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직 나만이 마스터다-581화 (581/803)

581====================

벽을 넘어라

어젯밤, 노곤하고 나른하게 잠에 들었다.

어쩌면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루 표현할 길이 없는 내 인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단순하게 사회에서 성공하고, 인정받고 일차원적인 충족감이 아닌 마음 깊은 곳부터 채워진다는 느낌.

성욕, 식욕, 수면욕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말하기 굉장히 부끄럽지만 표현하자면 하나밖에 없다.

어째서 사람은 사랑하는 걸까, 그 답은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입자 단위로 분해돼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침대, 그리고 이불과 하나 되어버린 몸과 정신은 기상을 완강히 거부했다.

평생 일어나지 않으리었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악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았다면 분명 그리 되었을 것이다.

딩딩딩~ 굿~모~!

딸칵!

반사적으로 손이 내뻗어졌다.

굿모닝의 마지막까지 들어버리면 그 날 하루 운수가 폭망이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그러한 징크스가 생겼다.

악마의 알람 소리를 끄기 위해 나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이 들자 두 가지가 또렷이 기억난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과, 어젯밤에 해버린 일.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한 중요도를 가졌는지 모를 수가 없다.

정신이 바싹, 졸음이 확 달아났다.

'..세상 모르고 쿨쿨 자네.'

또 다른 당사자가 되어버린 녀석은 잘도 잔다.

내 왼쪽 팔과 베개를 동시에 벤 채 새우잠 자듯 포옥 안겨 있다.

얄궂게도 중요한 부분은 이불로 가려져 있지만 확실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피부를 통해 전해진다.

사락.

나는 예은이 베고 있는 왼쪽 팔의 손목을 틀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이 손 끝을 간지럽힌다.

은근하게 잡히는 두상이 정말 조그마하고 동글동글 하다.

어제까지의 나라면 분명 여기서 만족하고 손을 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 오오..'

반대쪽, 오른손으로 살며시 매만졌다.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시작했다.

보드라운 살결과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크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살덩이.

만지는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모양이 정말 아름답게 자리 잡았다.

나도 모르게 조물딱조물딱 주무르고 말았다.

""….""

너무 자제를 하지 못한 것일까.

잠에서 꺤 예은과 눈이 딱 마주쳤다.

만지던 손 모양새 그대로 나는 얼어붙었다.

"만져도 돼."

쿨하기도 하셔라.

얼떨결에 허락을 받은 셈이지만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바보 짓도 멍석 깔아주면 못한다 더니 딱 그 꼴이 되었다.

나는 헛기침 내뱉으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좋은.. 아침이네?"

"…."

평이하기를 넘어 멍청해 보일 지경이다.

말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달리 더 좋은 인사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다행히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되지 않은 듯했다.

"그러네. 날씨는 화창하고,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간이고, 이불은 뽀송뽀송해서 어느 한 곳 습기가 느껴지지도 않아. 이만한 기상은 일주일에 한 번 꼴도 하기 힘들 테지."

"…."

좋은 아침을 맞이한다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늘어놓고 보면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지만 구태여 길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의미가 있어 보인다.

나로 하여금 그러한 착각이 일게 만들었다.

예은의 마음이 하염없이 복잡하다는 사실 만큼은 전해진다.

"슬슬 일어나자."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온다.

망설여서야 서로에게 좋을 것 하나 없다.

나는 이불에서 빠져나와 옷가지를 대충 걸쳤다.

"아침밥 준비해 놓을게. 식기 전에만 와."

"…."

동거를 할 적부터 식사를 준비하는 건 기본적으로 예은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예은이 늦잠을 자거나 내가 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을 때는 대신 하였다.

오늘도 따지자면 그런 느낌이지만 무언가 다르다.

내가 방 밖으로 나설 때 마지막으로 본 예은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뭉개뭉개 일어난다.

그럼에도 나는 도망치듯 부엌으로 향했다.

.

.

.

* * *

달그락.

부엌 쪽에서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기어코 뺏어 들었다.

말려도 묵묵히 고무장갑을 착용하며 막무가내다.

아침을 준비한 사람은 나였으니 설거지는 예은이 하는 게 맞다.

평소라면 부담없이 맡겼을 테지만 오늘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정신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걸음걸이에서 티가 난다.

아무리 애써 태연한 척 해도 모를 수가 없다.

어젯밤의 일이 있었으니 눈치를 못 챈다면 내가 바보다.

어지간해서야 밀어 내고서라도 내가 했겠지만 아니다.

맡기는 편이 낫다고 본능적인 판단이 들었다.

"커피 마실 거야?"

"어, 부탁할게."

설거지를 마치고 온 예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휘청휘청 위태로워 보였지만 끝끝내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려 한 것 같다.

'휴우.. 다행이야.'

일어나서 잡아줘야 할까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른다.

절대로 약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 예은의 상태가 이 정도인 것을 보면 보통 불편한 건 아닐 테다.

물론 쉬면 괜찮아지겠지만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한동안은 이 맛있는 커피를 못 마시겠네."

"..커피가 다 똑같지."

목소리에 바늘처럼 가시가 돋아있다.

일어난 이후로 줄곧 이 상태다.

어젯밤의 일이 거짓말이 아닐까 나 자신에게 자문을 몇 번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같은 커피 기계를 써도 더 향이 깊고 떫은 맛이 덜할 수 있을까? 역시 사랑일까?"

"..최대한 대충 끓여."

예은의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는 것을 배려해 줘야 한다.

일부러 못된 말만 골라서 하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중국 가서 힘들어 할까봐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네가 타준 커피 마신 이후로 파는 건 다 쓴 물로 느껴지더라. 참, 돈 주고 사 먹을 가치가 없어."

"..종업원이 침을 안 뱉어줬나 보지."

3대째 이어져 내려온 원조 맛집의 비결을 들은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처음 커피 타줬을 때 침 뱉지 말라고 했던 게 나였지.

진짜 침을 뱉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새침스럽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머리채 잡아 쥐고 소리 빽빽 지르면서 투닥댔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헤어지고 싶다는 마음이다.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고는 있음에도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대체 무어라 화두를 꺼내야 할까.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간다.

"잘 마셨어."

"..그래."

결국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길 때까지 변화는 없었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정말 늦을 수도 있다.

"차는 그쪽에서 대기한다고 하니 배만 조금 빌려 쓸게."

"..그래."

분위기가 무겁다.

창문을 열어 놓아서인지 바닷가 특유의 습한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 붙는다.

나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듯 공기에서 밀도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개인실로 향했다.

준비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대략 30분 남짓.

사실 남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뚝딱이다.

그나마 신경을 써서 반 시간 정도 걸렸다.

다시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예은이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거지할 때 입었을 앞치마를 아직 풀지 않았다.

메이드 차림의 인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유명한 프랑스 인형 장인이 일평생을 쏟아 만든 인고의 역작.

그러한 설정을 붙여도 믿을 법하게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이 정도의 미인과 사귀었다니, 정말 내 주제에서 벗어나도 한참은 벗어난 일이었다.

"그럼 잘 지내고. 연락할 테니까 꼭 받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주저 없이 전화하고. 그리고.. 게임단의 일은 너랑 코치가 잘 해줄 거라 믿어."

"…."

지금의 대화가 끝나면 헤어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질나는 속도로 말을 이었다.

지루했을 텐데도 마지막까지 들어주었다.

정말 평소였으면 등짝 스매시를 한참 전에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은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움직임이 없다.

어쩌면 예은의 안에서는 선이 그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괜히 돌멩이를 던져 파문이 일어날 일을 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한동안은 난 예은의 세계에서 없는 사람일 테니까.

'그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

이렇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머리 풀어서 산발만 해도 처녀귀신이 따로 없었다.

느껴지는 분위기가 정말 살벌하고 아찔했다.

주위 사람이 말을 걸 수가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했던 예은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새침하게 서있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긴 해도 묘하게 부풀어 있는 볼이나 꽈악 말아 쥐고 있는 치맛자락이 본심을 대변해준다.

예은이 아까부터 자꾸 나를 자극하고 있음에도 참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나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테다.

다 들통 났고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쿠욱 찔러주고 싶은 장난기만이 남았다.

안심하고 떠나도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비행기 내리면 연락할게. 늦어도 1시까지는 도착할 테니까 전화 씹지 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마지막 인사를 이었다.

그리고 뒤를 휙 돌아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아까와는 달리 망설임 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달칵.

이 문을 지나면 최소 반년이다.

내가 결정한 일이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일은 없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한 마디 없이 보낸다는 사실이 조금 시원섭섭할 뿐이다.

어제의 일로 서로의 본심을 확인했으니 만족 이상이다.

그저 아주 약간 아쉽다는 소리다.

예은도 분명 며칠 지나고 나면 많이 안정될 것이다.

그때쯤 되면 웃으며 전화 통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크나큰 오산이자 착각이었다.

"역시.. 안 가면 안될까?"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고 나서야 작게 외쳤다.

두 팔로 나를 끌어 안으며 숨죽여 울고 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내 등 뒤에 얼굴을 파묻고 있지만 확실하다.

정말로 많은 생각이 한순간에 일어난다.

나라는 사람이 예은에게 이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친 걸까.

지금 나의 선택이 혹시 틀린 건 아닐까.

이 녀석을 혼자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나는 반쯤 열려버린 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나 믿잖아. 금방 결판 짓고 돌아올 게. 아주 싹 쓸어 담을게."

"믿지만..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야.."

내가 남게 된 예은을 걱정하듯이 예은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사실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고생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아주 편히 지내면서 한국에서 할 경기 중국에서 하는 것 뿐이다.

이게 고생이면 우리나라 청년들 나라의 부름이랍시고 2년 동안 저질 환경에서 삽질시키는 건 원양어선 태우는 급이다.

"막 바람 피고 그러면 어떻게 해.."

"걱정을 해도 내가 해야지 왜 네가 하고 난리냐.."

정말 불안한 건 내 쪽인데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은 내가 바보 같다.

그리고 정말 바보 같은 고민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절대 없다.

"남자들은 김태희랑 사귀어도 오나미랑 바람 핀다고 하잖아.."

"적어도 난 아니니까 걱정 뚝 붙들어 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내가 김태희처럼 예뻐서..?"

자기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부심이 몹시 넘치는 예은이다.

그 자부심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외모 하나는 성격이 개판이던 시절부터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말장난을 하는 것 보면 조금은 기분이 풀어진 듯하다.

"억지 부리지 말고 좀 더 잘해줄 걸 후회돼.."

문자와쏭~♬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도 예은이 후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높은 자부심은 비단 외모만이 아니다.

행동 하나하나 전부 자신감이 대단하다.

보잘것없는 내가 예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는 사실이 실로 자랑스럽다.

"더욱 많은 걸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야한 것도.. 조금은 더 빨리 마음을 먹었어도 됐을 텐데.."

문자와쏭~♬

안타깝게도 정말 시간이 됐다.

이제 슬슬 안 가면 비행기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비행기.

방금 와버린 문자에 의하면 조금 문제가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끌어 안아줘.. 더 이상 억지 안 부릴 테니까.."

"어…. 그건 나도 꼭 하고 싶은데 잠깐 전해줄 말이 있거든?"

문자로 도착한 내용은 다름이 아니었다.

오늘 비행기가 갑작스레 결항이 됐다고 한다.

가능한 빠른 비행기를 알아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내일로 미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연락이 왔다.

"……."

"더 하고 싶다고 했었지..?"

하늘이 도운 것인지 그 소원 오늘 원 없이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꼭 끌어 안은 채 엉덩이에 조금 아저씨 같은 손길을 해주자 꺄악꺄악 소리지른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는데 참..

오늘 만큼은 그래도 전혀 상관이 없다.

무척이나 보람찬 하루가 될 것만 같다.

정말 여러가지 의미로 말이다.

--------

안 보고 넘어가신 독자님들이 계셔서 추가합니다.

주인공이 돈 별로 안 따진다고 해놓고 왜 중국 가나요?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액수 많아야 10억

북미나 해외 기준 수십 억

중국에서 제시한 액수 1천 억 이상(이는 현실에서 있었던 사건을 모태로 했으면 차후 떡밥도 풀립니다.)

주인공은 파트너인 예은에게 열등감이 잔재해있습니다.(결승전 전에 바닷가 데이트 파트에서 나옵니다.)

또 프로게이머로서 돈을 벌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입니다.

아무리 돈을 안 따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일 때지 액수가 조금 지나치게 많습니다.

주인공은 이 기회를 잡으려고 합니다.

이 또한 억지로 넣은 게 아니라 며칠 안에 떡밥이 연결되듯 나옵니다.

암은 팀원들은 어떻게 하냐? 여기에 대한 떡밥 진행된 게 있습니다. 또 팀원들의 동의를 받고 가는 겁니다.

만약 남는다고 해도 주인공이 한국에서 진행할 대회는 6개월간 윈터 시즌 하나 뿐입니다.

300을 키와 그것과 IQ로 나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본소설은 시작부터 맛깔난 불량식품을 지향했습니다.

저 300 중 대부분을 그것에, 아니 유쾌함과 재미에 몰빵했습니다.

다소 아쉬운 개연성은 차차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댓글란에서 이야기가 되었던 내용들은 완결 후기에 전부 이야기를 정리해놓았습니다.

완결 후기는 다음화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