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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란
섬머 시즌의 결승전은 당연히 해운대에서!
갤럭시 크래프트 시절에는 하나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갤럭시 크래프트가 막을 내리게 되자 흐지부지.
로드 오브 로드에서는 그 역사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물론 오프게임넷 측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단적으로 이유를 축약하자면 관중이 적었다.
결승전에 1만 관중 채우면 다행이었다.
대책없이 열었다가 다크 템플러가 가득 하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그랬었던 과거가 거짓말처럼 북적인다.
현재 부산 해운대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쏠리고 있다.
물론, 해운대 자체가 원래 사람이 많다.
특히나 한창 휴가철인 8월 중순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와, 사람 짱 많다~."
예은이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 보며 탄성을 내지른다.
경기 시작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 미리 도착해서 해운대를 구경 중이다.
주위는 정말 사람이 개미떼처럼 많다.
육지에만 많은 게 아니라 바다까지 완전히 꽉 차있다.
'모르긴 몰라도 평소보다 바닷속 염분 농도가 높아졌겠지.'
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비물까지 포함돼 있을 거다.
농담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현재 부산 앞바다는 햄과 라면을 추가한 부대찌개 급으로 건더기가 우러나오고 있다.
사람들이 엉키고 엉킨 바닷가를 바라보며 나는 아쉬움을 삼켰다.
"그렇게 아쉬워?"
"흥! 몰라."
앞서 삼킨 아쉬움의 원흉.
예은이 내 손을 꼭 쥐며 물어온다.
이제 와서 뭐라 한들 삐진 마음은 절대 달래지지 않는다.
"사실 옷 안 쪽에 비키니 입고 왔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없니, 예은아?"
비키니를 입은 예은의 모습이 보고픈 건 비단 팬들만이 아니다.
누구보다 간절한 건 다름 아닌 나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건 죽도록 싫다하니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살짝 입술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나름대로 해법이 존재했다.
"아마 저어~쯤이었나? 아빠 명의로 된 섬 있으니까.. 결승전 끝나고 둘이만 놀자."
꼬옥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예은이 속삭이듯 말해온다.
하기사 요즘 시대에 휴양지로 섬 한두 개 살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는가.
하나하나 놀라기에는 강남 건물주의 임팩트가 워낙 컸다.
거기에 또 멋들어진 호텔 수준의 별장 좀 있어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아주 뜨겁게 밤까지?"
"또, 또! 김칫국 마시긴. 그건.. 그때 가서 보고."
한 여름의 바닷가.
이 얼마나 좋은 울림인가?
한 나라를 꽁꽁 틀어 막던 흥선대원군도 이 해운대의 바닷가를 본다면 몹시 개방적이게 될 것이다.
드립이지만 현재 내 기분은 대강 그러하다.
터벅.
터벅.
예은과 함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걸어다닌다.
주위가 온통 푸른 바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해수욕장이라고 꼭 수영만 하라는 법은 없다.
이런 느낌의 데이트 코스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따사로운 햇볕보다 마주 잡은 두 손이 더욱 뜨겁게 느껴진다.
"근데.., 어제 계약은 어떻게 생각해..?"
"아, 어제 그거."
주위는 온통 시끄럽다.
사람들이 북적북적 아이들까지 많으니 시끄럽다 마다인가.
하지만 이렇게 옆에 딱 붙어서 걸어 다니니 서로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기분이다.
예은이 물어오는 내용은 어제 메일로 도착한 중국 게임단의 스카웃 제의에 대해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욕심은 나지."
"흐응.. 그렇단 말이지?"
뾰로통란 얼굴이 된 예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본다.
그렇게 위협 안 줘도 어디 갈 일 없다.
어제도 한 차례 이야기가 오갔지만 단순하게 선수로서 욕심이 날 뿐이다.
'그때처럼 딱히 무례하지도 않았고, 금액 자체가 워낙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었으니까.'
한국의 1류 프로게이머가 받을 만한 연봉에 0이 무려 두 개 더 붙어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 팀을 전전하며 아등바등 모아온 돈이 10억을 조금 넘는다.
현재 프로게이머의 연봉을 생각한다면 가히 엄청난 액수다.
그럼에도 그들이 제시한 연봉에 비하자면 턱없이 적다.
혹시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한국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해봤으나 다르지 않았다.
어째서 이만한 액수의 연봉을 선뜻 제의해온 걸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 짚이는 바가 있었다.
'상식 선에서 이해가 안되는 액수.. 도차도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지.'
현재의 도차가 아닌 내가 알던 미래의 도차다.
천년 정지로 인해 프로게이머로서의 등용문이 완전히 꽉 막힌 도차.
그랬던 그가 하나의 사건에 의해 프로게이머들 뺨을 후려치는 연봉을 받게 됐다.
중국에서 그를 스카웃해버렸다.
프로게이머나 코치로서는 당연히 아니다.
아무리 생판 외국이라고 해도 지어 놓은 죄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회는 로드 오브 로드의 게임사가 주관한다.
천년 정지를 먹은 그가 프로게이머를 지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솔로랭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국과 달리 중국 쪽은 법이 프리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프리한 수준을 넘어서 거의 없는 수준까지 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국가다.
정식 E-스포츠 관계자는 무리여도 어찌저찌 가능한 마지노선이다.
도차는 중국에서 솔로랭크 1위를 찍은 후 방송을 하는 대가로 수십 억원 상당을 벌어들였다.
"에이, 내가 조강지처 냅두고 어디 갈까 봐?"
"누가, 누가 니 마누라 해준데?"
예은이 내 엉덩이를 찰싹찰싹 치며 태클을 걸어온다.
이전부터 은근히 성추행하는 데에 도가 텄다.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제 막 자리 잡은 신세상 매직을 두고 주장인 내가 어딜 갈까?
걱정돼서라도 딴 곳으로 샐 일은 결단코 없다.
"게임단이 걱정되는 거라면 괜찮은데..? 나도 있고, 다른 팀원들도 다 자리 잡았고."
"너.. 나를 보내버리기라도 해버릴 눈치다?"
이게 최근 세간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러기 아빠가 되는 과정일까.
정말로 그런 거라면 눈물이 찔끔 나오는 노릇이지만 아닐 거다.
해수욕장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빌어 예은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 해주는 편이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랄까. 아니,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속물적인 게 아니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당황해서 허둥거린다.
평소 쿨하고 똑 부러진 예은과 매치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희소하지만 몇 번 본 적은 있다.
"자, 무슨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았으니 진정해."
"으..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마주 잡은 손을 풀고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들겨주자 예은이 얼굴을 붉혀온다.
일단 들을 말만 따지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건 맞다.
그렇지만 나와 예은의 사이다.
이심전심까지는 아니여도 대략적인 의도는 알 수 있다.
꿍꿍이가 있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나 잘되라고 해준 말일 테다.
'그 정도는 돼야 나 자신이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겠지.'
예은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상관이 있다.
얼굴 예쁘고 몸매 장난 아니고 외모적으로는 연예인의 반열인 데다 최근에는 성격까지 좋아졌다.
부모님도 엄청 잘 살고 좋은 분 같다, 뭐 아직 인사를 드린 적은 없지만서도 말이다.
내가 이 녀석이랑 더 깊은 사이가 된다면 사실상 데릴 사위나 다름 없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뭐, 고민해봤자 결론이 나지 않을 이야기라 그만뒀다.
예은도 쓸데없는 소리할 시간에 밥이나 한 숟갈 더 먹으라고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자연스럽게 성추행 당했네.
"그럼 이건 어때? 롤드컵 진출권을 얻으면 거절하고, 가지 않으면 수락하기로."
"합리적이고 좋은 생각이지만.. 내가 가면 너는 괜찮아?"
축하해주듯 밝게 말해오던 예은이 표정이 굳었다.
표정 관리에 한 번 실패하자 더 이상 애써 웃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녀석과 오랜 기간 교제를 했기에 알지만 합리적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자기 중심, 감정이 폭발하는 때가 있다.
당장은 괜찮을 수 있겠지만 하루이틀이 아니다.
"북미에서처럼 어떻게 빨리 잘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란 보장도 없고, 된다고 해도 근 반년이야."
이야기가 갑작스레 진지하게 흘러간다.
나와 예은은 비교적 조용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에 띄는 카페가 꽤 많아서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조용했다.
가는 길 내내 한 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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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운대 10만 관중의 신화!
다시 한 번 재현될 수 있을지 세간의 관심이 부산 해운대에 모이고 있다.
정확히는 2013 로드 오브 로드 섬머 시즌의 결승전에 말이다.
현장에는 수천, 아니 수만 개의 간이 의자가 마치 도미노처럼 줄지어 서있다.
대략이나마 개수를 확인해보건데 4만 개에서 5만 개 가량.
위에서 내려본다면 이만한 장관이 없을 것이다.
기획 단계에서는 상당히 우려가 깊었다.
과연 이 정도 수의 의자를 채울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예매는 별 탈 없이 매진되었다.
남은 것은 오늘 진행될 결승전을 성황리에 치르는 것 뿐.
걱정할 것도 없는 게 현장의 분위기는 이미 축제다.
로드 오브 로드의 온갖 챔피언들을 코스프레한 이들이 즐겁게 노가리를 까고 있다.
개중에는 오프게임넷에서 직접 고용한 전문 코스프레어들도 있고, 그냥 개인적으로 입고 나온 저퀄의 일반인들도 섞여있다.
후자의 옷은 입고 다니기 부끄러운 수준도 적지 않다.
하지만 퀄리티 같은 사소한 거 신경 쓸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재밌고 흥미롭고 신나면 장땡.
모름지기 축제란 그런 장소다.
그렇게 사람 북적이는 해운대에 국내 유명 방송사 CBS의 차량이 멋있게 타악! 등장한다.
브레이크를 끼익! 세우며 방송 기재를 든 촬영진들이 한 명, 한 명 내려온다.
마지막으로 내린 이쁘장한 단발의 여성 기자가 활기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안녕하세요! 현장에 나와 있는 이지혜 기자입니다. 봄에 이어 여름도,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E-스포츠의 열기 또한 더욱 뜨거워진 느낌이에요. 지난 봄보다 수 배는 많아 보이는 인파가 이곳 해운대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해운대는 원래 사람 많다.
짜증날 정도로 사람 많다는 거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안다.
그걸 감안 해도 조금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복장도 수영복이 아니라 간편한 캐주얼복.
적어도 해수욕 하러 온듯한 분위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러 이곳 해운대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지혜 기자가 이어나갔다.
"최근 북미와 유럽 등지의 영향을 받아 한국도 E-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하죠? 이미 해외에서는 로드 오브 로드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한 게임이라고 합니다. 저도 한 번 게임을 해보았는데 캐릭터들이 정말 아기~자기 귀엽더라구요."
아기~자기 귀여운 챔피언들이 서로 물고 뜯고 베고 썰고 할퀴고 난리도 아닌 게임이 바로 로드 오브 로드다.
어쨌든 그런 롤챔스의 결승전을 촬영하기 위해 CBS뉴스에서 또다시 찾아왔다.
지난 스프링 시즌 당시 제법 반응이 괜찮았던 모양.
게다가 이번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지혜 기자는 대형 스크린이 드리워져 보이는 무대 안 쪽까지 걸음을 옮겼다.
"보이십니까? 대부분의 시청자분들이 궁금하실 겁니다. 프로게이머는 과연 어떤 일을 직업일까요? 사실 저도 많이 궁금한데요, 내일 밤 일곱 시 그 궁금증을 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메라의 초점은 아직 채 시작하지 않은 롤챔스의 대형 스크린에 맞춰있다.
어째서?
롤챔스가 아직일 뿐 대형 스크린이 쉬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분 전만 해도 무대 중앙에는 초청 걸그룹들이 분위기를 업시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대형 스크린에 걸그룹들의 모습이 줌되어 송출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서인 지금도 대형 스크린을 통해 어떠한 영상이 이목을 모으고 있다.
"프로게이머들의 평소 숙소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는지! 저기 화면에 나오는 잠이 살짝 덜 깬듯한 백설공주 같은 미녀가 무려 오늘 결승전에 올라온 프로게이머라고 하네요. 게이머는
남성들만의 직업일 줄 알았는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내일 밤 일곱 시에 자세한 모습 확인해주세요."
롤챔스 해운대 결승전에는 관중석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
그 많은 관중석에 사람 배분하는 것만 해도 일이다.
오프게임넷의 스태프들이 정말로 열일하며 분전하고는 있지만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때문인지 걸그룹들의 콘서트도, 방금의 특별 코너도 아주 다채롭고 영양가 있게 준비되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 저게 뭐죠? 드디어 선수들이 입장하는 모양입니다..!"
이지혜 기자의 고개가 화악 꺾인다.
뿐만 아니라 관중들과 행인들 또한 한 쪽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그들이 바라본 방향, 무대 중앙으로 향하는 직선 길로부터 하얀색과 빨간색의 유니폼을 걸친 이들이 위풍당당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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