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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넘어라
벽 한 면에 박히듯 자리 잡은 대형TV의 화면에서 롤챔스가 방영되고 있다.
섬머 시즌의 결승전은 진작 끝났지만 승강전이 남았다.
나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해져버린 3,4위전도 이제 곧이다.
<마진 공격대! 롤챔스 조별 리그의 한풀이 제대로 합니다! 이니시 기가 막혔죠~~!!>
<가짜에어 비둘기, 팀 명 그대로 완전히 새됐거든요? 여기서 지는 건 둘째 치고 기세에서 눌리면 다른 팀에게도 얕잡혀 보입니다. 절대 뭐라도 하고 져야 돼요!>
조별 리그에서 아쉽게 본선 진출을 못한 팀들은 한 번 더 경기를 치른다.
이기는 팀은 롤챔스에 잔류하고 져버린 팀은 LML로 강등된다.
우리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상관없는 게 맞지만 괜스레 초조하다.
승강전이 끝난 이후 벌어질 3,4위전.
그 결과에 따라 많은 것이 변하게 된다.
많은 것이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쇼파에 앉아 승강전을 잠깐 바라보던 나는 채널을 돌렸다.
사실 챙겨볼 이유는 없었지만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나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예은이 따지듯 나무랐다.
"채널은 왜 돌려?"
"그냥.. 더 보다간 괜히 머리 복잡해질 거 같아서."
"그냥 켜. 어차피 볼 것도 없잖아."
게임을 단순히 게임으로만 즐기기가 힘든 프로게이머.
그것도 있지만 당장 알 수 없는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 참 걸린다.
여기에 대해 요 며칠간 예은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마찬가지였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가버릴까.
그냥 남는 것이 좋을까.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선택권이 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돈이 아쉬워서는 결코 아니다.
나는 이미 프로게이머로서 성공할 만큼 했다.
앞으로도 돈이 아쉬울 일은 없다.
예은과는 비교하자면 턱도 없지만 그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다.
구태여 내가 마음을 드러내는 건 되려 실례라고 말할 수 있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음에도 고민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루이틀 보고 살 사이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근래 예은과 나눴던 대화 중에는 말 꺼내기 부끄러운 내용도 많았다.
평소에는 이어지기 힘든 흐름이었지만 여건이 그러도록 만들었다.
그도 그럴게 눈치 볼 투숙객이라곤 하나 없는 외딴 섬 한 가운데 있는 호텔 안이다.
관리인들이 몇 명 있을 뿐 이 섬은 현재 나와 예은의 왕국이다.
같은 방 안에서 먹고, 자고, 마시기까지 하고 있으니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본래부터 나와 예은 사이가 원체 가깝기는 하다만 그 이상.
연애 이후의 이야기까지 근접하게 나눠버렸다.
술김에 질러버린지라 다음날 엄청 부끄러웠다.
그렇긴 했어도 서로의 본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막 내뱉은 말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쓸데없는 변명을 첨삭하지 않았다.
'인생사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단순히 마음에서 끝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럼에도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쩌면 한 번의 선택이 크나큰 분기점이 돼버릴지 모른다.
지금의 상황에선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을 것만 같다.
복잡하게 이어지는 나의 고민은 어처구니 없게도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나의 시선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롤챔스의 화면으로 향했다.
<아이템이 1코어 차이 나는 상황에서 바론까지 나갔습니다. 이대로 넥서스까지 쭈욱 밀려버릴 분위기죠?>
역전할 방법, 아직 있습니다! 코리아나 4인궁 이상 들어가면서 그 위로 쏘냐의 파워센도, 흔히 말하는 입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밑작업으로 이블퀸이 큰 그림 그리고 있거든요? 억제탑 깨지던 말던 혼자 몰래 빠져나가 살금살금 돌아가고 있어요.>
희망을 주는 듯한 클끼리의 해설은 결국 설레발로 끝나버렸다.
이블퀸이 몰래 이니시를 하기도 전에 마진 공격대가 먼저 걸었다.
한타가 한 번 성립되자 일방적인 농락으로 이어진다.
이블퀸은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우물로 귀환했다.
오늘의 승강전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애초부터 사실 승산은 전혀 없었다.
클끼리가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내비쳤을 뿐이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하면 이긴다.
김은준 해설이 승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클끼리 해설은 약자의 입장에서 역전의 가능성을 논한다.
가능성이 적더라도, 자신의 말이 틀릴지라도 그는 망설임 없이 약을 판다.
약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있어 이 혹시는 크나큰 위안이 된다.
마지막까지 응원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만에 하나라도 맞아 떨어진다면 신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결심을 내린 나는 쇼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가는데?"
"역시 뭐라도 해야 하겠다 싶어서."
뾰로통한 예은의 제지를 무릅쓰고 나는 방에 들어갔다.
나와 예은이 묵는 것을 전제로 꾸며 놓았는지 호텔의 시설은 깔맞춤이 되어있다.
내 개인실로 설정된 장소에는 그동안 쓰지 않았던 컴퓨터가 한 대 자리 잡고 있었다.
'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억지를 부리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방관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운명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러했던 내 마음은 희박한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클끼리의 해설을 들으며 동했다.
'역시 가짜에어 독수리가 이겨줬으면 좋겠어.'
조금 틀리다.
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것은 바보 같은 억지에 불과하다.
달칵.
나는 컴퓨터를 켜고 로드 오브 로드에 접속했다.
그리고 CP.GG 클릭해 어떤 선수의 아이디를 검색했다.
3,4위전에서 누가 이기고 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 걸리는 바가 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미래대로 반드시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다.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해두지 않는다면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마침 게임 중이네.'
운이 좋게도 검색했던 선수는 솔로랭크 중이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스크림에 매진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는데 운이 좋았다.
아직 두 게임 째인 것을 보면 적어도 몇 판은 더 솔로랭크를 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천천히 그 선수의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놓고 말을 건넬 수는 없다.
하지만 넌지시 운을 띄우는 정도야 괜찮은 거라 생각한다.
선수의 긴장감을 자극해주는 것만으로도 변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그가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너무 자극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상기시킬 수 있게.
해당 선수의 게임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였다.
.
.
.
* * *
친구 추가도 되어있지 않고, 방송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런 상황에서 저격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잘 맞아 떨어졌는지 두 번의 시도 끝에 저격을 성공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군으로 걸렸으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무리가 없겠어.'
적팀으로 걸렸다면 의도치 않게 도발이 될 수 있었는데 아군으로 걸려주어 한시름 놓았다.
닷지가 나지 않는 이상 이야기를 전달 하는데엔 무리가 없다.
하나 거슬리는 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SUP.
아군의 1픽이 서폿을 간단다.
주포지션이 미드라이너일 텐데도 아주 당당한 태도다.
뭐, 솔로랭크인 만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애초에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 돌리는 게임은 아니다.
'..그런데 이거 내가 원딜 가야 할 분위기인데..'
내 계정은 점수가 결코 낮지 않다.
그럼에도 5픽이다.
이말인 즉, 1픽의 점수대가 상당히 높다는 반증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군은 나를 무조건 원딜로 보낼 분위기다.
-와, 테이커랑 올마스터 봇듀오라니.. 이거 완전 꽁승판이네.
-미드도 프로게이머임ㅋㅋ 착하게 사니까 역시 복 받는구나ㅋㅋㅋ
아군들은 이미 난리가 났다.
완전 신나서 야단법석이다.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그리 좋은 결과를 예상하지 않지만 말이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어쨌든 간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아군 미드라이너는 내가 찾던 그 사람이다.
혹시 상대가 닷지를 하면 어떡하지 염려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무난하게 소환자의 전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소환자의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해요!
이런 멤버로 지기라도 하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조차 안중에 있지 않다.
나는 미리 정해두었던 한 마디를 조심히 채팅으로 전했다.
-Hey Mid.
-와이요?
내가 영어로 묻자 장난스러운 콩글리시로 대답해온다.
가짜에어 독수리의 미드라이너, 갱붐다운 유머러스함이다.
프로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안 갈릴 정도로 그는 친근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보통 프로게이머들이 솔로랭크에서 말을 섞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게다가 8강에서 한 번 겨뤘던 사이인지라 긴장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음 편하게 본론을 꺼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는 타이밍을 봐서 준비했던 말을 건네기만 하면 되겠지.'
여러가지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적당한 선을 찾아냈다.
나의 의도를 이해시키면서 상대가 이상한 억측을 하지 않게 해야 한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의외로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직접 시범을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모름지기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 타이밍은 당장 오지 않겠지만 게임을 하다보면 반드시 한 번은 온다.
어떤 게임이든 간에 최소 한 번은 바론을 트라이하게 된다.
안 하면 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
.
.
* * *
가짜에어 독수리는 명실상부 최저, 최악을 달리는 비인기팀이다.
하지만 팀의 인기와는 별개로 한 명만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실력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인성 덕분이다.
까놓고 말해서 프로게이머들 중에 인성 받쳐주는 사람 별로 없다.
애시당초 로드 오브 로드라는 게임 자체가 인성 파탄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교재다.
그런데 게임과 현실 가리지 않고 평판이 좋으니 인기가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보상이었다.
'아니, 얘네 자기들은 롤챔스 끝났다고 살 판이 났네.. 너무 한 거 아니야?'
조금 얼간이 같은 이미지는 있지만 갱붐은 나름 인격자라 평 받는다.
그런 갱붐조차 오늘 만큼은 화가 단단히 났다.
바보 취급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얘들아, 우리팀 봇듀오가 테이커랑 올마스터야. 게임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조용히 버스 타면 되지. 미드에서 닥치고 파밍만 하면 되겠네."
같은 연습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팀원 한 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갱붐에게도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최근 그 주목도가 남다른 두 선수가 봇듀오를 섰다.
질래야 질 수가 없는네임벨류.
무난한 버스를 기대했지만 다가온 현실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아군이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봇라인이 또 죽어주었다.
혹시 초반 실수가 누적됐거나 적정글이 봇만 노린 건가.
미니맵을 통해 찬찬히 살펴봤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악 눈물겨운 희생ㅋㅋ
혹시 테이커가 올마스터를 엄청 싫어하는 건 아닐지.
그러한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 못한다.
테이커의 서폿이 자꾸자꾸 죽어주며 상대 원딜을 키운다.
믿었던 올마스터도 빨려들듯 더블 킬을 당하고 말았다.
"얘들아, 테이커랑 올마스터가 트롤한다.. 봇라인 자꾸 잘려주는데?"
"네가 보조를 못한 거 아니야? 그 둘 솔랭에서도 엄청 잘하잖아, 점수도 높고."
복장이 터지는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갱붐은 게임에 몰두했다.
지기라도 했다간 덤터기를 쓰는 건 자신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아군에서 게임을 캐리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침착하게 후반으로 이끌고 간다면 승산은 분명히 있다.
자신이 플레이 하고 있는 럭키의 캐리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봇라인은 던지고 있지만 평소 하던 대로만 하자.
갱붐은 가짜에어 독수리의 평소의 스크림을 상기했다.
올마스터는 분명 키울 가치가 있는 원딜이니 후반에 가면 딜링이 폭발할 테다.
그 하나만을 믿고 갱붐은 꾸역꾸역 미드에서 온갖 갱킹과 로밍을 버텨냈다.
그렇게 게임 시간 20분이 넘어서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군이 바론 백작에서 지원 요청을 보냄!
미안하다는 감정이 있기는 한 걸까?
올마스터가 무려 오더를 내렸다.
솔로랭크에서는 절대 무난한 파밍만을 한다는 그가 말이다.
이렇게나 불리한 상황에서 어떤 짓을 하려는 지 솔직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갱붐은 올마스터를 믿고 바론 옆 부쉬에 잠복했다.
갱붐이 도착하자마자 올마스터는 무어라 채팅을 쳤다.
-You can do it!
눈 깜빡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올마스터의 이즈레알이 비전 점프로 벽을 넘어 도망갔다.
기껏 여기까지 불러 놓고 어째서?
당황한 나머지 갱붐은 반응이 늦어버렸다.
상대팀의 정글러, 탈리반 3세가 벽을 넘어 돌진해왔다.
<버거킹!>
미드라인에서 온갖 수모를 버텨내던 갱붐은 스펠이 하나도 없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탈리반 3세가 자신을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졌다.
이어지는 적의 백업에 빼도 박도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냥 네가 던졌네. 점멸도 없으면서 거기까지 가면 안되지."
"여기서 죽어주면 바론 먹히잖아. 어떻게 이런 멤버를 끼고 지냐. 참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왜 벽을 못 넘는 챔피언을 해 가지고.."
하도 쫑알쫑알 투덜대던 갱붐이 안쓰러워 팀원들은 구경하러 왔다.
올마스터와 테이커가 던진다니? 이런 재밌는 사건을 놓칠 수 없지 않겠는가.
한 발 늦게 도착한 그들이 본 장면은 갱붐의 스로잉 뿐이었다.
해명을 할 기운마저 빠진 갱붐은 회색 화면만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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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