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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상대는 피로라를 밴하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기분이 상한다.
채팅창을 본 90King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픽이 피로라 밴하려고 했는데 올마스터가 막음wwww
-어? 맞라인전 한데? 캬~ 빅잼매치 성사됐네.
-질 수 없지. 가라 90갓! 대륙의 기상을 보여줘라!
단순한 격장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90King은 금새일어났던 흥분을 진정시켰다.
피로라를 밴하지 말라?
상대의 생각은 뻔하다.
쇈, 말화이트, 네네톤, 갓랜.
단단한 챔피언을 하겠다는 속셈이다.
실제로 저 챔피언들은 피로라의 카운터라 유명하다.
'안이해. 너~무 안이해.'
한국에서였다면, 그리고 자신이 아니었다면 먹혔을지 모른다.
그 정도의 상성을 극복 못해서야 자신이 피로라의 장인으로 유명세를 탈 수 있었을까?
피로라 하나로 프로게이머들조차 벌벌 떨게 만들 수 있었을까?
이윽고 상대팀의 밴픽이 종료됐다.
-타이온? 또 AP타이온 하나 보네.
-올마스터 타이온 진짜 잘함.
-뭐래ww 90King이 훨 더 잘해.
-오, 타이온이면 피로라라 비벼볼 만하겠다.
타이온은 피로라와 마찬가지로 비주류 챔피언.
하지만 라인전이 강하다, 그 하나만은 인정을 받는다.
이는 솔로랭크에서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인지라 실제 픽률도 낮지가 않다.
'평타가 아닌 스킬딜 위주의 챔피언을 하겠다.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굴린 결과가 겨우 그거인가?'
자신이 피로라를 몇 판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어설프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90King은 일어나려는 조소를 감추고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다.
올마스터가 그리 시크하다고 했었나.
이번 판을 이기면 1만 위안의 미션을 클리어한다.
더불어 상대의 시청자를 다수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게 작용할 터다.
'주 포지션이 미드, 그리고 원딜이라고 했지. 장인이 어째서 장인인지 보여주마.'
남자의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탑.
다른 라인의 유저로서는 절대로 닿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며 과시한다.
해외의 유명 프로게이머라고 피로라를 든 자신의 아래라는 사실을.
이 한 판에 걸린 판돈이 얼마인가.
반대로 자신은 져봤자 잃을 게 아무것도 없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흥분이 90King을 고양시켰다.
.
.
.
* * *
피로라는 귤선장과 더불어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챔피언이다.
만약 신규 AD아이템이 쏟아져 나온 시즌5에 두 챔피언이 존재했다면?
분명 비주류라는 타이틀을 벗고 괜찮은 챔피언이라 평가가 바뀌었을 것이다.
'둘 다 그 전에 리메이크가 돼버리고 말았어.'
딱히 비주류고, 남이 안 쓰는 챔피언이라서 애착이 있는 게 아니다.
스킬 구조가 정말 재밌고 독특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고 상당히 자주 플레이했다.
'그런 만큼 단점도 정확히 알아.'
피로라의 단점은 무엇인가.
라인전에서 솔킬 따고, 안 따고 이전의 문제다.
한 마디로 챔피언이 너무 공격 일변도다.
오로지 공격에 공격.
때문에 단단한 탱커 위주의 챔피언이 카운터로 손꼽힌다.
혹은 스킬딜 위주로 찍어 누르는 방법도 존재한다.
평타 카운터 스킬을 가진 피로라에게 알맞는 대응법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어찌 될 거라 생각했다면 너무 안이해.'
장인이라는 플레이어들은 상상 이상으로 까다롭다.
같은 챔피언을 수천 판씩 한다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미친 행위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반복하다 보면 묘한 킬각이 보이게 된다.
흔히 데자뷰라 불리우는 그것이다.
여기서 싸우면 내가 아슬아슬하게 이길 수 있다.
저번에 싸웠을 때는 내가 이겼었다.
정의하자면 반복 학습의 결정체다.
한 챔프의 장인들은 그들만의 특별함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장인충을 안 좋아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배울 점들이 있다.
어설프게 카운터치는 건 안 하니만 못한 행위다.
'그러니까 어설프지 않게 카운터 치면 되는 거지.'
챔피언의 근본적인 색깔에 태클을 건다.
피로라와 타이온과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한 마디로 그런 거다.
라인전부터 한타까지 전부 지향하는 바가 갈린다.
사각!
타이온의 도끼가 미니언을 썰어낸다.
스킬이 아닌 평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하다.
'AP가 아니라 AD타이온. 상대도 바보는 아닌 모양이네.'
한 번 찍어보면 상대의 룬을 알 수 있다.
고정 방어룬과 고정 마법 저항력룬.
그리고 공격력룬과 피흡룬이다.
상대는 AP타이온이라 짐작은 했지만 만에 하나도 대비했다.
내가 AD로 갈 겨우를 대비해 방어력룬도 들고 왔다.
참으로 철두철미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결과는 매한가지겠지만.'
상대의 룬을 한 번 찍어보는 것만으로 파악한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신기할 것이다.
요는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대부분의 챔피언 스펙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올마스터라는 것.
모든 챔피언을 다루어내는 능력.
어느 정도 재능일 수 있지만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사각!
어째서 AD타이온을 했을까.
그 의도를 상대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피 터지고 박 터지는 라인전만을 해온 피로라 장인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 서버다.
매판 치열한 사투, 살얼음판을 걸으며 쌓아 올린 실력일 테다.
아무도 안 쓰는 비주류 챔피언으로 저만한 위치에 올랐다?
그가 걸어온 길이 여간 험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정은 하지만 그렇기에 알 수밖에 없다.
지금껏 갑박하게 살아온 그는 경험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인지.
이제 곧 그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특이한 경험을 가지게 된다.
사각!
써컹!
서로 미니언을 한 입씩 교환한다.
하염없이 미니언 막타만 챙긴다.
과연 상대라고 싸우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는 걸까.
'때려봤자 손해라는 걸 알 수밖에 없지.'
처음 겪어보는 상황일 테지만 쌓아온 경험이 어디 가진 않는다.
여기서 나를 한 대 치면 스턴 걸리고 미니언한테 얻어 맞는다.
어차피 킬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대는 알고 있다.
'기분이 아주 깝깝할 거야.'
내가 한 발 더 앞으로 내딛으면 모른다.
어떻게 센스껏 딜교환을 누적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미니언 사이에 숨어서 막타만 챙긴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AD타이온은 단단해져 간다.
타이온의 E스킬 피의 대가.
공격력이 크게 상승하며 대신 평타를 칠 때마다 체력을 잃는다.
공격력 상승폭이 큰 만큼 코스트도 조금 까다롭다.
이를 피흡룬으로 커버하며 다른 한 가지.
'적을 처치하면 체력바가 계속 올라.'
미니언을 잡을 때마다 타이온의 체력이 늘어난다.
얼핏 좋아 보이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스택류 챔피언들이 으레 그렇듯 상대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탑에서 파밍할 동안 상대 챔피언은 다른 라인 가서 게임 터트린다.
'근데.. 피로라는 그게 안돼.'
어떤 챔피언이든 간에 로밍은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로밍이라는 건 그만큼 코스트도 크다.
라인에서 먹을 수 있는 CS를 포기한다.
어설프게 움직였다간 되려 손해가 된다.
또 뚜벅이 챔피언의 경우 성공 확률도 낮다.
로밍이라는 측면에서 피로라는 썩 좋지 못하다.
잘 성장해서 궁극기만으로 적 녹여버리고.
이런 거 아니면 고작해야 딜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입장상 움직이기가 애매하다는 소리다.
-뭐야, 탑신병자가 아니라 파밍 대결임?
-무슨 개서스 보는 거 같네.
-이렇게 농사지으면 누가 유리?
-뭐야, 게임 왜 이렇게 루즈함.
어떻게 보면 개서스를 할 때와 비슷한 라인전 구도다.
그러나 개서스와는 두 가지가 다르다.
타이온의 스킬 구조상 피로라가 딜교환을 걸 엄두를 못 낸다.
'진짜 차이가 나는 부분은 역시 한타지.'
고작 맞파밍 구도였다면 소규모 교전, 혹은 한타에서 어찌저찌 비빌 수 있다.
어떻게 킬 한 번 쓸어담고 백도어로 게임의 주도권을 틀어잡는다.
전형적인 피로라의 캐리 그림이다.
탱커가 피로라의 카운터다?
그건 어디까지나 중반 타이밍의 이야기다.
3코어, 4코어 갖춰질수록 탱커는 딜러를 이기지 못한다.
특히 피로라처럼 피흡이 괴랄한 챔피언은 더더욱이다.
설사 라인전이 틀어졌다고 한들 백도어란 방식으로 캐리가 가능하다.
지금까지 피로라로 높은 승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래서일 테다.
사각!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느긋하게 파밍 한다.
상대가 조급함을 느끼도록 아주 천천히.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미니언을 수급한다.
.
.
.
* * *
상대가 싸움을 회피하고 파밍만을 지향한다.
사실 중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라인전이다.
서로 멱살 붙잡고 내팽개치는 게 보통인 이곳 중국 서버다.
그럼에도 경험이 있다.
90King은 여러가지 형태의 라인전을 전부 머릿속에 새기고 있다.
극도로 사리는 상대 또한 만나본 경험이 적지 않다.
'근데 좀 많이 사리네.'
처음에는 야유도 해보고 슬쩍 딜교환도 걸어봤다.
하지만 상대는 우직한 나무처럼 버티고만 서있다.
심지어 갱킹조차도 자신의 편이 아니다.
서로 정글러가 왔을 때 유리한 건 누구일까.
확정 스턴이 있는 타이온이라는 사실은 두 말하면 입만 아프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사각!
써컹!
결국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서로가 티아매트를 갖추고 파밍만을 지향한다.
이렇게 파밍을 하는 것도 분명 나쁘지 않은 흐름이다.
알고 있을 텐데도 무언가가 심각히 걸린다.
'타이온의 스킬이 어땠더라..?'
타이온은 피로라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 챔피언이다.
피로라도 티몽보다 픽률이 낮은데 말 다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타이온은 AP가 아닌 AD타이온이다.
-오 타이온 체력 봐바.
-타이온궁이 피흡 쩔지 않나?
-궁 키면 거의 좀비임ww
-이대로 한타 가면 누가 유리?
확실히 타이온의 궁극기는 위협적이다.
아이템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막대한 피흡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사기였다면 타이온의 픽률이 높았을 테다.
'안 쓰는 챔피언은 안 쓰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그것을 피로라 장인인 자신이 말하긴 뭣하지만 어찌 됐든 사실이다.
타이온이 안 쓰이는 이유는 한 마디로 할 게 없어서 그렇다.
가진 바 CC기가 중단거리 스턴 하나.
아무리 피흡이 좋다고 한들 상대가 내빼면 못 잡는다.
죽자고 달려드는 타이온을 무시하고 쭉 빼면 그만이다.
혹은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스킬을 퍼부어서 순삭하면 된다.
피흡이고 나발이고 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그만.
그런 무능한 타이온에 비해 피로라는 할 수 있는 것이 명확하다.
"한타 가서 봐바. 쟤네 핑크스 무조건 죽고 시작한다."
90King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쭉 달려가서 원딜러에게 궁극기를 꽂아 넣는다.
시전만 되면 반항이 불가능한 검의 댄스.
이어지는 세 번의 평캔은 확실하게 원딜러를 갈아버린다.
그렇게 한타에서 원딜러가 죽고 시작한다?
나머지는 그냥 병풍일 뿐이다.
특히 지금 흘러가는 게임의 양상은 더욱 그러하다.
-서폿 배티면 핑크스 못 지키겠네kkkk
-쟤네 핑크스 죽으면 딜 넣을 사람 없잖아?
-이건 정확히 90갓이 캐리하는 그림이다.
-쭉쭉 성장해서 피흡템 두 개 갖춰지면 피로라 못 막지!
한타를 쓸어담고 백도어로 캐리한다.
탱커가 피로라를 이길 수 있는 건 피흡템이 하나일 때다.
배고픈 하이드라에 피를 마시는 칼.
이 두 가지 아이템이 갖춰지면 탱커가 주는 데미지따위 간지럽다.
아이템이 나오면 나올수록 피로라의 스플릿을 절대 막을 수가 없다.
그것은 타이온이라 해도 마찬가지.
궁극기만 빼 놓으면 1대1에서조차 무능한 챔피언이 된다.
─적팀의 포탑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렇듯 탑에서 서로 파밍만 하고 있으면 결국 팀운 싸움으로 귀결된다.
만에 하나 미드와 봇이 터졌다면 자신이라 할 지라도 힘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팀운조차 상대의 편이 아니다.
상대팀에서 가장 껄끄러운 구리가스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원딜러는 내가 죽이면 그만이고.'
질래야 질 수가 없는 구도가 이루어졌다.
탑에서 줄곧 파밍만한 결과물.
한타에서 허무하게 무너진다면 꼴이 우습게 된다.
─아군이 탑라인의 1차 포탑을 지목.
봇라인에 용은 없다.
아군이 이미 잘 챙겨놓은 상태다.
유리한 아군은 스노우볼을 멈추지 않는다.
상대는 이를 막으려 한다.
곧 탑라인에서 불거지게 될 양 팀의 대치.
장인이 어째서 장인이지 그 이유를 담아낸다.
참으로 통렬한 한 판이 될 것이다.
적어도 90King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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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봐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600화가 넘었네요ㅎㅎ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