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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최대한 내색을 감추기는 했지만 몰려오는 피곤은 어쩔 수 없었다.
뜻밖의 사태를 두 번이나 경험한 탓에 정신머리도 없었다.
어젯밤은 최소한의 볼 일만 보고 쥐 죽은 듯 잠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부스스한 눈으로 컴퓨터를 켰다.
겜돌이의 본능이라기 보단 확인할 사항이 있었다.
모니터의 화면에 익숙한 사이트가 두 개 띄워졌다.
'잉벤 여론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정말로 다행이다.
사실 가장 신경 쓰고 있었던 부분이 국내 여론이었다.
괜스레 억측이라던가 쏟아지면 참 밑도 끝도 없다.
잉벤에 쓸까, 방송국에 남길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을까.
피곤했던 나는 원래 하던 대로 파프리카TV의 방송국에 글을 남겼다.
이전에도 종종 개인 방송국을 통해 입장을 남겼었다.
너무 요란스럽지는 않은 선에서 적당한 타협을 했다.
자칫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안되는 계륵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찌저찌 잘 풀린 모양이다.
힘든 몸을 이끌고 경기를 치른 보람이 있었다.
'역시 돼지털 사회야. 정보가 퍼지는 게 한순간이구만.'
고작해야 2군 리그 LSPL에서 딱 한 세트 뛰었을 뿐이다.
묻힐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벌써 이슈가 되었다.
화제글 상단에 <올마스터의 중국 참교육.avi>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다.
'이러저러 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간단하게 확인을 마친 나는 마음 가볍게 두 번째 창을 띄웠다.
이것이야 말로 중국에 오자마자 꼭 하고 싶었던 일.
나에게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앞으로의 중국 생활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들려?"
<응, 잘 들려.>
발달한 시대 덕을 톡톡히 본다.
화상 채팅을 통해 한국에 있는 예은과 연락한다.
인터넷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가슴이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뭔가.. 어색하네."
<그런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결항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하루.
여기에 젊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열정이 더해졌다.
다시 얼굴을 마주 보니 참 낯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여름날의 꿈만 같은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혹시 아프진 않고?"
<윽.. 이상한 얘기하면 죽는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불장난이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이어진 기분이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즐겁게 떠들어댔다.
화면을 보고 이야기한다는 게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훌쩍 지나갔을 정도다.
"하루에 한 시간은 너무 적지 않아?"
<그것도 많아. 정말 날 위한 거면 빨리 돌아올 생각이나 해.>
타인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기준이라곤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나와는 정반대다.
예은의 말마따나 서로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을 억지로 채우려고 하다간 역효과다.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혹시 여자 문제 생기면 즉각즉각 연락해라? 존 말할 때.>
"..하하, 설마 내 와꾸에 뭔 일 생기겠냐."
살짝 찔리는 부분은 있지만 일단은 별 일 없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라 단언한다.
아직 내적으로 조금 고민이다.
이실직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만 더 두고 보고 말하자.'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마당에 할 이야기는 아니다.
무언가 사건이 있었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았으니까.
구태여 불안하게 만드는 건 좋은 판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예은과의 화상 통화를 종료한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다섯 걸음 옮기자 창 밖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있는 이곳은 상해의 한 주택이다.
층 수는 두 층 뿐이지만 보안과 기타 문제를 고려해 3층으로 지어졌다.
1층의 빈 공간은 기둥과 주차장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호화 주택, 한국에서 마련한다면 얼마나 들까.
무사히 돌아가기만 한다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문제는 여기서의 생활이지.'
다행스럽게도 외국에서의 생활에는 이력이 나있다.
중국은 처음이지만 충분히 생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입맛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조금 걱정이 가지만 뭣하면 항공 택배라도 시키면 된다.
혹은 맥도날드 같은데 가도 괜찮을 터다.
'상해가 스파이스 치킨버거 원조 맞지?'
한국에서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맥도날드에서 나의 단골 메뉴였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상쾌함이란!
원조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들뜬다.
달칵!
방문을 열고 거실을 쪽으로 나갔다.
아침에는 맥모닝밖에 안 팔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위치를 파악해둔다.
주변을 한 번 쭉 둘러 보면 나름대로 보람찬 시간이 될 거라고 본다.
겸사겸사 아침도 떼우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야?'
방 밖으로 나가자 묘하게 공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난방을 켤 시즌도 아니고 방바닥이 뜨거워진 것도 아니다.
이건 얼마 전까지 매일 느껴보던 감각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그럼요, 제 역할이잖아요?"
부엌에 있는 식탁 의자에 츠위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이미 식사 준비를 다 끝내 놓은 모양이다.
내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듯하다.
가사 전반을 서포팅 한다는 이야기는 별반 기대는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침 같은 경우 말도 안 했는데 차마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식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노크라도 하지 그랬어?"
"피곤하실 텐데 깨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생각해 보니 이곳은 각 방이 방음 처리가 되어있다.
이 주택 자체가 게이머가 살기에 정말 최적화돼 있다.
그것이 이번에 한해서는 조금 안 좋게 작용한 것 같다.
'내가 떠들고 있었어도 안 들렸겠구나.'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현재 시각은 오전 아홉 시.
아침 시간은 보통 여덟 시 전후다.
중국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그렇다.
"알지 모르겠지만 게이머들의 생활이 조금 불규칙해. 너무 신경 써주다간 너만 힘들 걸? 적당히 차려두면 내가 알아서 뎁혀 먹을 테니 다음부턴 기다리지 마."
"그런 건 너무 삭막하잖아요. 적어도 식사는 함께 해야죠? 제가 기다리는 게 싫으신 거면 원하시는 방식을 말씀해주세요. 맞출 테니까요."
그렇게 정면으로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다.
상당히 똑 부러진 타입으로 생각된다.
이러다 내가 컴퓨터 책상에서 밥 먹으면 기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룸메가 너무 FM이면 같이 사는 이가 고달파진다.
'뭐, 적응 기간이라는 걸로 해둘까.'
원하시는 방식을 말해 달라.
이쪽에 맞춰줄 생각인 거 같으니 이 참에 정리를 해두기로 했다.
정리라기 보단 일종의 선이다.
일단은 남녀 사이기도 하니 필요한 부분이다.
"가사 전반을 맡는다는 건 어디부터 어디까지?"
"하나부터 열 까지요. 불편한 부분 없게 서포트 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니까요."
아르바이트를 처음 해보는 대학생의 패기 넘치는 기합을 보는 듯하다.
저러다 며칠 지나면 풀이 꺾이는 경우가 태반인데.
무리하다가 제풀에 제가 지치지 않을련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래주는 편이 오히려 좋으니 입을 다문다.
"일단 맡기는 걸로 할게. 하지만 내 방은 손대지 마. 청소도 알아서 할 테니까."
"예, 그렇게 할게요."
대답은 정말 꼬박꼬박 잘한다.
주위 여자들이 워낙 드센 지라 참 신선한 반응이다.
나이가 나이기도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할까.
아니다, 초홍이는 빼애애애액! 밖에 모른다.
'나름대로 얼굴값은 하는 것 같네. 얘가 차분하게 생겼어.'
초홍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애가 아니다.
강력하게 촉이 섰었다.
그에 반해 츠위는 얌전하고 분위기 있는 미인.
지금은 몰라도 차후에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이상의 미인과 같이 살던 나로서는 딱히 감흥은 없지만 말이다.
"연락은 까톡이나 라인으로 하고 전화는 가급적 자제해줘. 아침밥이라던지 여러가지 말하는 거야."
"저 까톡 있어요. 식사 다 하신 후에 번호 알려드릴게요."
라인은 까톡과 비슷한 방식의 메신저 앱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 애들은 라인을 선호한다.
그래서 일부러 신경 써줬는데 결과적으로 괜한 참견이었던 듯하다.
'이 녀석 은근히 고집 센 것 같네.'
어제부터 눈치는 챘지만 다 받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선이 확실하게 그어져 있다.
이것 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못하겠다.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내가 식사를 하는 것을 엄청나게 집착한다.
열심히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일단 내가 느낀 츠위는 그렇다.
나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된장국으로 보이는 국그릇에 담갔다.
깨작깨작.
해줬으니 먹기는 한다만 입맛에 맞을 리가 없다.
어설프게 흉내낸 한국 음식 따위 안 먹으니만 못하다.
외지 생활을 오래해 양배추 김치라도 감지덕지한 지경이면 모르겠지만 그렇지가 않으니까.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어, 먹을 만한데?'
의외로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돼지고기를 넣어서 조금 기름지긴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괜찮다.
한국의 된장국을 중국식으로 재해석했다는 느낌.
결코 대충 조리하지는 않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입맛에 맞아요? 사실 정식 레시피로 한 건 아니고 친구들한테 한국 음식 먹이려고 어레인지한 결과물인데.."
"나쁘진 않은데, 아침부터 기름진 거 먹기는 좀 부담스럽네. 그 부분을 빼면 괜찮아."
한국에 관심이 많다고 했던가.
확실히 그렇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맛이다.
살짝 기름진 건 사실이라도 아주 걸리는 정도까진 아니다.
그냥 맛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기선제압.. 그런 유치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래.'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주는 걸 좋아 해주는 여자.
예은 생각이 나는 바람에 떨떠름하다.
다음부터는 혼자 먹거나, 아니면 식사 시간을 똑같이 맞추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듯싶다.
기쁜 듯이 싱글싱글 눈 앞에서 웃고 있으니 밥이 안 넘어간다.
그렇게 애매한 기분으로 중국에서의 첫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럭저럭 맛은 있었고 불만이랄 건 없다.
굳이 따지자면 밑반찬이 조금 부실했던 정도.
차차 메뉴를 늘려본다고 했으니 개선의 여지가 있다.
'나야 편해서 좋긴 하지만.'
상당히 묘한 기분이다.
든든하게 아침밥을 챙겨 먹었음에도 붕 뜨고 만다.
나는 잘 먹었다고 적당한 인사를 건넨 후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은 경기가 없다고는 들었지만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으니까.'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이야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대략적인 중국에서의 스케줄.
중국의 롤챔스, LPL 일정만 봐도 정리가 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국어다.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에서 대략 정리는 된다.
문제는 소통을 할 때 즉각즉각 머릿속에서 변화이 되느냐다.
이것은 지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케이스의 문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토익 900점대를 베이스로 깔고 가도 해외가면 버벅인다.
어학연수 같은 걸 한 번은 다녀오는 게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근데.. 그러고 보니 그냥 쟤랑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도 한국어를 잘해서 까먹고 있었다.
쟤 중국 사람이었지.
뻘쭘하게도 내 방에 오고 나서야 기억났다.
지금이라면 아직 설거지를 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한담.
고민하던 나는 이내 결론을 내었다.
하루 정도라면 오늘 할 일, 내일로 미뤄도 되지 않겠는가?
타닥, 탁!
그리고 해야 할 일이 꼭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장 익숙한 하나의 게임을 클릭했다.
'중국의 로드 오브 로드라.'
지금껏 여러 서버의 로드 오브 로드를 플레이 해봤다.
북미 서버도, 한국 서버도 유럽 서버도.
이전 생에서는 일본 서버와 대만 서버도 해봤다.
각 서버별로 조금씩 다른 감은 있으나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중국 서버는 많이 다르단 말이지.'
게임 내용이나 기타 여건이 다르다는 건 아니다.
메타 정도야 원래 서버 별로 조금씩 틀린 감이 있으니 그것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단순하게 개수, 서버의 수가 너무나 많다.
북미든, 유럽이든, 대만이든.
대부분 서버들은 주변국 몇 개국이 포함돼 있다.
캐나다와 미국이 속해있는 북미와, 동남아시아권이 속한 대만 서버가 대표적이다.
이는 대충 할당된 게 아니라 유저수에 비례한다.
유저수가 많으면 그만큼 서버의 개수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수가 많다고 그 나라가 강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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