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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이 마스터다-507화 (507/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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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가고

그저 별 의미 없이 시간을 떼울 속셈이었다.

그리고 결승전 정도는 봐두는 게 괜찮다는 생각.

가벼운 마음으로 TV를 켰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로 아차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맞아.'

같은 챔피언을 해도 선수마다 플레이 스타일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순히 플레이만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입롤에 가깝다.

아니, 누구인지 아니고 이전에 어느 티어인지조차 맞추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선수가 내가 아는 그가 맞다고 확신하고 있다.

'시프트…. 이 정도로 과감하고 깔끔한 플레이를 해내는 원딜러는 몇 없어.'

원딜러는 흔히 말하는 재능빨을 가장 타는 라인이다.

몸이 종잇장과 다를 바 없기 때문.

가진 바 화력을 백분 살리기 위해서는 피지컬이 필수불가결이다.

물론, 거눙을 대신해 얼밤에 들어간 원딜러 유니버스처럼 묻어가는 스타일도 있다.

혹은 로크도그처럼 자신이 주도적으로 오더를 하려는 원딜러도 존재한다.

안타까운 현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그들은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부족한 피지컬을 보충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피지컬이라는 벽에 부딪히고 만다.

'뭐, 나도 남 얘기는 아니지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저 시프트란 선수는 탑클래스의 피지컬을 보유한 선수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비슷한 수준의 피지컬을 보유한 선수는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여기에 결정적인 근거가 한 가지.

"바보야, 저런 애를 데리고 왔어야지. 으이구, 잘난 척 하더니 꼴 좋다."

"볼따구 떨어지겠어.. 글구 내가 챙겨본 경기는 32강 뿐이란 말이야. 그때에는 쟤가 저렇게 잘하지도 않았다고."

말대꾸를 하는 셈이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딜러 시프트.

그의 약점이라 대두되는 부분이 바로 초반 라인전이다.

실제로 내가 보았던 32강 경기에서 그는 별 볼 일 없었다.

내가 잘못봤다기 보다는 사정이 꼬였다.

라인전 단계에서 말려버리자 게임내내 존재감이 떨어졌다.

하지만 팀원들이 잘해서 게임은 이겼고 그래서 나는 원딜러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아이디가 지벡.. 시프트가 아마추어 시절에 저런 아이디를 썼던 건가.'

미래의 상황을 알고 있다고는 하나, 풀숲위키 마냥 하나하나 외우고 다니진 않는다.

기억하고 있는 얼굴상도 몇 년 후의 것이니 어지간히 특징적이지 않는 한 딱 보고 알아 채기는 힘들다.

이러한 변명으로 인해 시프트의 스카웃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탈리반에 이어서 네네톤! 연계 기가 막혔습니다만..! 안 죽습니다. 얼음 장갑 때문에 단단해서 아슬아슬 살아 돌아갔어요.>

<바야흐로 반격의 서막이죠! 영락검 쭉 빨면서 카이팅! 카이팅! 얼음 장판 때문에 도망도 못 갑니다!>

강빈 해설의 조냐 상태가 풀리며 봇물 터지듯 해설이 쏟아져 나온다.

최근 들어 강빈 해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는 보여 다행이다.

다행인 일이지만 지금의 내 상황은 결코 다행이지 않다.

"지금이라도 넣어보자. 우리 원딜 필요하다며?"

"경쟁이 엄청 빡셀 텐데.. 한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을 걸."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치자 예은이 등짝 스매시를 날려온다.

요즘 따라 왜캐 나를 갈궈대냐.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하지만 예은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바보, 돈 걱정은 말고.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현재 게임단의 운영비는 100%는 예은 아버님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나중에 스폰 효과를 고려한다면 손해보는 장사라고 만은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사업, 비즈니스의 한 갈래로 나에게 투자를 한 것이니까.

그만큼 성적으로 보답하면 되는 일이다.

선의를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먹은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러자 예은이 장난스럽게 대꾸해왔다.

"뭣하면 미인계로?"

"..너 요즘 일부러 이러지, 일부러?"

두 손으로 예은의 볼따구를 쭈욱 늘이며 아픔을 돌려줬다.

나와 달리 탄력이 좋아서 인지 이 정도 늘려도 별로 안 아픈 거 같다.

대신에 꿀밤을 한 대 콩 때려주며 주의를 줬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으이구, 우리 현이 질투해쪄여?"

어디서 배워온 건지 몰라도 말 끝에 콧소리 애교를 붙여온다.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예은의 모습도 삶의 보람 중 하나가 됐다.

나는 예은의 머리칼을 격하게 쓰담쓰담해서 장난을 돌려준 후 TV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파랑 이즈의 하드 캐리! 팀 키보드가 경기의 승리를, 우승컵을 가져 갑니다~~!!>

<원딜계의 올마스터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습니다. 그 정도로 성장이 기대되는 선수에요. 박수 갈채로 환호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은과 투닥투닥 거리던 사이에 경기가 마무리됐다.

잘 성장한 파랑 이즈가 한타를 캐리하는 그림.

사실 이는 생각 이상으로 쉽지가 않다.

파랑 이즈가 마법 화살 뾱뾱 쏴재끼는 게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게임 하면 딜량, 안 나온다.

평타를 주구장창 두들기며 패시브의 공속 버프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판정 좋은 비전 점프를 활용해 생존을 도모, 킬각도 기가 막히게 캐치해야 하다.

이 중 하나만 못해도 파랑 이즈는 존재감이 급 떨어진다.

평타를 꾸준하게 안 치면 탱커 절대 못 잡는다.

그렇다고 앞라인을 싸움을 하면 파랑 이즈의 딜링이 일반 원딜보다 무조건 밀린다.

즉, 생존기를 활용해서 어그로를 끌면서 순간적인 앞비전으로 적 딜러 한 명을 녹여버리는 그림.

그런 상황을 원딜러가 주도적으로 그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시프트는 그게 가능한 선수야.'

차후에야 새로운 특성과 아이템 덕분에 조금은 편해진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수월해진 덕도 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비록 아마추어 리그에서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플레이를 실현하다니.

시프트의 기량이 보통 높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원딜러로 시프트를 영입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탄탄대로일 수 없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다가오는 서머 시즌의 우승이 문제가 아니다.

롤드컵까지 고속도로가 한 번에 뚫려버린다.

물론 그 뛰어난 실력 만큼이나 알갱이가 크다.

팀에 녹아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테지만.

'그건 어떻게든 해보는 거고 중요한 건 그를 영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겠지.'

우리 예은 마님이 능력 빵빵하신 덕분에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지도 모르겠다.

체크를 게을리 했던 나의 실수를 예은이 커버해줬다.

생각한 대로 풀려준다면 베스트.

아니여도 일단 팀의 구색은 갖춘 상황이니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시프트의 답신을 기다리기로 했다.

.

.

* * *

답신이 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승전이 끝나고부터 이틀 후.

새로이 잡게 된 숙소에 요구했던 짐들이 풀렸다고 이삿짐 센터로부터 연락이 온 다음 날의 아침이었다.

시프트 시프트 선수 본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저희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이 있나요? 가능하다면 삼자대면을 하고 싶은데요.. 그러는 편이 시프트 선수도 조금 더 좋은 대우를 골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어투가 또박또박 흘러 나올 정도로 상황은 의아했다.

우리 측에서는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이보다 더 시프트 선수에게 투자할 게임단이 과연 있을까?

있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는 사항을 덧붙였다.

그럴 텐데도 우리와 계약을 하기 힘들게 됐다며 시프트 선수 본인이 아쉬움을 토로해왔다.

<저도.. 올마스터형 팬이라 정말 들어가고 싶었는데요. 그게.. 저희 어머니가 삼선 쪽 계약하자고 확 말을 끊어버려서 어쩔 수가 없어요..>

통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현재 나이가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는 시프트는 아직 변성기가 채 끝나지 않은 듯 가느다랳다.

나의 팬이라는 사실은 기쁜 일이지만 솔직히 의문이 가는 일이다.

시프트 선수 본인이 결정했다면 계약 조건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았을 수 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직 여러 부분에서 미숙할 테니까.

하지만 보호자인 어머님이 차곡차곡 따져보셨다면 대충 넘겼을 리는 없었을 텐데.

<저희 어머니가 삼선이라고 하니 껌뻑 죽으셔서.. 뭐라 말을 해도 듣지를 않으세요.>

취직하기만 하면 소 한 마리 잡는다는 바로 그 대기업 삼선!

감나무 아래 이씨 아들이 출세를 했데 그려~!

시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잔치를 연다.

그러한 풍문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한국 사회에 삼선은 큰 의미를 가진다.

도시도 시골 만큼은 아니지만 아들내미, 딸내미가 삼선 들어가면 부모님들 어깨가 쫘악 펴진다.

물론 그 삼선이랑, 삼선 게임단은 같은 계열사 소속일 뿐 아무런 상관이 없고 철밥통도 아니다.

프로게이머들의 이적은 정말 흔하디 흔하다.

사실이 그렇다 한들, 부모님들이 철썩 같이 믿는다면 설득할 방도가 없는 것도 다분 이해가 된다.

'아, 이 시절의 시프트는 급식충이었지.'

소환자의 전장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급식충은 급식충!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부모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계약에 있어 미성년자 프로게이머는 부모님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땅꼬맹이 초홍이가 그렇게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해버렸다고 하니 어떻게 설득 또한 불가능하다.

"뭐, 그렇게 됐단다."

"으이구, 진작 좀 강하게 나가지 그랬어.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으니 퍼뜩 와서 짐이나 옮겨."

아침댓바람부터 따박따박한 잔소리가 귀를 찌른다.

잔소리만이라면 목소리가 귀여우니 들을 만하지만 무릎으로 내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간다.

날이 갈수록 성추행이 심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어쨌든.

예은의 두 손에는 짐보따리가 한아름씩 들려 있었다.

"무거울 거 같은데 내가 들까?"

"이 정돈 문제 없거든? 진짜 무거운 건 저 쪽에 있으니까 군말 말고 들고 오기나 하셔."

고개를 돌려 예은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니 딱 봐도 무거울 듯한 박스가 눈에 뗬다.

직접 들어보니 이거 최소 40KG.

안에 대체 뭘 넣은 건지는 몰라도 쌀 한 포대 수준의 무게다.

장갑을 끼고 들었는데도 허리가 휘청인다.

'우와, 드디어 이사를 간다는 실감이 나네.'

엄밀히 따지자면 이사는 아니지만 살림살이를 좀 옮길 일이 생겼다.

이틀 전, 예은을 통해 임대를 계약했던 숙소.

미리 주문해 놓은 게임 장비와 생활 도구 등을 전부 옮겨 놨다고 이삿짐 센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제 남은 일은 청소 좀 하고 각자 개인짐 풀어놓는 것 뿐.

게임단으로 슬슬 제대로 된 활동을 할 때가 도래했다.

무척이나 가슴이 고무되는 일이다.

쿠웅!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해 차까지 겨우겨우 도달해서 차 트렁크에 짐을 내려놓았다.

정말 어지간히 무거웠다.

남자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허리 나갈 뻔했다.

내 생에 군대 이후로 이런 거  또 들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럴 거면 이삿짐 센터에 맡기던가.

"내 개인 짐들이란 말이야. 어쨌든 수고했어."

"개인 짐이 아니라 술병이겠지. 너, 숙소 가서도 집에서처럼 그러면 곤란한 거 알지?"

이렇게 예쁜 가시내가 술을 리터 채로 들이부으면 남성 팀원들이 여성불신에 평생 시달릴 지도 모른다.

뭐, 농담이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디 가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내가 용납 못한다.

그리고 너무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것도 금지다.

"이거 도수 없는 안경인데 선물이야."

"으엑, 센스 꽝인데. 내가 이런 걸 왜 껴?"

정말 두껍고 큼지막한 뿔테 안경.

예은이 혀를 우엑 내밀며 질겁했다는 표정으로 손사레를 쳐온다.

이래 봬도 패션 센스에 대해서는 꽤나 까다로운 예은이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써야 한다.

"잔말 말고 써줘. 초홍이기도 있긴 하지만 합숙하면 남자들도 있잖아."

"히히히, 질투난다 이거지? 좋아, 기분이다. 써줄게!"

그 센스 없는 뿔테 안경으로 예은의 외모가 조금은 가려지길 바랬다.

하지만 막상 쓰여보니 이건 또 이거대로 귀엽다.

공부 잘하고 참한 도서관에서나 볼 법한 여대생 느낌.

그러고 보면 얘 여대생이기도 하지.

딱히 어리다는 느낌이 안 나서 깜빡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도 양 갈래로 땋고 다녀."

"너 진짜 쪼잔하다.. 뭐, 질투해주는 건 싫지 않지만."

대신 머리 땋는 것은 귀찮으니 해달란다.

내심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이 머리카락을 맡긴다는 것은 남성에게 보내는 최고의 신뢰다.

나는 최대한 촌스러운 느낌으로 예은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땋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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