

이것으로 벌써 세 번째다.

예은이 오늘 경기장의 관람 목적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왔다.

'뭐, 그럴 만도 하지만.'

목적이라 함은 일목요연.

한 마디로 선수의 스카웃이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골랐다고는 해도 허락을 맡아야 한다.

어지간하면 예은이 한 소리 안 할 테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그런데 여긴.. 군것질 거리가 별로 없네."

실망한 눈치의 예은이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없는 음식점들이 생길 리 만무하다.

상암 E-스포츠 경기장이면 모르되 여기는 이전의 역사가 묻혀 있는 곳이니까.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기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공식적으로 한국에 세워진 E-스포츠 경기장은 두 곳이다.

하나는 너무나도 유명한 상암 E-스포츠 경기장.

최대 수용 인원 1만 명인 나름대로 괜찮은 규모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곳.

용산 E-스포츠 경기장이다.

혹은 구 E-스포츠 경기장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부터 E-스포츠의 신화가 시작된 건가.'

나는 손을 내뻗어 경기장의 오래된 콘크리트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것만으로도 페인트 칠했던 부분이 토도독 떨어져 나간다.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낡디 낡은, 간신히 시설만 유지하고 있는 구식 경기장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곳은 동경의 상징과도 같은 무대였다.

상암 E-스포츠 경기장에 처음 올랐을 때도 물론 가슴이 설렜다.

전대 E-스포츠, 갤럭시 크래프트의 선수들이 내가 있던 자리에서 피튀기는 경기를 치렀다고 생각하니 사뭇 가슴이 고조되었다.

그렇지만 진짜는 역시 이곳.

정말로 까마득한,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역대급의 스타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역대급 프로게이머로서 빼놓을 수 없는 임요한 선수라던지.

현직 롤챔스의 해설자로서 푸짐하게 죽을 쑤고 있는 강빈 해설이라던지.

현재는 사용 빈도와 용도가 극히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E-스포츠의 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리는 게 예의인 E-스포츠의 성지다.

"오홍홍, 저기, 먹을 거 판다. 빨랑 가자."

곰팡이 냄새나는 옛날 이야기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한 사람.

예은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나를 잡아당긴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위치에는 가벼운 인스턴트 식품을 팔고 있었다.

편의점을 겸한 가게였다.

'하기야 관중 수가 적은 것도 아닌데 기본적인 편의점은 있겠지.'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였는데 잘도 찾아냈다.

이 녀석 은근히 개코다.

음식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는 건 좋은데 조신히 행동해라?"

"호호, 나처럼 조신한 여자가 어딨다고? 모자만 푹 눌러 쓰면 문제 없다니까~?"

나도 예은도 상당히 이슈거리에 올라와 있는 상태다.

한 달 가까이 지난 탓에 조금은 수그러들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선글라스에 모자라는 정말 흔하디 흔한 눈 가리고 아웅.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괜찮다?

연예인들이 괜히 그러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반증이라도 하듯 주위의 시선이 거슬리지 않는다.

"적당히 담아. 알바생 놀라서 까무러치겠다."

"다 방법이 있거든? 넌 들고서 따라오기나 해."

내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 온갖 과자, 음료수, 즉석식품 가리지 않고 담아댄다.

이 광경이 익숙하디 익숙한 나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인데 처음 보는 사람은 오죽할까.

배가 쏙 들어간 예은의 몸매에 이만한 먹거리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난 아직도 못 믿겠다.

'그러고 보면 푸드 파이터 중에 마른 사람들이 많더라.'

이 녀석도 비슷한 논리로 잘 먹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납득이 영 안 가는 건 아니다.

물건 파는 편의점 알바생 시선에 연연할 만한 성격도 아닐 테니 더더욱.

그런데 후자에 있어서 예은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오빠, 이렇게 많이 사면 살 찌잖아. 으이구.., 특별히 오늘만이다?"

너무 얼척이 없어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먹는 것 마냥 말을 늘여 놓은 예은이 자기 지갑을 열어 카드로 결제까지 하신다.

먹는 사람이 결제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알바생의 시선.

알바생이 보기에 나는 여친 돈으로 군것질이나 하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놈팽이!

그리고 예은은 그런 놈팽이도 이해해주는 참한 여친이다.

눈뜨고 코 베인다는 속담이 여기에 걸맞다.

"너.. 나 너무 이용해 먹지 마라?"

"어차피 말 안 해도 네가 먹는다고 생각해. 자, 가자. 늦겠다."

머리도 영악한 게 힘은 또 어찌나 억척같은지 체중이 1.5배는 되는 나를 질질 끌어 데리고 간다.

뭐, 예은의 말마따나 곧 경기가 시작된다.

서둘러서 경기장 안에 들어가야 북적임을 피할 수 있다.

'딱히 손해본 것은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빠 라는 두 글자.

뭇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마법 같은 한 마디다.

개인적으로 예은에게 정말로 듣고 싶은 호칭이다.

현재 시점으로 보자면 나와 예은은 한 살 차이다.

예은이 빠른 이라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동갑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내 진짜 나이는 올해로 스물 여덟.

게임만 하고 산 탓에 어수룩한 면이 없지 않기는 해도 일단은 연상이다.

이 나이쯤 되는 남자들은 오빠라는 말에 껌뻑 죽는다.

나이 탓이지, 내 잘못은 결코 아니다.

기분 좋게 속아주고 들어가는 경기장의 안.

그 내부에는 10년 넘게 흐른 세월이 거짓말처럼 후끈한 열기가 넘친다.

관중들의 에너지가 따끔하게 전해져 왔다.

.

.

.

* * *

만년 프로게이머 지망생 강용헌.

사실 만년이라 한탄하기에는 이른 시기지만 주어진 상황이 그러하다.

비슷하게 프로게이머를 목표하던 지인들은 전부 어떻게든 됐다.

'꼭 좋은 쪽으로만 된 건 아니지만..'

정말로 프로게이머가 됐던가, 포기하고 현실 게이트를 탔던가.

자신도 어느 쪽이든 슬슬 결정할 시기가 온 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강용헌은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굳세게 움켜 쥐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이 걸리게 될지 모를 경기가 진행 중이다.

로드 오브 로드 챌린저스 리그, 아마추어 대회의 본선 무대다.

"야, 이니시 건다? 건다?"

게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중반.

4.5 대 5.5로 살짝 불리하지만 한타의 향방에 따라 승패가 갈릴 분위기다.

그러한 상황에서 팀의 탑라이너가 조급한 듯 이니시를 외쳐왔다.

이에 강용헌이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며 저지하려 했다.

"우리 딱히 돌진 조합도 아닌데 이니시 거는 것보단 잡아먹는 게 낫지 않을까?"

강용헌은 솔직하게 한타를 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 자신이 플레이하고 있는 챔피언은 한나.

한나는 라인전 잘 버티기로 유명한 무난하기 그지없는 서포터다.

뭐,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딜도 별로 안 좋고 너무 수동적이다.

그렇게 낮은 평가를 받긴 해도 자신은 이 한나에 남다른 애착과 자신이 있었다.

방생류 스킬이라 저평가 받는 궁극기 활용에 있어 특히나 숙련도가 높았다.

"불리하니까 걸어서 역전각을 봐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사리기만 할 건데. 쟤네가 우리 유리할 때 걸어줄 리도 없고. 이견 없으면 각 보일 때 건다?"

한사코 반대했건만 과반수라는 민주주의 절대 원칙.

강용헌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한타 페이즈에 접어들었다.

우워어어어!

고함을 외치며 달려간 콜라곰이 점멸 뒤집기로 상대 원딜러 배인을 넘겨버렸다.

이에 팀의 탑라이너인 말화이트가 점멸 궁극기로 호응했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성공적.

문제는 배인이 벌써 금은 장식 머리띠가 갖춰져 있다는 오산이었다.

데구르, 챵!

챵! 타앙!

반응이 느렸으면 그나마 할 만했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빠르게 금은 장식 머리띠로 에어본 효과를 해제하고 점멸.

구르기와 점멸을 통해 거리를 벌리며 카이팅을 시작한다.

강용헌을 포함한 세 명의 아군이 빠르게 달려갔지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말화이트와 콜라곰이 탬템을 둘둘 둘렀으면 뭐하나?

탱커 잘 잡기로 이름난 것이 배인이다.

그런데 그 배인을 물 스킬들이 전부 빠졌다.

'이렇게 들어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실드밖에 없는데….'

한나라는 챔피언은 지극히 수동적이다.

때문에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낮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타 구도의 문제.

적어도 강용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들 쪽에서 이니시를 거는 그림을 반대했건만 기어코 일이 벌어졌다.

한 명, 한 명 마무리 되어가는 그림.

궁극기와 회오리로 원딜러 한 명 겨우 살려 내빼는 게 고작이었다.

"아, 망했다. 배인 순삭을 했어야 그나마 승산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잘했어. 아마 이렇게라도 안 싸웠으면 평생 답 없었을 거야."

"이번 판은 적팀이 던져주는 거 노려보고 안되면 두 번째 세트부터 제대로 해보자."

한타가 대패했음에도, 바론까지 나갔음에도 팀원들끼리 싸우지 않는 것 자체는 좋다.

아마추어 팀의 경우 이렇게 한 번 말리면 중구난방 이야기가 불거지다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한 경험을 수 차례 겪어본 강용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다른 감정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조금.. 답답하네….'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수많은 아마추어 팀들과 발을 맞춰봤지만 결과는 늘 한결 같았다.

어쨌든 자신이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스타일에 적응해야 한다.

아무리 해도 그게 안 맞아서 문제지.

"와, 이거 못 막겠다. 게임 끝나고 바로 피드백 주고 받아야 하니 다들 하나씩은 생각해놔?"

"아깝다~! 중반 한타에서 배인만 따냈어도 기적같은 역전각을 그릴 수 있었는데."

안 그래도 4.5 대 5.5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한타까지 크게 말리니 게임의 흐름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채 40분이 되기도 전에 강용헌의 팀은 넥서스를 내주며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적어도 오늘 경기는 이겨야 하는데.. 최소한 내가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강용헌은 마음이 달아올랐다.

프로로 데뷔하고 싶은 마음이야 그 누구도 한결 같겠지만 오늘만은 특별했다.

며칠 전, 자신에게 스카웃 제의가 왔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어중이떠중이 게임단이라 할 지라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의해온 사람이 무려 올마스터.

해외에서 하나의 전설을 찍고 돌아와 국내까지 평정했다는 프로게이머다.

혹시 착각이 아닐까 전화 통화를 마쳤지만 정말로 그가 맞았다.

스프링 시즌의 MVP 인터뷰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그의 목소리다.

그리고 오늘, 경기장에 무려 올마스터가 온다고 들었다.

직접 보고 판단을 하겠다며 이야기를 해왔다.

모르긴 몰라도 수백 명의 관중 사이에 그가 앉아있다.

참으로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는데.

'……물 건너 갔구나.'

첫 번째 세트를 완전히 말아먹었다.

그냥 진 것 뿐만이 아니라 한타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이게 정상이다.

'나한테 그런 기회가 올 리가 없지.'

그저 다른 선수들을 살필 겸 겸사겸사 제의를 해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마…. 포기하면, 편해.」

어떤 농구 게임단의 감독이 말했던 명언을 되새기자 마음이 정말로 편안해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자.'

굳은 마음을 먹은 강용헌은 두 번째 세트에 임했다.

고르고 고른 챔피언은 역시 자신의 18번, 한나였다.

.

.

.

* * *

한국의 아마추어 리그, LCL 본선 32강의 세 번째 경기.

팀 사우르스 대 팀 몬스터즈의 접전.

첫 번째 세트의 승패가 방금 결정됐다.

곧 두 번째 세트가 시작하려는 모양이지만 나는 이미 볼장다본 상태다.

'역시 이렇게 되나.'

점찍어두었던 아마추어 서포터 선수.

고질라가 속한 팀 몬스터즈가 고작 32강에서 속수무책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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