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
골든 마우스
삼선 레드 대 얼밤의 매치는 그다지 관심이 안 갔다.
누가 이길지 뻔히 예상이 됐다.
하지만 오늘, 8강 마지막 D조의 경기는 이야기가 다르다.
'승패 자체는 딱히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본선 무대 D조의 경기.
SKY T1 K 대 KTX 롤러코스터 B팀이다.
본래라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을 두 팀이 상당히 이르게 맞붙는다.
"쟤네들 경기는 왜 보자는 거야? 어제는 관심 없다며?"
"그냥 보고 싶어서.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냥.."
쇼파 옆에 다소곳 앉은 예은이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해온다.
그러고 보면 간만이긴 하다.
정말로 오랜만에 예은과 DVD방을 찾아왔다.
'미국에서는 참 재밌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DVD방은 여자 입장에서 참 꺼려지는 곳이다.
좁은 밀실에 침대에 가까운 쇼파가 비치돼 있다.
실제로 커플들끼리 그렇고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는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품지 않았다.
'이 녀석이랑 사귀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으니까.'
어디까지나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얼굴이 예쁘장한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외모와 이성으로서의 매력은 별개다.
여자가 얼굴 이쁘고 몸매 좋으면 끝이지, 나머지는 남자가 양보해야지.
나도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았던 적이 있었지만 겪어보니 아니더라.
누나나 여동생이 아무리 예뻐도 이성으로 보이지 않듯 예은이 딱 그러한 느낌이었다.
"눈치를 못 챈 니가 바보 멍충이 똥대가리지."
"..당한 게 얼만데 좋다고 받아들이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예은이 당시 은근하게 대쉬를 해왔다.
내 방에도 많이 찾아오고.
DVD방처럼 꺼려지는 장소도 흔쾌히 허락하고.
특별한 날에는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는 일이 있었던 같고.
하지만 당시로서는 예은을 이성으로 보기 힘들었다.
지금 와서 곱씹어봐도 내가 눈치가 느렸다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지지배가 워낙 극성 맞았어야지."
"어쭈구리, 옛날 성깔 나온다?"
주먹으로 내 팔뚝을 퍽퍽 쳐오는 힘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려를 해서 때려온다는 것 정도.
멍들게시리 같은 부위만 점사하진 않는다.
그래봤자 아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사실 두 팀 모두 윈터 시즌부터 롤챔스에 합류한 파릇파릇 신생팀이거든요? 오랜만에 보는 젊은 피들의 격전, 기대해 볼 만합니다?!>
<확실히 맛밤이나 마진에 비하면 젊은 피긴 해요. 그런데 전범준 캐스터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매치가 안될 달까.. 딱히 의미가 있는 소리는 아닙니다, 하하.>
김은준 해설위원의 타박에 관중들이 웃어재낀다.
예은도 입가가 피식 올라가서 때리던 손을 멈춘다.
이윽고 첫 번째 세트가 시작하며 양 팀의 경기가 막을 올린다.
"야, 내기 어때? 난 이길 자신 있는데."
"어쭈, 어쭈! 진짜 많이 컸다니까. 누나한테 대들기나 하고."
나이로 따지면 내가 오빠다.
실질적인 나이까지 가지 않아도 확실하게 말이다.
오른손으로 확 머리칼을 헝클어주자 꺅꺅 댄다.
예전 같았으면 내 팔을 비틀어 꺾었을 텐데 알게 모르게 성격이 귀여워지고 있다.
"첫 번째 세트 결과보고 정할래. 너 또 분석해 왔을 거 아니야?"
"설마, 너 나를 너무 쪼잔하게 보네."
설마 그렇게 까지 했을까?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고작 운으로 승부를 걸 만큼 내가 대범하진 못한다.
"..안 할래. 너 왠지 뭔가 있어 보여."
"크흠! 이거 참 신뢰를 못 받으니 섭하구만."
예은이 내 눈을 지긋이 째려본다.
살짝 찔리기는 하다만 뭐 어쩌겠는가.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그런데 이 녀석 상당히 날카로운 면이 있어서 걸려들질 않는다.
어쨌던 간에 승부와는 상관없이 경기는 시작된다.
SKY T1 K 대 KTX롤러코스터 B팀의 첫 번째 세트.
라인스왑으로 시작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스노우볼링이 막을 올린다.
.
.
.
* * *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애초에 8강 D조의 경기는 그다지 팬들의 기대를 받지 못했다.
─SKY 쟤네 스프링에서 준결승까지 가지 않았었나?
그냥 초심자의 행운이었나 보네.
KTX B팀도 엄청 센 팀은 아닐 텐데 이렇게 탈탈 털릴 정도면..
└KTX B도 요즘 나름 선전하던데? 올마팀이랑 같은 조라 묻힌 감이 있는 거지 리빌딩 괜찮게 했을 걸?
└마진 공격대도 잡았고 물 올랐어. 절대 못하는 팀 아님.
글쓴이-그래도 너무 탈탈 털리잖아..
└그러게, 어쨌든 준결승전 올라갈 팀은 이제 다 정해진 듯.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잉벤등을 포함한 커뮤니티의 반응은 궤멸적이다.
KTX롤러코스터 B팀이 SKY T1 K를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세트 스코어 2대0.
경기의 내용이라도 납득이 갔다면 마지막까지 지켜봤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첫 번째 세트도, 두 번째 세트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KTX 롤러코스터 B팀의 압승이다.
정글러인 까메오 선수가 거미여왕으로 압도적인 정글 차이를 보여줬다.
─전체적으로 KTX가 경기력 우위야.
라이너 기량 자체는 비등비등한 거 같은데 정글 차이.
그리고 소규모 교전에서도 KTX가 호흡이 더 잘 맞아.
뺄 놈 빼고, 점사할 놈 점사하는 능력이라도 해야 하나.
챔피언 카운터 치는 것도 잘하고.
배인 상대로 테러스티나 진짜 잘 뽑았어.
└맞다, 그러고 보니 테러스티나로 스토커의 단검 가던데 올마스터 영향 받은 건가?
글쓴이-그것도 그건데 테러스티나 후픽 판단 자체가 좋았음.
└테러스티나가 유일하게 카운터 치는 챔피언이 배인이잖아. 아는 사람들은 알지.
└선수들 실력보다 경험에서 차이난다고 해야 하나? 역시 짬밥이 괜히 먹는 게 아니긴 해.
첫 번째 세트는 라인스왑 과정에서 너무 손해를 봤다.
이어진 교전에서 스노우불이 굴러가는 것인 필연이었다.
그렇게 위안을 삼을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세트는 다르다.
전체적인 경기력 자체가 KTX 롤러코스터 B팀이 한 수 위였다.
SKY T1 K가 어느 하나 이기는 구석이 없었다.
소규모 교전도, 밴픽의 구도도 개인이 아니라 팀 차원에서 KTX 롤러코스터 B팀의 승리였다.
─준결승전은 A조도 B조도 박빙으로 재미나겠네.
A조 매치업이 가짜에어 독수리 대 신세상 매직.
B조 매치업이 삼선 레드 대 KTX 롤러코스터 B.
이번 시즌은 진짜 물갈이 제대로 됐다.
얼밤도 불밤도 안 보이는 거 처음 봄.
└로드 오브 로드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나 보네. 필연이라면 필연이지만..
└원래 프로게이머가 수명 긴 직업은 아니잖아.
└나중 가면 갤럭시 크래프트처럼 1세대 프로게이머, 2세대 프로게이머 그런 거 정리돼 있을 듯.
└크~! 그러면 우리가 무슨 역사의 산증인이냐?ㅋㅋ
5전 3선승제인 만큼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상 인정하는 분위기다.
KTX 롤러코스터 B팀이 준결승전 진출을 확정 지었구나.
많은 시청자들이 이미 관심을 돌렸다.
관심 뿐만 아니라 채널까지 돌려버렸다.
그러한 가운데 오직 한 명.
지금껏 정글 차이라는 혹평을 받아온 비행기 선수가 무언가 이상하다.
카메라가 슬쩍 비친 SKY T1 K의 부스 안에서 그의 오른손이 꿀렁이기 시작했다.
.
.
.
* * *
바야흐로 마지막이 되었을 세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SKY T1 K 대 KTX 롤러코스터 B팀의 경기는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 누구도, 심지어 중계진들의 예상조차 벗어난 대역전극의 서막을 알렸다.
<각성! 비행기 선수가 각성했습니다! 1,2세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드 캐리! 챔피언을 바꿔서.. 일까요?>
<확실히 그것도 있습니다. 두두 같은 소극적인 챔피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죠. 그런데 챔피언을 바꾼 걸 감안해도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비행기 선수의 경기력도, 표정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에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렸다.
부스석에 앉아있는 비행기 선수에게서 무언가 사이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런 착각마저 들 정도로 무서운 표정이다.
카메라에 비친 그는 하얀 이를 들어내며 광기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기분이 째지는 것도 이해가 가는 노릇이다.
입을 활짝 벌리며 웃을 수도 있겠지.
진짜 중요한 건 그의 경기력이다.
<이렇~~게나 잘할 수 있는 선수가 왜 지금까지 초식 정글러로 답답한 플레이를 보여줬는지..! 지금 당장 인터뷰를 하지 못하는 제 마음이 더 답답합니다.>
<미드라이너인 테이커 선수와 호흡도 장난 아니게 불 붙었어요. 소규모 교전에서 순식간에 한 명 잘라 먹는 능력이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미드와 정글이 한 몸이 되었을 때 얼마나 한 위력을 펼칠 수 있는지! 그 최대치가 증명된 듯한 기세입니다. 과장이 있을지언정 그만한 임팩트를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세트에서는 바위와 자드의 조합.
네 번째 세트에서는 바위와 아링의 조합.
암살자와 함께 하는 바위가 얼마나 무서운 챔피언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행기 선수의 기가 막힌 판단력과 테이커 선수의 절도 있는 암살 요령.
한 명을 기가 막히게 자른 후 내빼거나 역으로 밀어붙인다.
특히 개인 행동을 하는 KTX 롤러코스터 B팀의 정글러 까메오 선수의 움직임이 심각히 제한됐다.
역으로 정글 차이 제대로 보여주며 목전까지 따라왔다.
<갑작스런 기량 상승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시 바위라는 비장의 카드 덕분이겠죠! 어째서 처음부터 꺼내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잘했어요. 역으로 정글 차이 보여주면서 2대2! 박빙의 경기 터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후의 경기를 대비해 숨겨 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떨어지면 이후고 나발이고 없거든요? 그래서 꺼내 들었고 비장의 카드가 어째서 비장의 카드인지 제대로 선보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반반, 이기는 쪽이 최후의 승자입니다. 밴픽,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세트의 밴픽은 특별하다.
시험적으로 적용되던 블라인드 밴픽은 성공적인 사례들을 만들어냈다.
오프게임넷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결승전 뿐만 아니라 8강에서도 적용이 된다.
SKY T1 K 대 KTX 롤러코스터 B팀의 5전 3선승제 마지막 세트는 무법지대다.
서로가 서로의 픽을 제한할 수 없고, 심지어 픽이 겹치기까지 한다.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완성하며 상대의 조합을 카운터쳐야 한다.
한 마디로 자유가 자유가 아니다.
리미트가 풀림으로서 오히려 골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양 팀 코치진의 두뇌 싸움이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결국 탑은 쇈 대 쇈으로, 미드는 자드 대 자드로! 미러전이 성립되었습니다!>
<비행기 선수는 마지막까지 바위 가져갑니다. KTX 롤러코스터 B팀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막고 싶었겠지만 못 막죠. 블라인드 픽이거든요?!>
평소 침착하기 그지없는 김은준 해설위원의 말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흥분의 도가니다.
비록 그다지 관심을 못 받은 D조의 경기지만 경기의 내용은 극상이다.
마지막 세트 또한 굉장히 흥미 깊은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자드 대 자드라니?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구도다.
약 반년 전에 치러진 로드 오브 로드 챔피언스 리그 파이널.
서양권 최고의 미리 보는 롤드컵이라는 명성이 서린 대회 결승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Unknown Error의 자드가 미역슨의 자드를 갈갈이 찢어냈다.
같은 챔피언 임에도, 비슷한 여건을 가지고서도 다른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기를 통해 입증해냈다.
Unknown Error, 그의 존재감을 전세계에 떨칠 수 있던 명장면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로드 오브 로드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라 회자될 정도다.
그런데 당시 LCF 결승전과 비슷한 구도의 경기가 한국에서 펼쳐진다.
단순히 챔피언이 겹친 게 아니라 잘한다.
KTX 롤러코스터 B팀의 듀 선수도, SKY T1 K의 테이커 선수도 솔로랭크에서 자드 잘하기로는 손에 꼽힌다.
두 선수 모두 자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다룬다.
<선수들의 픽! 전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는 경기를 치를 일만 남았습니다..!>
본선 무대 8강 D조의 매치.
한 걸음이라도 양보했다간 외나무다리에서 굴러 떨어진다.
준결승전에 올라갈 마지막 팀이 정해졌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