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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환계
선수들의 세팅이 끝났다는 신호와 함께 대형 스크린이 번쩍인다.
주르륵 화면이 미끄러지며 선수들의 모습을 차례 차례 비춰준다.
관중석에서는 이제야 차례가 왔냐고 오~~! 탄성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기대감.
도발전의 임팩트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양 팀 선수들의 기세가 장난이 아닙니다. 이거 잘못하면 일 하나 터지겠는데요?>
<맞습니다! 여름철 E-스포츠의 성지, 해운대 아니겠습니까? 사건 하나나 둘 정도는 가볍게 터져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범준 캐스터의 큰 목소리에 관중들이 술렁인다.
그렇다.
지난 8강도, 준결승전도 아쉬움 없이 재밌었다.
조별 리그도 평소의 롤챔스와는 달리 흥미 넘쳤다.
그런데 오늘은 결승전이다.
뭐 하나 터져도 제대로 터져줘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경기장에 참석한 관중들 중에는 저 멀리 경기도권에서 온 팬들도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휴가가 겹쳐서, 뭐 그런 이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결승전 보려고 온 이들도 분명히 있다.
물론 겸사겸사겠지만 결코 가벼운 발검은은 아니다.
부산과 서울 사이의 거리가 멀어도 좀 멀은 게 아니잖은가?
실망이라도 하고 간다면 다음 섬머 시즌의 개최지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여름철 E-스포츠의 성지라는 말이 걸맞게 재미난 사건을 당근 바란다.
오늘 날 잡아도 제대로 잡았다.
<저는 오는 길에 오리도 한 마리 잡았습니다. 딱히 기대하고 들어가진 않았는데 굉장히 안정적인 맛이었어요. 타지에서 오신 팬분들도 부산의 맛있는 먹거리 드시고 가시길 강추 드립니다.>
강빈 해설위원의 뜬금없는 강소리가 관중들의 머릿속을 띠용- 울린다.
뭐, 기왕 타지에 왔으면 그곳의 특산물을 먹는 것도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맛이 대체 무슨 맛인지 상당히 궁금하다.
이렇듯 강빈 해설은 종종 이해하기 힘든 4차원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아마 그래서 일거다.
갤럭시 크래프트에서 몽상가로 불리우며 외계 종족의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인류 종족에 임요한이 있다면 외계 종족의 선지자는 바로 강빈이다.
이곳 해운대는 갤럭시 크래프트 시절 유구한 영광이 잠들어있는 장소인 만큼 그로서도 감회가 새로울 테다.
<아뇨. 저는 이상하게도 해운대와는 인연이 없더라고요.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데.. 준결승전에 탈락했습니다. 관중으로는 몇 번 왔었지만 중계진으로 오니 감회가 나름 새롭네요.>
<아, 예에... 강빈 해설위원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어서 선수들의 밴픽 구도 화면 보시겠습니다.>
판을 깔아줘도 산통을 다 깨버리는 분위기 파악 못하기!
살아있는 전설이라 평받는 전 프로게이머 강빈이지만 너무 탱탱하게 잘 살아있다 보니 가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잠깐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지나가고 밴픽이 시작된다.
이번 밴픽, 그 중요도가 남다르다.
내뱉은 도발을 그대로 지킬 수 있을지!
말로만 떠드는 쫄보가 아닌지!
기대감이 숙성되듯 무르익었다.
<선픽의 SKY T1 K! 먼저 가져가는 것은 배인~~!!이 아니라 역시 준결승전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주었던 바위네요.>
<이것은 뺏어 온다는 의미도 강합니다. 양 팀의 정글러들이 전부 바위 잘하거든요? 금일 결승전에서 바위를 어느 팀이 가져가느냐, 이거 적당히 넘길 부분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양 팀 원딜 선수들 간의 기세 싸움이 격하다.
가히 비견될 만한 선수들이다.
전체적인 기량은 누가 봐도 올마스터!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원딜에 한정한다면 어떨까?
로드 오브 로드 초창기부터 줄곧 원딜 하나만을 파오던 꿀꿀이다.
더욱이 최근의 그는 국내 어떤 원딜러보다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결승전에 오는 길까지 숱한 강팀을 만났지만 봇라인이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역으로 위기의 상황에서 피지컬을 앞세운 과감한 플레이로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존심 드센 원딜 프로들도 이 하나 만큼은 인정하는 바다.
현재 한국에서 배인 가장 잘하는 사람이 바로 저 선수다.
꿀꿀이의 배인 만큼은 손에 꼽아줄 만하다.
<배인 선픽! 이 선수는 배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픽을 박습니다..! 뒤에 헤이클린이 나오든 미스터 포텐이 나오든! 이길 자신이 충만하다는 거에요!>
<북미에 트리플리프트가, 중국에 헤이샤오가 있다면 한국에는 꿀꿀이의 배인이 있습니다. 배인 공격적으로 엄청나게 잘합니다. 앞구르기를 허락 받은 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피지컬의 소유자입니다. 그리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다고 배인 선픽 박으면 신세상 매직도 사건 하나 터트린다고 예고, 했거든요!?>
팬들로서는 도발전의 입담이 거짓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내 가위는 바위를 이긴다.
꿀꿀이가 배인을 한다면 나는 부시안을 하겠다.
올마스터는 분명 그렇게 선언했다.
팬들의 기대 실망시키지 않기로 유명한 그가 그렇게 말했다.
<역시! 받아치지 않을 선수가 아니죠. 올마스터, 부시안 꺼내 들면서 약속 정확하게 이행합니다. 그런데 두 챔피언 구도가 정말로 그렇게 힘든가요?>
<예! 이 질문 나올 줄 알고 제가 빠듯~하게 준비했습니다. 신 챔피언이라 모르시는 분들 많을 거거든요? 선수들의 오피셜 짧막하게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부시안은 배인을 절대 이길 수 없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이는 불밤의 원딜러 빅캡틴맨이었다.
최근에는 다소 슬럼프를 겪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평타는 치는 선수다.
특유의 0.1초 클린즈 반응은 건재해서 언제든 다시 부상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유명한 빅캡틴맨의 입에서 부시안으로 3킬 먹어도 배인한테 진다.
이야기가 나온 이후 프로들 사이에서 많은 말이 오갔다.
3킬 먹고 질 정도면 챔프가 대체 얼마나 노답인 거냐.
그런데 정말로 궁극기가 답이 없긴 했다.
<라인 클리어용이다, 그렇게 굳어지는 분위기입니다. 데미지가 약한 거는 그래도 괜찮은데 채널링이라 평타도 못 쳐요? 심지어 데미지와 적중률까지 애매합니다.>
궁극기를 빼고 게임하는 격이다.
헤이클린과도 비슷한 처지지만 적어도 헤이클린은 100% 맞히기라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배인, 고르키, 크레이브즈 등 6레벨 이후로 급격히 강해지는 원딜러들에게 상성상 쥐약이다, 라는 것이 현 프로원딜러들의 공통된 평가거든요? 하지만 올마스터입니다. 언제나 당연하게 상식을 비틀어왔습니다? 오늘도 무언가 보여줄 가능성 적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대략적인 밴픽 구도가 완료되었다.
신세상 매직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웃어 주지가 않는다.
자기 여친있다고 대놓고 자랑하다 정말 벌 받은 걸지도 모른다.
<원딜 간에 상성도 상성이지만 바위! 한타에서 분명히 올마스터 선수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겁니다.>
<올마스터 선수가 그냥 당할 선수는 아니죠! 경기 시작하기에 앞서 온라인 투표로 진행된 결승전의 예상 우승팀! 그리고 스코어까지! 화면 하단에 송출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70 대 30.
방금의 밴픽을 고려하지 않은 순수한 팬심이 낳은 결과물이다.
신세상 매직에게 압도적인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더더욱이 예상되는 스코어가 4대0!
이러한 결과가 나온 데에는 사정이 있었다.
<지금까지 전승입니다! 믿겨 지십니까? 상대하기 쉬운 팀들만 골라 만난 게 아니거든요? 불밤, 그리고 가짜에어 독수리! 심지어 조별 리그까지 포함해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재밌게 됐습니다. 팬들의 심정과는 다르게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진행된 득표 수는 아슬아슬 SKY T1 K가 앞섭니다. 선수들의 신상 보호를 위해 콕 짚어서 말씀드리긴 힘듭니다만, 리심으로 포킹 잘하는 모 선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SKY T1 K! 신생팀이라곤 하나 차후 한국 로드 오브 로드의 스타 자리를 계승할 잠재력을 품고 있다. 개개인 하나하나의 기량이 현존 프로팀들의 에이스 못지 않다. 그 정도로 고평가를 내렸습니다.>
리심으로 포킹 잘하고, 가끔 코스프레도 하고, 선수명은 클짜로 시작하고.
어쨌든 그런 선수가 있었다.
그는 본인의 실력과는 별개로 게임 보는 눈만은 탁월하기로도 소문나 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쉽게 넘길 이야기는 아니다.
더군다나 밴픽 구도에서 SKY T1 K가 우세하기까지 하다.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첫 번째 세트.
신세상 매직 대 SKY T1 K의 경기가 시작된다.
.
.
.
* * *
울컥해서 감정이 앞서버렸다.
그래서 조금 막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웃어준다.
SKY T1 K의 원딜러 최강진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가 싸악 올라가는 특유의 썩소를 지었다.
"하! 제가 뭐랬습니까? 적어도 뺄 자식.. 아니, 선수는 아니라니까요?"
"그래, 결과적으로 말이야..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런 건 냉정하게 판단해야지."
그래그래 니 말이 맞았다는 듯한 김다균 코치의 대답에 최강진은 한 번 더 썩소를 지었다.
서로 결승전을 대비해 주고 받는 도발.
반진지 컨셉으로 장난삼아 툭툭 던지는 결승전의 백미 코너에서 조금 일이 있었다.
당연히 진담을 말해서야 실례지만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조금 까칠하게 나오긴 했다.
그런데 올마스터가 자신의 자존심을 박박 긁었다.
그 탓에 그만 본심이 우러나오고 말았다.
"저도 조금 흥분했던 건 인정하지만 문제될 발언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에 훅! 가는 거야. 어쨌든 네가 원하는 최상의 상황이 나온 것 같으니 활약 기대하마."
도발을 주고 받은 것은 거기서 끝내는 게 옳았다.
그러나 최강진은 실제로 대회에서 배인을 선픽 박겠다.
그것도 첫 번째 세트부터 과감하게 올인하겠다.
코치에게 말했지만 묵살 당했다.
결승전이 얼마나 중요한데 첫 번째 세트부터 그래야 하겠느냐.
준결승전에서도 억지 한 번 들어줬으니 참아라.
참지 않았다.
최강진은 부시안으로 해낸 MVP를 거론하며 김다균 코치를 설득해냈다.
'심지어 조합까지 이쪽에 웃어주고 저쪽은 날 마크할 사람도 없구만.'
최강진의 입가에 썩소가 절로 걸렸다.
상대는 배인 선픽 발언을 역으로 의식했는지 굳이 알려진 배인 카운터들을 고르지 않았다.
뭐, 배인으로 상대하기 쉬운 챔프가 어디 있겠냐 만은 까다로운 챔프는 몇 있다.
한타는 상관없지만 라인전 이후 배인이 필히 거쳐야 하는 스플릿 단계에서 말이다.
'성장만 하면 1대1로 다 잡을 수 있고, 하드 이니시를 걸만한 챔피언도 없어. 이러면 필승이지!'
배인 유저로서 가장 이상적인 구도다.
라인전 이후 솔로 스플릿을 통한 충분한 성장.
아이템이 갖춰진 후 이후에 한타에 합류하여 쓸어 담는다.
결정적으로 서포터의 기량이 이쪽이 우위다.
신세상 매직의 고질라보다 자신의 서포터인 곰돌이만두의 기량이 낫다고 최강진은 확신했다.
"원하는 대로 됐으니 라인전에서는 말 잘 들어라?"
"아, 만두형 섭하게시리! 내가 뭐 언제는 안 들었던 것처럼 말하네. 적어도 코볼트보다는 낫잖아."
"그건 인정하지만.. 너도 난 놈은 아니야."
프로 서포터들 사이에서는 고충이 많이 오가는 부분이다.
우리팀 원딜러 색히 말 겁나게 안 듣네.
특히 가장 측은하다 이야기 되는 이가 삼선 레드의 서포터 마차였다.
팀의 원딜러 코볼트가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단다.
그에 비하자면 한결 나은 꿀꿀이였지만 어차피 도찐개찐,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윽고 밴픽이 완전히 종료되고 선수들은 게임에 들어갔다.
소환자의 전장에서 펼쳐지는 경기, 그리고 자존심 싸움.
정신적인 부분은 당장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때문에 김다균 코치는 최강진에게 한 발 양보했지만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가 배인을 가져갔을 때 기본 전략 준수해. 고집 부리지 말고 라인스왑은 반드시 해야 돼. 코치도 많이 힘들다.."
"알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크큭."
걱정스러운 듯한 김다균 코치의 말에 최강진은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양새가 단순하게 말을 잘 들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했다.
'유도리 있게 라인스왑을 거는 것도 실력이고, 받아치는 것도 실력이야. 나중에 엄한 소리해봤자 다 변명이라고.'
상대의 심보에 맞춰주듯 배인을 선픽 받았다.
그렇다고 꼭 맞라인전을 서줄 이유는 없다.
배인이 부시안에게 강한 건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6렙 이후.
6렙 전에 라인 푸쉬가 안 좋은 배인은 적어도 우세하진 않다.
구르기로 꿰뚫는 불길을 전부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타워 안고 파밍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라인스왑으로 극초반을 적당히 넘기기까지 한다면?
경기의 흐름은 최강진에게 더없이 웃어주고 있었다.
->금일 1화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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