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
신고식
예정보다 하루가 늦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속을 들여보았다.
시간이 다급해지자 오히려 계기가 되었다.
마음속 깊이 묻어 놓았던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지체된 하루는 정말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러저러 예은의 귀여운 모습을 잔뜩 눈에 담았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끝나는 법이라고.
결국 시간은 흘러 다음날이 오고야 말았다.
'살다살다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 타보네.'
돈이 있어도 선뜻 마음 먹기가 곤란한 가격대다.
이코노미 석이 50만원 이라면 비즈니스는 그 두 배.
퍼스트 클래스는 그 비즈니스의 또 두 배다.
가는 길 잠깐 편안할 뿐이지 도착하면 그게 그거다.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 올 때도 비즈니스 석을 탔었다.
나름 출세했는데 이코노미는 조금 그렇고, 당시 나와 예은의 분위기가 좋아지는 추세였다.
'까놓고 퍼스트 클래스는 내 돈 주고 타기는 좀 그랬지.'
사람이 갑자기 돈을 벌었다고 씀씀이가 커질 리가 있나.
솔직히 비즈니스 석 예약하는 것도 손이 덜덜 떨렸다.
예은 아니었으면 분명 이코노미에 탔을 것이다.
어쨌든 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국, 상해에 오는 데까지 탑승했던 비행기.
나를 눈독 들인 게임단에서 일등석, 퍼스트 클래스를 잡아줬다.
딱히 생각도 안 했었는데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까톡! 톡!
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무지하게 울려댄다.
스윽 화면을 내려 개수만 살펴보니 300개+ 미리 볼 수 있는 최대치를 초월했다.
비행기 타고 오는 두 시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열어보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단톡방이 터질 기세구만?'
혹시 예은이 엄청나게 보낸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도 아니었다.
신세상 매직의 단톡방에 300개+ 그 외에 개개인들이 보낸 것이 수십 개, 그리고 예은은 고작 세 개였다.
그건 그거 대로 시원섭섭하지만 적어도 미련이 남은 것보단 낫다.
타닥, 탁!
나는 가장 먼저 단톡방에 올라온 내용들을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대화의 주제는 나에 대한 내용으로 정말 실례되는 말들이 오갔다.
절친한 사이인 만큼, 그리고 지은 죄가 있는 만큼 봐줄 만한 내용들이다.
중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충분히 오갔지만 시기는 오늘에서야 알렸다.
결정이 갑자기 내려진 데다 어제는 조금 많이 바빴다.
아무튼 다른 곳에 시간 할애할 짬이 안 났다.
'개인적으로 온 건 다 답변했고 남은 건 예은 건데..'
딱 세 개.
무슨 내용일지는 열어봐야 안다.
뭐, 쿨하기 짝이 없는 예은이니 기껏해야 인사 정도 이리라.
예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양보다 질.. 어마어마하게 많이 보냈네.'
잔소리를 한 다스가 한 박스로 보내셨다.
구구절절 내 중국 생활에 대한 지적이 가득 써있다.
읽어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데 왜 일까.
결국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전부 읽게 되었다.
마치막 줄에서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예은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진심이 묻어 나온다.
"슬슬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어요."
"아, 잠깐 일이 있었어서. 이제 가도록 하죠."
내가 대동해 온 통역사 이창명씨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람은 나를 고용한 게임단에서 파견한 다른 통역사.
그의 입장에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내가 늦게 도착하면 곤란할 테다.
아직 정식으로 계약도 안 했고 여기서 지체한다고 불이익 받을 건 없다.
나는 그렇겠지만 저 통역사씨가 상당히 곤란할 거다.
이러한 부조리 군대에서 보기도 하고 직접 경험도 했다.
당하는 이 입장에서 얼마나 진땀 빼는지 모를 수가 없다.
타박타박.
최대한 협조해주며 공항을 나가 그들이 준비했다는 차량 부근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라는 상해의 공항답게 사람이 정말 바글바글하다.
한국인, 혹은 일본인들도 제법 많지만 주류는 역시 이곳 중국 사람들이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거리가 있음에도 귓속까지 울릴 지경이다.
'그래도 외계어로 들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미국에 처음 갔을 당시, 언어 때문에 정말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이곳 중국에서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조금은 덜할 듯싶다.
과거 나는 중국 프로게이머를 목표로 했던 적이 있다.
장장 5년이나 되었던 맛밤 게임단에서의 연습생 생활.
나는 한 3년쯤 됐을 때부터 중국 게임단으로의 이적을 노렸다.
뭐, 당시에 중국 이적이 유행이었던 탓도 있지만 깨달았던 것이다.
스스로 체념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프로게이머로서의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적당하게 경력만 만들고 코치로 넘어가자.
때문에 나는 짬짬이 중국어를 공부했다.
짬내서 하는 것이니 만큼 제대로 된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2년이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도 상당히 노력파였어.'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한다.
그보단 적지만 2년이면 그래도 맹자왈 공자왈 외우지 않을까.
당연하게도 회화와 롤용어 기준으로 연습하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쭉 연습생 생활을 이어갔다면 2군 게임단에 어찌저찌 갔을지도 모르겠다.
실력은 조금 애달파도 자국어가 가능하다는 건 큰 메리트다.
물론 당시에 그랬다는 거고 현재는 엄청 까먹었다.
아니, 솔직히 1년도 더 된 일인데 기억이 나면 그게 용한 거지.
"오~ 이거 설마 리무진?"
"예, 자사에서 김시현씨를 위해 특별히 배속한 차량입니다. 전용 운전수가 붙으며, 혹시 불편하시다면 직접 운전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통역사씨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이만한 능력이 있다.
우리와 계약을 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려고 준비를 해온 듯하다.
솔직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급 차량 정도야 나도 타고 다녔다.
하지만 이 리무진은 일반적인 차량이 아니었다.
'무슨 캠핑카도 아니고 별 게 다 있네..'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차 안이 한 마디로 바(Bar)다.
조금 협소하기는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음료 종류나 간단한 다과 종류도 비치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작은 바를 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너무 선심 과하게 쓴 거 아닐까 걱정될 정도다.
'빌딩의 숲이라..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야.'
창 밖을 바라다 보니 건물들이 화려하다.
그런데 무언가가 조금씩들 부족하다.
고급스럽다기보다는 돈을 쏟아부었다는 느낌.
되는 데로 좋은 거 지어 달라.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부자들이 자랑하듯 거금을 발랐다는 느낌의 외관이다.
비하를 할 목적은 전혀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
중국의 반만 년 역사라던지,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조금 기대했다.
미국과 유럽은 여한없이 쏘다녔지만 동양권의 나라에 오는 건 처음이다.
막상 와보니 그냥 조금 더 융성한 서울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건물들이 정말 크고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세상이라는 게 이렇게나 컸구나, 그러한 감회는 들고 있다.
이윽고 리무진이 그렇게 큰 빌딩들 중 하나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통역사씨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한다.
나에 대한 예의라기 보단 아무래도 위쪽이 신경 쓰이는 듯싶다.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노릇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저랑 창명씨 둘이서 가도 되겠죠?"
"회장님께서는 따로 개인 통역사가 있으시니, 그럼 저는 안내만 해드리고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마지막까지 가기는 가는 모양이다.
나로서도 잘 모르는 이가 뜬금없이 나타나는 것보다 그가 안내해주는 게 편하다.
그도 그럴 게 여기 무섭다.
'만화에서나 보던 검은 양복들이 계시네.. 인상들도 다들 어디서 한따까리 한 것 같고.'
그런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쑥덕쑥덕 거린다.
그들이 하는 말,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은 잡힌다.
가는 길 내내 무슨 말을 하고 있나 귀를 기울었다.
'아주 대강은 들리네. 어쩌면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지도.'
대화의 내용은 별 게 없다.
별 게 없었던 덕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저 사람 누구냐, 회장님이 요즘 게임에, 그 게임 잘하는 사람.
내가 알아들은 내용은 대충 이 정도였다.
다른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 지식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런데 가는 길이 상당히 돌아가네요?"
"회장님이 계신 장소는 이 빌딩 내에서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보안상의 문제니 이해해 주십시오. 오직 이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입출입이 가능합니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스케일이 점점 커진다.
듣기로는 이전에 경쟁 업체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저질렀다고 한다.
때문에 보안 레벨이 상당히 올라갔다고.
무언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라 떨떠름하다.
끼익.
빌딩의 크기 또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리무진 창 밖으로 보기는 봤으나 설마 했다.
엘리베이터 내부에서 본 최고층이 무려 55층이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크기의 빌딩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중국에 가면 그 스케일에 압도 당한다.
그러한 소리를 들어는 봤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장난이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바 이상으로 돈을 와장창 쏟아부은 서울이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목적지의 코앞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통역사씨는 뒤로 발걸음을 뺐다.
하마터면 나도 같이 걸음을 물릴 뻔했다.
순간 코 앞이 벽으로 막힌 줄 알았다.
목적지라 함은 크나큰 문 앞이었다.
아직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긴장감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계약을 하는 만큼 얕보이지 않기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건만 힘들다.
문의 크기가, 그리고 형태에서 힘이 느껴진다.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문 양 쪽에 하나씩 자리 잡아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 문에 장인의 손길이 살아 숨쉰다.
과연 귀신이 나올 것인가, 도깨비가 나올 것인가.
두 명의 검은 양복이 용각이 새겨진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
.
* * *
서머 시즌의 우승을 장식한 신세상 매직.
그들 전원은 아직도 휴가를 만끽 중이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개인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그래도 되는 게 그동안 너무나 열심히 했다.
팀을 창단한 이후부터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LML과 롤챔스, 두 번의 대회를 연달아 치렀다.
아무리 체력 관리를 한다고 한들 지쳐버렸다.
때문에 롤챔스가 끝난 이후 보름이 넘게 휴가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해낸 보상을 아주 신나게 즐기고 있다.
그러던 와중, 때 아닌 날벼락이 떨어졌다.
-와~ 진짜 가버렸네. 난 아직도 실감 안 난다.
-놀고 있으니 실감이 안 나지 멍충이셈?
-우리 초홍이 살 판 났네. 관리할 사람 없어져서ㅋㅋ
팀의 에이스이자 그들은 한 곳에 모은 올마스터가 사라졌다.
누가 본다면 해체의 위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외로 당사자들은 여유로운 상태다.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새로운 팀원들 물색해야 하지 않아?
-누님이 이미 손 쓰고 있을 걸? 그쵸, 코치님?
-엉,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해야겠다.
그도 그럴 게 신세상 매직.
올마스터가 에이스인 팀은 맞다.
하지만 그가 없다고 안 돌아가는 팀은 아니다.
탑솔러인 씨지맥도, 정글러인 뮴뮴 선수도 올마스터에 못지 않은 경력을 자랑한다.
더욱이 미드라이너와 서포터 성장하는 기세가 참으로 기대된다.
삼선 레드의 코치를 맡았던 이청호도 선수 메이킹에는 자신이 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올마스터라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페닉스 게임단에서 딜이 들어왔어. 이번 기회에 잘하면 팀을 하나 확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보충이 아니라 확충이요? 설마 저희도 2팀 체제 가나요?
-그래도 되지, 팀도 자리를 잡았고 윈터 시즌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고 해 볼만하잖아? 아, 참고로 말 꺼낸 사람은 누님이시다.
-..오빠까지 누님이라 놀리지 마요.
팀 내의 분위기는 조금도 우울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다.
그렇기는 커녕 해보자는 분위기다.
운수가 좋게도 새로운 팀원도 두 명 구했다.
페닉스 게임단 소속이었던 코코볼과 뱅크.
그 둘이 해당 게임단의 사정으로 탈퇴했다.
여기에 한 명 더 추가된다.
과거 LML의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페닉스-라이트닝을 맡았던 강채식 코치가 이적을 하였다.
사실 그까지 받아들이는 건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해보자, 질러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기울어진 계기는 코코볼과 뱅크의 강력한 어필이었다.
결과적으로 신세상 매직은 세 명의 식구를 새로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러면 MAGIC이 아니게 되는데?
-ㅋㅋㅋ누가 총대 메고 아이디 좀 바꿔봐.
-그런 건 말 꺼낸 사람이 하는 거셈!
이것이 과연 옳은 판단으로 작용할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팀의 분위기가 좋다.
긴 휴가라는 재충전 끝에 다시 모이게 될 그들은 새롭게 단장한다.
============================ 작품 후기 ============================
좌측 상단에 있는 추천 버튼! 잊지 않고 눌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독자님들이 주시는 쿠폰 덕에 힘내서 연재 이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