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
봄이 지나가고
아마추어 후배들을 응원하는 대인배.
올마스터의 LCL 출현 사건은 그렇게 회자됐다.
하지만 특정 부류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져왔다.
[LCL까지 직접 행차하시고.. 사람이 없기는 한 모양이야?]
어느 까메오톡의 단톡방 안이다.
한 명이 그렇게 비웃듯 이죽이자 단톡방에 속해있던 나머지 멤버들도 동조한다.
정말로 이는, 실소가 절로 지어질 만한 이야기였다.
[그렇겠지. 선수 시장에 선수가 없다, 그런 말이 나오기는 하다만 그래도 뒤져보면 한 명은 있어야 하는데.]
[막 스프링 시즌도 끝났고 그리 생각할 만도 해.]
단톡방이라고는 하지만 별건 아니다.
그저 각 게임단의 감독들이 예의상 속해있을 뿐.
본래라면 간간히 친목 위주의 잡담이 오가는 것 이외에는 불이 꺼져 있는 장소다.
그랬을 텐데 최근에는 이야기의 빈도수가 많이 늘었다.
바로 올마스터에 대한 화두가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자네들 그거 아나? 내가 이번에 연습생을 둘 들였는데 말이야. 팀 사우르스라고 LCL 16강에 진출한 팀의 원딜과 서폿이지.]
[하아? 거기까지 해버린 건가? 정말 귀축이구만 크큭.]
순식간에 단톡방을 가득 메우는 웃음 소리.
정말 웃기게 흘러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팀 사우르스는 얼마전 아마추어 리그, LCL 32강에서 승리한 팀이다.
이제 겨우 16강에 진출했다.
우승후보냐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
준결승에 진출하면 박수가 나올 만한 애매한 수준이다.
물론 최근 선수들이 귀한 탓에 준결승만 가도 어지간하면 스카웃 제의가 뿌려진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직 실력이 전부 증명되지 않은 이들을 벌써?
김칫국도 이 정도 마시면 푼수다.
[팀 사우르스.. 올마스터가 관람했다는 날 경기를 치른 팀이었나? 설마 그런 팀의 성장을 기대한 거면 안목이 형편없구만.]
[그래서 연습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정말로 우리도 2팀을 만들려고 기획 중이라고.]
쓰잘데기 없다.
별 생각없이 내용을 쭉 훑어본다면 그리 착각할 수도 있는 잡담들이다.
하지만 시기와 뒷사정을 곱씹어 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만에 하나 유출이라도 된다면 잉벤의 화제글이 뜨겁게 달아오르리라.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올마스터를 견제하고 있다.
그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불순한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다.
[2팀이라, 2팀 좋지. 사실 우리도 생각해두고 있었는데.. 이번 LCL, 수준도 높고 선수들을 알아봐야겠어?]
[여기 있는 감독들이 하나씩만 알아봐도 이번 LCL에는 건질만한 선수가 없을 텐데 말이야. 자네들도 참 악독해.]
나무를 숨기려면 숲 속에 숨기라고 했던가.
LCL 아마추어들의 스카웃 이야기로 덮어버리자 이리도 자연스럽다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폭로한다 한들 트집 잡힐 염려가 없다.
그들 하나하나가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감독 자리까지 올라온 이들이다.
뱃속에 능구렁이 한 마리 정도야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LCL을 넘긴다.
LCL이 끝난 이후에는 LML이 다가온다.
로드 오브 로드 마스터즈 리그.
1부 리그 직하의 2부 리그에서 시드권을 둔 쟁탈전이 벌어진다.
.
.
.
* * *
어제 예은과 손 잡은 채 경기장을 전력 질주했다.
딱히 도망갈 만큼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귀찮아질 것 같았달까.
적당히 호응도 했으니 거기서 물러나는 게 타이밍이 알맞아 보였다.
다시 생각해봐도 썩 괜찮은 판단이었다.
'벌집 건드린 꼴이었으니 후다닥 튀는 게 상책이었지.'
혼자였으면 모르되 예은이 함께 있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사귀게 된 이후로는 더욱 더 신경 쓰게 됐다.
주위 남자들의 시선이 예은에게 닿는 것이 어지간히 꺼려진다.
'이 녀석은 오히려 점점 괜찮아지는 모양이지만.'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이나마 풀어져 나간다.
외출 좀 했다고 짜증 덩어리가 되어 오는 일은 이제 없다.
가시적인 성과로 은근히 얇게 입기 시작했다.
따듯해지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슬슬 이실직고 하지?"
"..정말 별거 아니라니까."
쇼파에 다소곳 앉은 예은이 고개를 휙 돌리며 내 눈동자를 피한다.
별거 아니긴 개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지 어제부터 이 모양이다.
"그보다.. 결정했어? 누굴 데려올 지?"
"글쎄, 나로서는 네가 찬성해주지 않으면 결정까지야 못하지."
이야기를 돌려오는 솜씨가 제법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포기하기 힘들다.
어제 LCL에 직관까지 가서 살폈던 선수.
미흡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만족이었다.
내가 생각해준 플레이를 정확히 해내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그 말고 달리 알아볼 만한 선수가 있었던가?
"LCL에서 뽑자면 다른 잘 나가는 팀들도 있잖아? 혹시 돈이 문제?"
기존 게임단들과 영입 다툼을 벌인다.
나라고 그 방법을 고려하지 않은 게 아니다.
자금력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도 부족하지 않으니까.
혹시 눈치가 보이는 거면 사양하지 말라는 예은의 의사 표현이다.
'돈을 써서 그만한 선수를 구할 수 있다. 그런 거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만 없으니까 문제지.'
이번 LCL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한 번씩 쭉 둘러봤다.
마음이 혹할 만한 이는 아쉽게도 없었다.
차후 그럭저럭한 수준까지 성장하는 선수는 두엇 엿보였지만 눈에 차는 수준은 아니었다.
가장 메리트가 있는 선수는 어제자 직관에서 보았던 고질라 정도.
예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직접 만나보자. 뭣하면 손발도 한 번 맞춰보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예은이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녀석이 왜 자꾸 극강하게 반대를 해오는 건지.
단순히 실력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직접 대면을 하고 나서야 숨겨진 뒷사정을 알 수 있었다.
.
.
.
* * *
나흘 후의 토요일 점심.
나는 예은과 함께 고급스런 일식집에 왔다.
뭐, 데이트 겸해서 이런 레스토랑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오늘은 목적이 다르다.
"식사는 마끼와 알밥 중에 어느 걸로 하시겠습니까?"
여닫이 문을 드르르 열고 온 여종업원이 나지막하게 물어온다.
길고 길었던 코스 요리도 마지막 단계에 올랐다.
사실상 식사는 거의 끝난 셈인데.. 이야기는 제대로 진도조차 나가지 않았다.
내 옆에서 표정을 굳힌 채 깨작깨작 연어 샐러드를 씹고 있는 예은 때문이다.
"알밥으로 네 개 주세요. 이럴 땐 역시 통일하는 게 낫잖아? 하하."
혹시 몰라 외부가 아닌 방 하나를 예약잡은 게 다행이다.
이 썰렁하디 썰렁한 내부 온도가 바깥으로 세어 나간다면 어지간히 뻘쭘하리라.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식사 메뉴를 빠르게 정했다.
앞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메뉴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끝끝내 불만을 표시하는 한 사람.
예은이 토를 달아왔다.
"난 마끼 먹을래."
"..너 마끼 안 좋아하잖아. 자꾸 이럴래?"
"흥, 오늘은 마끼 먹고 싶은 기분이거든~."
이 녀석 아까부터 유치하게 왜 이러는 건지.
방 안에 들어오고부터 쭈욱 이 모양 이 꼴이다.
"알밥 세 개에 마끼 하나. 예, 주문 받았습니다. 맛있는 식사되십시오."
토라진 듯한 예은의 목소리도 대수롭지 않은 듯 여종업원이 고개를 주억인 후 방의 문을 닫고 나갔다.
방의 문이 사르르 느리게 닫히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친분 때문에 많이 힘드시겠어요, 호호.'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통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어쨌든 간에 늦게라도 슬슬 본론을 시작할 때다.
"님아. 알밥이란 거 비빔밥 비슷한 거 아님?"
"아니니까 닥치고 쳐먹으렴…."
내 앞에 있는 두 사람 중 하나가 채팅체로 물어온다.
본격적인 알밥은 다소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코스 요리의 마지막으로 나오는 알밥은 구색만 갖췄다.
혹시 배 안 찬 사람 한 술 뜨라고 나오는 정도다.
아니, 그 전에 요 녀석 비빔밥 아직까지도 싫어하네.
"너네가 내 트라우마 스위치 자극했잖아 빼애애애애액!"
도슈, 이제는 이초홍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꼬맹이가 나의 잠자고 있는 가학심을 자극해온다.
평소의 내가 얼마나 사근사근하고 인상 구기는 일이 없는 젠틀한 사람이데 왜 일까..
요 녀석만 보면 그냥 사사건건 때리고 싶다.
나는 생선죽을 먹었던 숟가락을 한 번 쪼옥 빨았다.
"빼애애애액!! 먹던 숟가락으로 때리는 게 어딨으셈!"
"안 먹던 숟가락으로 맞으면 덜 아플 것 같니?"
밥 먹다 숟가락으로 맞아본 적이 있는가?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며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맞아본 적 있는 사람들은 성인이 된 이후로도 기억에 남은 경우가 많다.
그 정도로 트라우마가 남을 수 있는 일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 한 획 제대로 그어준 셈이다.
물론 장난이고 툭 건든 정도로 세게 때린 건 아니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팀은 지금 네 명에 탑라이너로 씨지맥이야. 이 자리에는 개인사정으로 못 나왔다만."
초홍때문에 일어난 짜증을 차분히 식히며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원래 사이 안 좋은 사람들도 같이 밥 먹으면 조금은 친밀감이 생긴다고, 이야기를 늦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싶다.
이 자리에 있는 나와 예은을 제외한 두 사람.
도슈, 그리고 고질라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계약 내용은 전화로 말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기 한 번 살펴 보고."
A4용지 다섯 장 내외로 정리한 서류 뭉치 두 묶음.
도슈와 고질라에게 각각 하나씩 나눠줬다.
한 명은 이게 뭐셈? 하는 표정으로 대충 보다 말고.
다른 한 명은 진지한 표정으로 약관을 하나하나 둘러본다.
기다려주기를 십여 분.
그 사이에 이미 식사가 나와 고질라를 제외한 두 사람은 전부 비웠다.
예은은 안 먹겠다더니 내 알밥까지 뺏어 먹었을 정도다.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10분 사이에 전부 살펴보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해가 간 듯, 서류 뭉치를 바닥에 내려놓은 고질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딱히 파격적인 조건은 넣지 않았을 텐데 무엇이?
고질라가 의아했던 건 보다 근본적인 부분이었다.
"혹시 몰라 살펴봤지만 연습생이 아닌 주전인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라면 어째서 저를..?"
계약이란 선수의 가치를 금전으로 매기는 자리다.
그런 만큼 선수 본인도 자기 자신에 대한 피력에 열심이어야 한다.
그래야 할 텐데 지금의 상황은 정반대.
어째서 자신을 스카웃 하려는 건지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내 옆자리의 예은이 인상을 구기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찾아보자면 더 나은 실력을 가진 선수가 분명 있을 거다.
어째서 LCL에서 성적도 그다지 않은 고질라를 고집하려는 건가?
예은의 입이 대빨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요약을 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팀에 당신의 스타일이 가장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를 해주신다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여기에 과연 어울리는 사람일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팀의 멤버진이 조금 화려하긴 하다.
나와 예은, 그리고 씨지맥까지.
세 명 전부 탑클래스로 취급받는 프로게이머다.
도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거다.
과연 자신이 여기에 끼어도 될 사람인가?
고질라가 던지는 의문은 지당하다.
설사 그가 차후에 탑클래스 서포터로 손꼽히게 될 선수라도 지금은 아니니까.
'경력이 없는 현재는 그저 그런 일개 아마추어에 불과해.'
내가 스카웃하려는 건 현재 시점의 고질라다.
경력이 쌓여 재능이 개화한 미래의 고질라와는 명백하게 기량이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확신한다.
"저는 당신이 가진 향후의 가치를 본 겁니다. 만약 저의 눈을 믿는다면 따라오시면 됩니다. 선택은 맡기겠습니다."
현재가 아닌 미래의 가치.
어설픈 설득이나 증명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그 두 마디를 들은 고질라의 낯빛이 환해진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러하다.
내가 지금 당장은 조금 그래도 대기만성형일 것이다.
로드 오브 로드의 프로게이머들을 지망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믿는다.
사실 나도 넓은 챔프폭 하나 믿고 그러한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다.
'실상은 조금 다르지만.'
당장 두 달 후에 대회를 치러야 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느긋하게 선수를 키울 시간도, 생각도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당장의 설득.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납득시키기에 이만한 둘러대기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