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
인연이란
생각 이상으로 버거웠지만 그래도 괜찮은 느낌이었다.
어제 낮 시간은 전부 게임단 내부 촬영에 투자되었다.
'공중파 편성이라.. 악의적인 편집이 있지 않을까 불안하네.'
아무래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프로게이머가 그렇게 밝은 이미지는 아니다.
아니, 게이머라는 족속 자체가 환영받지 못한다.
이전에 뉴스데스크에서도 한 번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PC방에서 컴퓨터의 전원을 모두 꺼버리고 상황을 지켜봤다.
[어? 뭐야! 아~ 씨X 이기고 있었는데! 미치겠다.]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게이머들 사이에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지나치게 의도가 묻어 나왔던 일련의 사건은 역으로 된통 까이고 끝났다.
컴퓨터 오락이 아니라 바둑이더라도 저렇게 지나가던 행인A가 판 엎고 도망가면 킬각 나온다.
이렇듯 한국의 공중파 방송은 이상할 정도로 게이머들을 매도한다.
지금이야 그나마 나아졌지만 갤럭시 크래프트 때는 완전 게임 폐인으로 매도한 적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일어났던 사건이다.
'촬영 분위기는 좋았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믿지만.'
조금 걱정이 되긴 해도 오프게임넷이 함께 하는 만큼 신뢰할 만하다.
자기들 측에서도 향후 E-스포츠 이미지의 사활이 걸린 만큼 열심히 하겠지.
고민해 봐야 결론 안 날 이야기는 접어두고 당장 닥쳐온 일부터 풀어야 한다.
<리픈이 맞딜에 강력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리가스도 못지 않아요!>
<저 퉁퉁한 뱃살이 단순한 비계 덩어리가 아니거든요! 일반적인 마법사 챔피언이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칩니다.>
준결승전 B조의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와중이다.
경기 관람을 위해 팀원들 모두가 휴게실에 모였다.
휴게실이라고 해봤자 식탁 앞에 벽걸이TV가 달린 정도지만 은근히 쏠쏠하다.
밥 먹을 때 심심하지 않아서 좋고, 따로 휴게실 만들지 않아서 또 좋고.
애초에 한 번 옮길 것을 전제로 급조한 숙소라 시설이 약간 변변찮다.
그렇다고 안 좋다는 소리는 또 아니지만.
"초홍아, 너도 구리가스 같은 것 좀 해봐. 얼마나 안정적이고 좋아."
"못생기고 뚱땡이라 싫음. 우엑!"
진심으로 구역질 난다는 표정으로 혀를 삐죽 내밀어온다.
뭐, 저게 여성 유저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예은처럼 챔피언 외모 신경 안 쓰거나 오히려 좋아하거나 하는 쪽이 특이 케이스.
그리고 정말로 구리가스가 안 쓰인 이유 중 하나가 못생겨서였다.
'헤일도 엄청 OP였던 당시 재미없다고 안 쓰이고 그랬었지.'
맛있는 음식도 대충 차려 놓으면 먹는 사람 입장에서 꺼려지는 법.
로드 오브 로드의 챔피언들에도 해당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구리가스의 스펙은 언제나 좋았음에도 시즌3 중후반부터 뜨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대세 미드로 자리 잡아 미드라이너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기본 소양이 된다.
그러니까 좋든 싫든 그냥 하라고.
"알겠냐?"
"빼애애액! 안 해! 안 해!"
손이 근질근질 하지만 참아야 한다.
서로 간에 동의가 오가지 않은 체벌은 아이의 정서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때리는 것 자체가 남 보기에 좋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다대기의 구리가스라.. 그러고 보면 솔로랭크에서는 나름 잘했지.'
다대기가 가장 먼저 미드 구리가스를 사용했을 때는 지난해였다.
로드 오브 로드 챌린저스 리그, 2012년도 서머 시즌에 내가 준우승을 기록했던 한국의 아마추어 대회다.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나였으나 다대기가 곧바로 따라 사용했다.
그때 워낙 죽을 쒀서 그 이후로 안 했던 걸로 안다.
그런데 현재 메타가 구리가스에게 웃어주니 다시 사용을 하는 모양.
솔로랭크에서 몇 번 만나 봤는데 그럭저럭 괜찮았다.
<리픈이 집요하게 딜교환을 걸지만 구리가스는 싸울 마음이 전혀 없어요! 어차피 시간은 자기 편이다 이거죠!>
<아무래도 미드 AD챔피언이 한타 안정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궁극기를 제외하면 원거리 스킬이 없는 리픈의 경우 더욱 그렇죠. 물론 테이커 선수의 피지컬이라면 충분히 극복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이 삼선 레드 쪽으로 조금은 웃어주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마음이 달아오른 테이커와 받아줄 생각이 없는 다대기.
두 선수 모두 탑클래스의 미드라이너인지라 공방전이 치열하다.
그렇다고 아예 이득을 못 본 건 아니고 CS와 백업 우위는 리픈이 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기엔 리픈이라는 픽에 걸린 리스크가 적지 않다.
김은준 해설의 말마따나 무난하게 한타에 들어가면 6대4정도로 삼선 레드가 웃어준다.
그 정도라면 한타의 구도에 따라 뒤집힐 수 있겠지만 그래도 리픈이라는 픽의 의미가 묻히는 것은 좋은 흐름이 아니다.
무언가 사건 하나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아웃섹 선수 미드 찌릅니까! 비행기 선수는 백업 오려면 멀었거든요?! 순삭! 깔끔하게 순삭 갑니까!>
줄곧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던 테이커에게 한 번의 빈틈이 생겼다.
아무리 정글 그 자체 비행기라고 하나 언제까지 미드만 봐줄 수는 없다.
한 번 생겨버린 틈을 놓칠 정도로 아웃섹과 다대기의 듀오는 만만치 않았다.
─투웅!
먼저 들어가는 것은 구리가스의 점멸 배치기.
리워크 전인지라 스턴이 아닌 둔화지만 충분하다.
발목이 잡힌 리픈은 아웃섹의 깃창을 피하기 위해 점멸을 써야 했다.
그렇게 모든 생존기가 빠진 리픈을 향해 구리가스가 궁극기를 끼얹는다.
<어? 어어?! 들어가서 큰일 났죠, 이거는! 거기서 리픈에게 맞으면 큰일이에요!>
<야아~! 다대기 이거 큰일 났습니다! 리픈 파고 들면서 무방비 상태-! 망했어요, 망했어요..!>
궁극기를 맞고 튕긴 리픈이 하필 구리가스의 코앞으로 배달됐다.
심지어 딜교환에 사용했던 평캔의 쿨타임이 때마침 돌아왔다.
글자 그대로 구리가스의 체력바가 삭제 되면서 시원하게 역관광.
리픈을 추격하느라 똑같이 모든 생존기를 쓴 구리가스는 그냥 얻어 터져야 했다.
궁극기를 빼든 리픈의 폭딜에 역으로 깔끔한 순삭을 당한다.
<망했어요..! 거미여왕이 점멸로 실뭉치 박아 넣었습니다!>
<리픈이라도 따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리픈이라도!>
<아, 그런데 리픈 실드 쿨타임 돌아왔죠. 완전히 망했어요~. 피해가 너~무 큽니다아!>
그래도 탈리반이 리픈 마무리하면 동점은 될 수 있었는데 또 하필 비행기의 거미여왕이 도착했다.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이지만 결과는 매한가지.
실뭉치에 맞은 탈리반 3세는 스턴에 걸리고 만다.
그 사이에 실드 쿨타임이 돌아온 리픈이 더블 킬을 달성한다.
구리가스와 탈리반이 각자 들고 있던 블루와 레드는 보너스다.
"와, 임기응변 대단하네."
"저건 구리가스가 너무 각을 못 잰 거 같은데.."
"그거 감안해도 테이커가 잘하긴 했어."
팀원들 사이에서 한 마디씩 탄성과 함께 이야기가 오간다.
삼선 레드가 실수를 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냥 넘어갔었을 수 있는 찰나였다.
스킬 쿨타임을 정확히 계산해 솔킬을 딴 테이커의 순간 판단력은 대단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구만.'
결국 원인은 다대기의 궁극기에 있었다.
다대기가 던진 것은 술통이 아니라 게임이다.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궁극기를 기가 막히게 못 던지는 선수다.
리픈과의 라인전 자체는 나와 한 번 해본 적이 있어선 지 익숙하게 잘 넘겼다.
하지만 역시나 고질병이 발목을 잡았다.
방금의 더블 킬로 인해 지금껏 쌓아온 공든 탑이 와르르르 무너졌고 게임의 향방은 산으로 간다.
<아, 다대기 선수 딜계산 못했죠! 안 그래도 불리한데 솔킬까지 나버리면 라인전 지탱이 안됩니다..>
<테이커 선수가 쌍버프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모양입니다. 미드 라인 솔킬 터지면서 게임 급격히 기울어지네요.>
어쩌다 실수 한 번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실수를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만회하는 게 아니라 더 안 던지는 거다.
그 사실은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좀 복잡하다.
술통 짤짤이로 어떻게 리픈을 압박하려던 다대기는 그만 거리를 줘버렸다.
레드가 묻은 평타에 한 번 맞자 추노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궁극기를 터트려 떨쳐내려 했지만 동시에 리픈도 쏘아냈다.
숙청자의 칼이 콰라랑! 구리가스를 두 동강 내버렸다.
결국 미드에서의 더블 킬이 스노우볼 굴러가며 게임셋.
삼선 레드의 원딜러, 코볼트가 어떻게 한타 캐리를 시도해 봤으나 실패했다.
리픈이 잘 커버리면 원딜 입장에선 지옥이 따로 없다.
점멸의 쿨타임이면 반드시 원딜 죽고 시작한다.
"완전 미드 차이로 터져버렸네.. 궁극기를 진짜 못 던진다 다대기."
"많이 못하긴 했지. 초홍이가 술통 저렇게 던지면 나한테 완전 꿀밤행인데, 그치?"
"빼애액! 안 한다고!"
첫 번째 세트는 SKY T1 K의 압승이었다.
5전 3선승제인 만큼 큰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다대기의 구리가스를 볼 날은 없을 것만 같다.
시청자들의 안구 보호를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안 꺼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작전 타임을 요구하며 시간이 조금 끌어질 거라 예상했지만 삼선 레드는 쿨했다.
곧바로 두 번째 세트의 밴픽에 들어간다.
뭐, 구리가스만 아니었으면 전체적인 게임 양상이 괜찮았으니 이해는 가는 노릇이다.
한 소리 거하게 듣고 있을 다대기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결국 다대기 선수 이번에는 미달리라는 무난한 픽 가져가네요.>
<물론 미드가 아닌 탑에서지만, 미달리는 리픈을 상대로 상성상 우위에 있는 픽입니다. 하지만 테이커 선수도 굳이 리픈 가져갈 이유가 없죠, 주력 챔피언인 르풀랑 가져갑니다..! 그래도 아까와 같은 실수 하지 않고 침착히 가면 삼선 레드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할 만합니다. 그럴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는 팀이에요!>
구리가스가 빠지자 양 팀의 밴픽이 정상적으로 흘러간다.
게임 내용도 아마 크게 모나는 일은 없을 거다.
"출출한데 짜장면이나 하나 시켜 놓고 볼까?"
"난 짬뽕! 곱빼기루다가."
"그럼 난 짬짜셈!
응, 내 사전에 짬짜란 없어.
사람도 많은데 나눠 먹으면 된다.
기지배들 괜히 깔끔떤다고 몇 푼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다섯 팀원의 주문 메뉴를 받아 적었다.
여기에 탕수육이나 대자로 하나 추가하면 되겠지.
핸드폰으로 중국집에 전화를 거는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어, 어..? 정말 꺼냅니까? 최근 저 챔피언에 대해 정말로 말이 많거든요?>
<부시안! 결승전에서 올마스터 선수가 꺼내주지 않을까 기대를 받던 챔피언이죠. 그런데 오늘 나왔습니다. SKY T1 K의 원딜러, 꿀꿀이 선수가 롤챔스에서 처음으로! 부시안을 꺼내 들었습니다..!>
신규 챔피언을 사용하는 건 리스크가 큰 행위다.
예상치 못한 단점이 부각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익숙지가 않다.
평소 애용하던 픽들보다 좋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꺼내 들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첫 번째 세트를 가져갔으니 마음이 부담가도 조금은 덜었을 거다.
롤챔스의 첫 번째 부시안 픽을 뺏겨 버리자 분한 마음.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꿀꿀이가 부시안을 어떻게 사용할 지가 더 궁금하다.
이윽고 부시안의 픽이 박히며 두 번째 세트가 시작되었다.
.
.
.
* * *
현재 준결승전을 진행 중인 SKY T1 K의 부스 안.
밴픽 단계에서 한 차례 작은 소란이 있었다.
"꿀꿀아.. 정말 괜찮겠니? 진짜 자신 있는 거야?"
"제가 누굽니까, 코치님? 이미 검증 끝났습니다! 제 솔로랭크 전적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영 미심쩍어 보이는 김다균 코치.
그에 반해 자신만만한 태도의 SKY T1 꿀꿀이, 최강진 선수.
둘의 실랑이는 이걸로 세 번째다.
김다균 코치라고 요새 한창 물오른 최강진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하게 튀고 싶은 욕심으로 그러는 거라면 코치의 권한을 발휘해서라도 자르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최강진은 실제로 솔로랭크에서 부시안을 제법 많이 사용했고 그럴 듯한 전적도 내었다.
부캐 몇 개를 돌려 사용했기에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알고 있지. 근데 꿀꿀아.. 내가 걱정하는 건 네가 올마스터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무리한 픽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거든?"
"하, 제가 올마스터를요? 그 선수가 미드로는 제법 먹어주는 거 인정합니다. 그러나! 원딜러로서는 저보다 두 수 이상 아래에요."
과도할 정도로 지나친 자신감.
인간으로서의 최강진은 조금 미성숙하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최강진은 충분히 일류의 반열에 들었다.
김다균 코치가 걱정하는 건 전자였다.
올마스터와 최강진 사이에는 과거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김다균 코치로선 부시안을 하려 하는 최강진의 모습이 유치한 경쟁 심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