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직 나만이 마스터다-521화 (521/803)

521====================

LML

준결승전이 끝나고 대략 나흘쯤 지났나.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별거 없다.

적당한 휴식을 병행한 평범한 연습.

고민 끝에 내린 최선의 판단이었다.

'지금 당장 성적이 급한 것도 아니니 적응부터 가는 게 맞아.'

합숙 생활에 대한 부적응.

적지 않은 선수들이 은퇴를 결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선 블루의 서포터였던 케이람이 그러했다.

내가 씨불얼 게임단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던 시절에 본 이들까지 합치면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다.

직간접적으로 알고 지낸 선수들만 해도 그 정도다.

이러한 사정이 있어 우리팀은 아직 천천히 가는 중이다.

이는 결승전을 목전에 두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결승전에 오른 시점에서 롤챔스 시드권을 확정지었으니 더욱 느긋하다.

물론 대회가 끝난 이후로는 서서히 스퍼트를 올릴 예정이다.

이런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나 의외로 게임단 관리에 재능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중역 의자에 앉으니 나름 폼이 좀 사는 것 같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본래라면 구단주실로 사용되어야 할 방안이다.

그런데 그 구단주가 올 일이 안 계신다.

때문에 구단주실은 실질적으로나와 예은이 가끔 서류 작업을 할 때 사용하곤 한다.

숙소 내에서 유일하게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장소.

나는 내 무릎 위에 포개듯 앉아있는 예은의 볼따구를 쭈욱 늘리며 타박했다.

"그런데 정작 네가 사고를 치고 다니면 워쩌냐.."

"아냐, 정말 욕 안 해쪄어."

예은이 이런 애교 섞인 아양을 해대는 타입은 절대 아니고 그냥 목소리가 샜을 뿐이다.

상당히 귀엽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봐주는 건 없다.

나는 예은의 볼따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인터넷 창이 새로이 띄어진 페이지는 잉벤의 한 화제글이었다.

"그럼 이 글은 뭔데?"

"오해와 편견..?"

눈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본인도 자신의 죄를 알긴 하는 모양.

볼따구형을 묵묵히 당해주고 있는 것만 봐도 속내가 보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물어는 봐준다.

"뭐가 오해고, 뭐가 편견인데?"

"영어로 채팅친 건 사실이지만 욕은 안 했다구."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또박또박 항변해온다.

이렇게 완강히 항명하는 거 보면 속사정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걸 믿어 줘야 할까.

내 여친이긴 해도 요리조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라 솔직히 못 믿겠다.

"사용한 어휘가 질 낮을 뿐이지 엄밀히 따지면 욕은 아니야. 아슬아슬..하지만…."

입이 없으면 말이라도 안 하겠다.

나는 볼따구를 놓고 대신 입술을 잡아 꾹 눌렀다.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들 공인이 됐으면 하질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따져봤자 엎질러진 물이다.

'이 녀석 성격을 알면서 낙관한 내 잘못도 있긴 하고.'

정말로 문제 생길 일은 안 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일단 들킨 건 아닌 것 같으니 천천히 두고 본다.

어떻게 미안한 건 알긴 아는지 예은이 앉은 자세 그대로 나를 올려다 본다.

"화났어..?"

"됐어, 네가 그 정도로 분별력이 없지도 않을 테고. 다음부터는 조심해?"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이 녀석이 어디 가서 좀 안 싸우고 다녔으면 좋겠다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자신도 아니까 일부러 영어를 사용했을 테다.

잔머리가 어지간히도 잘 굴러간다.

이 좋은 머리를 그런 방향으로 쓴다는 게 참으로 유감스럽다.

포옥.

서로가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자 자연스럽게 키스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될 만큼 나와 예은의 사이는 지극히 가깝다.

뒤로 뻗은 예은의 얼굴을 감싸 안고 입을 맞추자 평소와는 감각이 다르다.

혀가 엉기는 구도가 반대라 그런지 더욱 더 농밀하게 파고든다.

그렇게 잠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답답한 숙소 생활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숨돌리기다.

하지만 언제까지 구단주실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입에서 혀를 쏘옥 빼내자 누구의 것일지 모를 액체가 예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것을 손으로 밀듯이 닦아주며 나는 아쉬움을 달랬다.

"슬슬 연습실로 돌아갈까?"

"싫어, 조금만 더 하자."

목을 넘기고 있는 자세 그대로 손을 뻗은 예은이 나에게 엉켜온다.

알고 지낼수록 느끼는 건데 은근히 어리광을 부린다.

애정을 탐한다는 느낌이다.

'둘도 없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직도 일까.'

한없이 거리가 좁혀진다면 꼭 닫혀져 있는 예은의 마음속도 문도 활짝 열어 젖혀질 수 있을까.

정말로 궁금하지만 당장의 유혹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조금만, 조금만 더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

.

.

* * *

로드 오브 로드 마스터즈 리그, 약칭 LML은 예정대로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전체적인 구도만 보자면 얼마 전 막을 내린 LCL과 크게 다를 건 없다.

전범준 캐스터를 비롯한 정규 중계진이 LML의 해설을 맡는다.

그리고 경기장도 용산보다 수 배는 넓은 상암 E-스포츠 경기장으로 옮긴다.

여기까지는 LCL에서도 똑같이 행해졌다.

즉, 주어진 여건 자체는 동등하나 한 가지가 크게 갈린다.

2군이라고는 해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극명하다.

경기력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에 특별한 요소 한 가지가 더해지자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준결승전 A조와 B조가 끝난 주의 마지막 요일.

현재 상암 E-스포츠 경기장에서 LML의 결승전이 치러진다.

한 남자가 무대의 중앙에서 큰 소리로 그 시작을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로드 오브 로드 마스터즈 리그! 현장에 오신 팬 여러분! 전범준 캐스터 인사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목청을 자랑하는 듯한 기운 넘치는 전범준 캐스터의 진행은 절로 흥이 겹다.

여기까지는 LCL 결승전 당시와 비슷하다만 다른 점도 엿보인다.

선수들이 프로가 이고 아니고 이전에 대충 둘러봐도 현장의 관중 수가 확연하게 다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결승전 순간을 함께 해주시고 있는 수 천, 아니 일만의 관중 여러분! 즐거~~우십니까~!!>

현장의 흥을 이끌어내는 전범준 캐스터의 외침에 관중들이 호응한다.

입석을 마다하지 않고 몰려온 1만의 관중.

그들이 크지도 않게 한 마디씩만 뱉어도 경기장이 울릴 지경이다.

당연하다.

상암 E-스포츠 경기장은 삼선 라이온즈 파크와는 달리 규모가 작다.

더욱이 개방된 구조도 아니라 목소리의 진동 에너지는 어디 가지 않고 사방의 벽에 부딪히듯 반사된다.

과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옆 사람의 말조차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특히나 입석으로 있는 관중들 중 안전 울타리를 잡고 있는 이들은 더욱 더 또렷이 느낀다.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봉은 강철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은 텅텅 비어있다.

소리의 진동이 영향을 미치자 그 안이 요동친다.

뿐만일까?

울타리 자체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이 손바닥의 촉각을 통해 분명하게 느껴진다.

자리가 좁아서 불편하다는 둥.

옆 사람의 땀냄새가 찐득하다는 둥.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사소한 불편 신경쓸 사람 아무도 없다.

모니터 화면으로 경기를 보는 시청자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편하디 불편한 현장에 어째서 굳이 찾아가는지는 앉아만 있어서야 공감하기 힘들다.

<결승전을 진행하기에 앞서! 양 팀의 선수들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겠습니다. 큰 박수 갈채 부탁드립니다! 페닉스~~라이트닝입니다!>

전범준 캐스터는 포장과 유도리 있는 진행으로도 이름 높다.

본래라면 순서상 신세상-매직이 먼저 무대에 올라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됐으면 페닉스-라이트닝은 필히 묻혔다.

현장의 관중들이 이렇게나 모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굳이 번거로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세상-매직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범준 캐스터는 현장의 분위기를 고취시키고 상대적으로 덜 조명을 받는 페닉스-라이트닝부터 차례를 진행했다.

자신의 권한 내에서 대회의 흥을 최대한으로 돋구는 것이 그의 능력이자 재능이다.

<오늘! 이 팀을 보기 위해 오신 팬분들이 적지가 않을 겁니다. 단상 위로 올라옵니다 신세상~~~매직!!>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결승전이라고는 하나 고작 2군 리그에 지나지 않은 LML.

롤챔스에서도 보기 드문 입석 만원을 실현시킨 전설의 탄생과도 같은 행보를 밟고 있는 팀이다.

지금까지 신세상-매직이 경기를 펼친 날은 무조건 만원이었다.

해외에서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프로게이머, 올마스터의 경기를 보기 위해 꾸역꾸역 몰려든다.

아니, 신세상-매직은 그 혼자만의 팀이 아니다.

<공중파, SNS 가릴 거 없이 화제라는 미인 듀오! 뮴뮴 선수와 아이돌 선수도 차례차례 등장합니다. 사실 제가 오늘 중계를 맡은 이유도 이 선수들을 보기 위함이 반이거든요?>

전범준 캐스터의 넉살스런 농담에 경기장의 관중들이 배꼽 빠져라 웃어댄다.

다른 스포츠 경기라면 찾아볼 수 없는 인간미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가릴 것 없는 진행.

아슬아슬 한도를 지키며 현장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다른 방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범준 캐스터만이 구사 가능한 수준 높은 애드립이다.

<갤럭시 크래프트 이후로 여성 선수가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사실 처음입니다!! 예정에는 없지만 잠시 월권 좀 하겠습니다. 여러 커뮤니티, 그리고 현장의 관중분들 중 두 선수를 사랑해주시는 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한 마디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현재 이 자리를 직간접적으로 함께 해주고 있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결과를 도출해내 즉석으로 연결시킨다.

다른 이가 했다면 자칫 무리한 진행이라고 타박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누가 전범준 캐스터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1세대 E-스포츠 갤럭시 크래프트가 탄생 시킨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임요한이라면.

최고의 캐스터는 다름아닌 그라는 사실에 누구도 이견을 붙이지 못한다.

오프게임넷 내에서 전범준 캐스터의 발언권은 비교할 수 있는 이가 없을 정도다.

결정적으로 현장의 열기.

관중들이 원했던 것을 정확하게 알아 맞췄다.

이미 모두에게 허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먼저 마이크를 건네 받은 아이돌 선수가 우물쭈물 인사를 전한다.

평소 경기장의 부스 안에서 빼액! 빼액! 괴성을 질러대며 올마스터와 투닥거린다던 소문은 역시 거짓인 걸까?

굉장히 얌전한 한 마디였지만 다른 한 선수는 달랐다.

마이크를 받자마자 가벼운 윙크와 함께 손키스로 남성 팬들의 가슴을 울려온다.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랑 말고 좋아만 해주세요? 제 임자가 조금 질투심이 심해서.>

숫한 남성팬들이 떨리는 가슴으로 뮴뮴 선수의 차례를 기다렸다.

곱디 고운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건만 임자라니?

그녀가 올마스터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야기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혹시라는 게 있고 어쩌면 오해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한 남성팬들의 기대에 쇠못을 박아버리듯 교제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한 마디가 팬들의 가슴을 무겁게 때린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애인분과의 뜨거운 관계 앞으로도 이어나가길 기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속이 좀 좁은 편이거든요? 배가 아파서라도 마이크를 올마스터 선수에게 넘길 수가 없겠습니다!! 바로 양 팀 선수들이 각오, 스크린을 통해 띄워드리며 경기 준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센스 넘치는 전범준 캐스터의 진행에 관중들의 반응이 빵빵 터진다.

사실은 진행 시간을 빠듯하게 고려했을 때, 이미 두 차례의 예정 없던 인터뷰를 마친 지라 어쩔 수 없다.

그마저도 애드립으로 넘기며 경기의 고조된 경기의 분위기를 유지시키는 그의 능력.

전범준 캐스터의 맛깔스런 진행에 의해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온도를 유지시키기 위함인지 무대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미리 촬영해 놓았을 영상이 흘러나왔다.

영상의 내용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다.

롤챔스에서도 흔히 보아왔던 양 팀간의 도발 주고 받기.

언뜻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 신세상-매직이 어떤 팀인데 감히 롤챔스에서도 아슬아슬한 팀이 비비느냐.

그러한 팬들의 선입견을 날려주겠다는 듯 페닉스-라이트닝은 첫 도발부터 강수를 던져왔다.

지난 준결승전에서 올마스터가 픽해 활약했던 도라이븐에 대한 일갈이었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