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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L
서울 강북구 방면에 자리 잡은 신세상 게임단의 합숙소.
나는 연습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커피를 마시며 회상했다.
어제 8강 경기를 손 쉽게 따냄으로서 준결승전의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간의 노력은 섭섭하지 않게 보상받은 셈이다.
'경기 준비하랴, 호흡 맞추랴, 두 왈가닥 가시내 성질 들어주랴 등골 빠지는 줄 알았다만.. 잘 풀려서 다행이야.'
결과적으로 쉽게 풀렸다고는 하지만 상대로 만났던 프로팀들은 만만치 않았다.
비록 2군에 잔류하고 있긴 하나 그들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다.
급조된 우리팀보다는 팀워크면에서 한 수 위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느 팀도 장기전으로 갔다면 패배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뭐, 두 가시내가 기를 쓰고 깽판을 치는데 후반에 갈 일이 있겠냐만은.'
팀워크의 단점을 딛고도 압도적인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이유.
다름아닌 개인 기량의 차이라는 사실은 두 말해서야 입만 아프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농구가 가장 적절하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팀은 당연 무시할 수 없다.
어지간한 에이스라도 혼자서는 돌파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에이스가 한 명일 때의 이야기.
만약 상대팀 한 명, 한 명이 전부 에이스라면 어떨까?
어떻게 기를 쓰고 발악해도 대인 마크가 전혀 안된다.
심지어 혼자서 다섯 명을 물 흐르듯 지나쳐 덩크 슛을 꽂아 넣는 슈퍼 에이스까지 있다면?
즉, 개개인의 기량이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 상황에선 팀워크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지난 32강부터 준결승전까지 지나왔던 경기는 대략 그러한 양상을 띄었다.
"하지만 준결승전부터 상대할 팀은 고만고만하지 않아 보이는데 코치는 생각하시고 계신 바가 있나요?"
팀워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겠느냐?
나는 고개를 돌려 서류 뭉치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이청호 코치를 향해 물었다.
사실 정답을 알고 하는 질문이다.
정확히는 내 마음속 테스트에 가깝다.
이청호 코치가 어느 정도의 기량을 가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글쎄요, 저는 역으로 이 팀에 팀워크가 필요한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흐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누가 듣는다면 어처구니가 없는 대화일 거다.
프로팀에 팀워크가 필요없다니?
가관인 점은 발언한 사람이 무려 코치다.
하지만 나는 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짚어올 줄은 몰랐지만.
"시현씨도 참 짓궂으시네요. 다 알고서 짜신 거 아닙니까? 애초에 용헌이를 영입한 이유가 그 때문일 텐데요."
이청호 코치는 또박또박 조리있게 설명해왔다.
바로 우리 신세상-매직이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단점에 대해서였다.
"팀에 에이스 자질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씨지맥, 올마스터, 뮴뮴. 더 말이 필요 있겠습니까? 그리고 초홍이도 제가 보기엔 천부적인 캐리꾼 기질을 타고 난 걸로 보입니다. 까놓고 말해 너무 공격적이죠."
팀에 에이스가 너무 많다.
누가 본다면 이 팀 멤버 쩌네, 이대로 롤챔스 가면 100% 우승 아님?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코치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보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드 오브 로드는 농구와 완전히 같지가 않다.
게임의 룰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더 복잡하게 엉켜있다.
룰이 복잡하다는 소리는 발을 맞추는 게 더욱 힘들다는 의미.
자기 주장이 완강한 에이스들끼리 서로 발목을 잡게 된다.
한 마디로 사공이 너무 많다.
배가 산으로 가버린다.
실제로 잘 나가는 선수들만 영입해서 팀을 꾸리려다 망한 케이스는 흔하디 흔하다.
특히 졸부들이 많은 중국 게임단에서는 매년 이적 시장마다 생기는 연례행사다.
올스타전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겠죠. 하나는 서포터를 공격적인 선수로 영입해서 팀의 색깔을 굳힌다. 그렇게 안 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 가는 점이 있습니다."
지금껏 게임단에서 보낸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청호 코치는 날카로웠다.
초반 스노우볼이 확실한 공격적인 서포터의 영입을 포기한 까닭.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몰아칠 때는 확실하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단점만이 부각된다.
'전 라인이 전부 공격적이면 정글러가 갈피를 잡기 힘들지. 이게 첫 번째 이유였는데 잘도 알아챘네.'
물론 전 라인이 이긴다면 그보다 더 낭보는 없다.
하지만 이는 상대팀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기대해서는 안될 일이다.
수준이 높은 팀일수록 상대의 약점을 잘 파고든다.
그렇기에 나는 공격적인 서포터의 영입을 포기했다.
여기에 대해 이청호 코치가 말을 이어왔다.
"즉, 우리 신세상-매직은 두 개의 오더 체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탑/미드/정글 세 명, 그리고 다른 하나는 봇 듀오. 개별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습니다."
사뭇 의아한 발언일 수 있다.
로드 오브 로드는 다섯 명이 진행하는 팀게임.
이청호 코치의 방금 말은 그 정석에서 완전히 위배된다.
기존의 상식을 자신 있게 깨부쉈다.
그를 스카웃했던 도박은 성공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어진 듯하다.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됐네요."
"휴우..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사실 저도 말하면서 긴가민가 했거든요."
상당히 긴장했는지 이청호 코치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았다.
확실히 그로서는 말을 꺼내기 힘든 일이었을 거다.
지금이야 하나의 팀에 오더는 무조건 한 명.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뀌게 된다.
오더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로스가 생기기 마련이다.
팀원들의 판단이 전부 비슷하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다르다면?
머릿속에서 생각을 고치는데 아주 약간이나마 시간이 지체된다.
그런데 이 약간이 프로 리그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딸 거 못 따고, 안 죽을 거 죽어버릴 수도 있다.
때문에 나온 의문이 굳이 오더가 필요한가?
서로 그냥 눈치껏 알아서 조율하면 되는 거 아닌가?
지나친 이상론 같지만 시간이 흘러 선수 개개인의 수준이 오르자 정말로 가능하게 되었다.
앞으로 최소 3년은 지난 미래에서 말이다.
이외에도 세세한 이유가 붙긴 하지만 결론은 한 가지.
선수들 각자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
방금 전, 이청호 코치가 제기한 건 바로 그 중간 단계다.
'한 마디로 위와 아래로 나누는 셈인데 이러면 한 가지 문제가 생겨버리지.'
탑/미드/정글이 제멋대로 하고 다니면 원딜러인 나를 지킬 사람이 없다.
여기에 서포터까지 공격적이라면 난 그냥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알아서 생존하는 거.
그게 쉬웠으면 원딜러 솔로랭크 어렵다고 징징대는 소리가 나올 리가 있겠는가.
이러한 사정으로 나는 수비적인 서포터로 이름난 고질라를 영입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만이 다룰 수 있는 한나라는 챔피언.
고질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묻히고 있다만 나는 확신한다.
이번 롤챔스에서 우리가 만약 우승을 하게 된다면 그와 한나는 최고의 서포터로 인정을 받게 될 거라고.
"용헌이를 영입한 것에 대해 처음에는 솔직히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곱씹어보니 의미가 이어지더군요."
이청호 코치가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원했던 답이 이것 맞냐고 눈으로 이야기해온다.
사실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있어 힌트가 된 듯싶다.
"에이, 뭐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리가요. 다만 제가 원딜을 하면 슈퍼 세이브해줄 만한 인재가 한 명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해서 적극 영입했습니다."
반쯤은 본심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청호 코치는 나의 말을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윽고 시원스레 대답했다.
이해력이 빠르다는 부분도 참 마음에 든다.
"그렇게 생각해도 맥락이 맞겠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현재 신세상-매직의 윤곽은 잡혔습니다. 남은 것은 가다듬는 일 뿐이겠죠."
윤곽이 잡혔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약 2주일간 걸친 대회 경기와 연습 게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장난스런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지만 필요한 행위다.
이청호 코치의 말마따나 현재 우리팀은 각자의 기량이 너무 높다.
개개인의 플레이가 너무 튄다.
서로 맞출 생각이 없다면 익숙해지는 방법 뿐이다.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경험만이 답.
그리고 서로 친해져야 한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플레이를 하더라도 신뢰감이 먼저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는 예은과 초홍의 사이가 가까워진 건 괜찮은 일이다.
"얌. 아직도 삐졌냐?"
"삐돌이래요~ 삐져 있대요~!"
연습실의 방음문을 열고 쪼르르 빠른 걸음으로 달려 온 예은이 내 의자 뒤로 숨었다.
짜증나는 땅꼬맹이도 함께 왔지만 지금은 두 가시내 모두 마찬가지다.
"이걸 확!"
"화나 있다. 도망가자, 도망가자."
예은이 땅꼬맹이의 허리를 잡고 기차놀이를 하며 연습실을 나간다.
아, 저거 중고등학교 때 많이 하던 놀인데.
화난 척은 하고 있지만 내심 흐뭇하다.
동성 친구가 적던 예은에게 어울릴 상대가 생겼다.
'그만큼 나랑 있을 시간이 줄어 들어버려서 시원섭섭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성격이 밝아졌고.
부정적인 변화는 장난기가 더욱 늘었다.
어느 쪽이든 사실 나쁜 일은 아니다.
"크흠!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이번 대회 끝나고 아마 공백이 한 달쯤 있었죠?"
"스케줄은 여기 표로 정리 해뒀습니다."
이청호 코치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묶여진 서류 묶음을 건네왔다.
상당히 무안한 상황이지만 여기서 내색하면 더욱 민망해진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이미 지나왔던 일까지 빼곡하게 정리해 놨구나.'
팀의 자잘한 스케줄 관리는 이청호 코치가 도맡고 있다.
귀찮을 수 있는 일임에도 성의가 돋보인다.
코치로서의 업무에 얼마나 열정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청호 코치가 말을 이어왔다.
"스케줄을 보자면 정확히 7월 18일에 롤챔스가 개막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6일 남았네요."
정리만 한 게 아니라 외워 놓기 까지 한 모양이다.
아직 준결승전도 안 끝났는데 롤챔스부터 살피다니?
누가 본다면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긴장감이 없다.
조금 까놓고 말하자면 체급이 안 맞는다.
지금까지 진행된 경기들이 괜히 일방적이었겠는가.
대진운 나쁘게도 우리팀을 만난 상대들에게 애도를 표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다는 소린 아니지만.'
스케줄을 미리 파악해 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현재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나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아니, 애시당초 LML은 쉬워야 정상이다.
롤챔스에서 강등 당한 팀들 대부분이 다음 시즌에 또 모습을 드러낸다.
즉, 강등을 당했다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다시 올라온다는 소리다.
1군과 2군의 실력 차는 사람들 눈에 비치는 것 이상으로 현저하다.
LML은 처음부터 관문조차 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코치가 말했던 윤곽을 가다듬는 일이야.'
잡힌 윤곽을 가다듬고 가다듬지 못하고는 비슷한 것 같지만 천지 차이다.
하얀 거 하나하나 제거한 귤과 제거하지 않은 귤의 맛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실력대가 낮은 LML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문제들이 이 사이에 하얀 거 끼듯 대두될 거다.
아주 귀찮게, 끈덕지게 상대 쪽에서 단점을 물고 늘어진다.
그런데 이 호흡이란 것은 결코 한두 달로 맞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얀 거 대충 제거한 귤과 꼼꼼하게 제거한 귤의 목넘김 차이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프로 무대에서 이 약간의 차이가 게임의 승패가 가리게 된다.
물론 상성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라면 급조가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팀의 경우엔 해당이 안된다.
고질라를 스카웃했을 당시 예은이 정말 솔로랭크 악연 하나 보고 까칠하게 굴었겠는가?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서로가 안 맞는다는 인상이 확연했기 때문이 더욱 컸다.
이런 악연끼리 호흡을 억지로 맞히면 파투날 위험이 훨씬 크다.
잘 안 벗겨지는 귤껍질을 억지로 까면 하얀 게 엄청 많이 끼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이 점은 실전으로 극복하는 게 좋을 것 같죠?"
"설마.. 마진 수비대를 상대로 연습을 하겠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단기간에 많은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는 실전만한 게 없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실전 무대가 몇 번 남아있다.
팀이 구성되기 전부터 고심해왔던 문제.
수비적인 성향인 고질라가 과연 팀에 완전히 녹아날 수 있을까?
나는 이점에 대해 낙관적이다.
잘 안 벗겨지는 귤들은 사실 유기농이다.
그런데 이 귤을 어떻게든 까서 하얀 거 제거해서 입에 넣으면 졸맛.
우리 신세상-매직이 그러한 팀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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