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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어제 저녁, 만찬을 즐기며 츠위와 오갔던 이야기들.
그녀의 진짜 입장을 밝힌 것 이외엔 큰 야단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정에 큰 변화가 있을 건 확실하다.
나는 기상하자마자 일련의 이야기를 전했다.
매일 아침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이는 단 한 사람 뿐이다.
예은은 의외로 그럴 수도 있겠다, 침착한 반응이었다.
"생각하고 있었어?"
<대충은.. 구단주까지는 설마했지만.>
설마하다.
뒤집어 말하자면 염두에 두기는 뒀다는 소리다.
내 연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미인계라면 회장 손녀가 아닌 진짜 미인, 그것도 남자를 잘 다루는 불여우 같은 기지배를 엄선했을 거 아니야? 뭐.. 고년도 조금 안심할 수는 없긴 한데…>
모니터 너머로 압박감이 느껴진다.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흘깃 째려봐 온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억울하다.
<둘 다일 가능성도 고려해봤지만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아닌 것 같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마. 숨기지 않고 이야기 다 할 테니까."
뾰로통하던 예은의 얼굴이 조금은 편해졌다.
방금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불안한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자꾸 나를 쪼아대면 나도 섭하다.
예은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너, 요즘 인기 많더라?>
"개인방송 말하는 거야? 혹시 봤어?"
내가 요즘 한 인기가 하기는 한다.
한 번 방송을 키면 20만이 가뿐히 넘어가는 시청자수.
최고 시청자수는 무려 40만을 넘긴 적이 있다.
나로서도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을 정도로 엄청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의 스타성이 메마르지 않는 한 어쩔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예은이 말하려는 바는 조금 달랐다.
<팬클럽도 있고 아주 잘 나가셔?>
"..그렇게 먹혀들 줄은 나는 상상도 못했지."
드라마에나 나오는 나쁜 남자 이미지가 먹히다니?
솔직히 한 번 상상해봤는데 진짜 이렇게 되니 나도 놀랍다.
중국의 여성 롤유저들 사이에서 내 인지도가 꽤나 높은 듯싶다.
어제 저녁 식사 이후 실제로 확인해봤다.
츠위가 알려준 여러 로드 오브 로드 커뮤니티 사이트들.
나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았는데 특히 여성 유저들이 나를 좋아한다 카더라.
듣기로는 팬카페도 여럿 개설돼 있다고 한다.
차마 확인하는 게 두려워 가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싫으면 그만둘까? 평범하게 방송해?"
<딱히 싫은 건 아니야. 내 남자가 인기 많다는 건.>
낯 부끄러운 소리를 해온다.
사귀기 전에는 이런 이야기 주고 받기 껄끄러웠다.
하지만 기정사실이 된 이후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연애의 재미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예은과 아침 대화는 평소보다 조금 길어졌다.
약속했던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예은도 딱히 태클을 걸진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괜찮은 듯 행동해도 속내는 많이 불안한 걸지도.
늘 강한 척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제 일은 결과적으로 잘된 걸지도 몰라.'
회장 손녀님과 동거하며 수발을 받는다.
혹시 미인계 같은 음흉한 꿍꿍이는 아닐까?
차라리 속셈이 있어서 떠봤다는 쪽이 이해가 된다.
예은의 말마따나 둘 다일 가능성 아직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아마 아닐 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앞으로는 더더욱 사무적인 관계가 될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시점에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스물 여섯이나 되는 친손들 중 몇에서도 특히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그녀다.
상당히 큰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쿡야 게임단의 구단주 자리를 맡게 됐다.
두 어깨에 걸린 무게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거울 게 분명하다.
볼 일도 끝났으니 가정부 일도 그만둘 테고 얼굴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가장 타당한 추측이고 예은과도 이미 이야기를 나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뇨, 계속 할 건데요?"
조식을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마침 츠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어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그녀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딱히 할 것도 없고.. 구단주, 생각보다 한가하거든요."
"아, 그래…."
그렇게 말을 하면 나도 딱히 대꾸할 말은 없다.
근데 미국에 있을 때 핫숏은 어지간히 징징댔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그 양반은 감독도 겸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도 한국에서 일처리를 해왔기에 어떤 일을 하는지는 대략 알고 있다.
"원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데요."
"..그거 참 뼈에 사무치는 말이구나."
이 녀석 갈수록 말이 험해진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일까.
어쨌든 말하려고 하는 바는 전해졌다.
확실히 납득이 갈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구단주가 해야 할 일은 크게 사람을 보는 눈, 그리고 행동 방침의 효율성. 후자의 경우 저희 기업 방침이 있고 전자는 이래 봬도 자신 있거든요."
그래서 가사 전반을 도맡으며 천천히 해도 딱히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단다.
오히려 나에 대한 행동 방침을 정하는 일에 가장 고민이 되는 일이라고.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덕에 판단이 쉬워졌고, 여러가지 배운 것도 많다고 한다.
자신들은 게임단 운영이 초기 단계라 힘들었는데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면 웬일로 칭찬을 해온다.
"그래서 자꾸 이것저것 물어봤구나. 근데 아침부터 웬 카레..?"
"어제 저녁 해놓은 건 오늘 아침에 먹기로 했잖아요. 샐러드랑 해서 적당히 드세요."
아침은 어쩔 수 없긴 하다만 왜일까.
이제부터 식사도 적당히 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예감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 반대.
지금껏 집안에서 편안히 솔로랭크만 돌리던 일상은 사라졌다.
.
.
.
* * *
그로부터 며칠 후.
변한 것이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나의 일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깥 세상.
"말씀하신 게임단은 롤드컵 때문에 많이 바쁜 모양입니다.."
"아, 그래요? 수고했어요."
나는 코치의 말에 대강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곳은 쿡야 게임단의 숙소 내부에 있는 연습실이다.
선수들은 전부 이곳에서 생활과 연습을 함께 한다.
'나는 그냥 출퇴근이지만.'
게이머들이 굳이 공동 합숙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지방에서 온 이들을 위해 숙소 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는데 같이 먹고 자야 싸게 먹힌다.
'그리고 친밀해지기 위함. 롤이 팀게임인 이상 필요한 부분이 맞지.'
근데 나한텐 딱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생활은 숙소에서 하고 있다.
특별 대우라느니 팀원들이 불만이 나올 수 있는 부분.
맞는 소리지만 쟤네들도 양심이 있으면 입도 벙끗 못한다.
"그럼 스크림은 다른 팀이랑 잡고 연습 내용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진행해줘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시현씨는.. 참가 안 하시고요..?"
지금까지 해왔던 연습의 내용.
다름 아닌 기본기를 일컫는 말이다.
기본도 안돼있는 애들을 데리고 뭐 어떻게 연습을 진행해.
오히려 같이 하는 애들 입장에서 스탭만 꼬인다.
대체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감도 안 잡히게 된다.
실제로 이 때문에 중국 애들이 갈수록 태산이었다.
'한국 프로들이 중국에 간 게 장기적으로 안 좋은 결과를 낳았었어.'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한국 프로들이 억대의 연봉을 받으며 중국으로 건너갔다.
대표적으로 SKY T1 K의 유일한 적수, 삼선 게임단이 전부 말이다.
당시를 기준으로 따져봤을 때 중국은 몰락의 가도를 걷고 있었다.
원딜의 나라?
헤이샤오가 은퇴한 이후 이렇다 할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평균적인 게임 수준이 상당히 격하됐다.
그런 상황에서 한창 날뛰던 한국 프로들을 스카웃 했다.
중국 내 선수들과 새로 합류한 한국 선수들과 손발이 맞지를 않는다.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같이 게임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장벽, 언어가 문제시됐다.
운영을 하고 발을 맞추려면 즉각즉각 소통이 돼야 한다.
중국어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보니 당연히 힘들었다.
'한국 선수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던 건 인정해.'
스카웃된 입장에서 일단 성적은 내야 한다.
돈을 엄청나게 받았는데 팀 성적이 안 좋으면 체면이 망가지지 않는가.
재계약에서도 불이익, 혹은 계약 자체가 뺀찌 맞는 수가 있다.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독특한 행태를 취하며 극복하려 했다.
'그냥 솔로랭크 하듯이 막 캐리를 해버린다던가.'
이것은 의외로 중국 내에서는 엄청 잘 먹혔다.
그냥 수준 차로 씹어 먹는다.
안 그래도 중국 유저들은 쌈박질을 좋아한다.
솔로랭크에서 일어나는 행태는 당연 프로 레벨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쌈박질의 장에 끼어들어서 쓸어 담고, 조금 운영으로 굴려 주고.
이 두 가지만 해도 충분히 중국에서 잘 나갔다.
그런데 우물 안을 벗어나 세계로 나가 보니 그게 아니더라.
타닥, 탁.
나는 키보드를 두들기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롤드컵 같은 국제 대회에 참전해서도 중국은 나름 선방했다.
라인전을 비롯한 중반까지만 본다면 충분히 상위 클래스에 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은 정반대.
세계 무대에서는 반드시 운영을 필요로 했다.
단순한 쌈박질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고.. 악순환이 계속된 셈이지.'
문제는 그 방식이 중국 내에서는 정말 잘 먹힌다는 거다.
당장의 성적이라는 달콤한 선악과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대부분의 중국팀들이 앞다투어 한국 선수들을 영입했다.
'나도 처음에는 사실 그러려고 했었는데.'
사실 양심에는 조금 찔리는 일이다.
내가 하려 했던 게 바로 그거니까.
물론 나라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던 건 아니다.
나는 다른 한국 선수들과 달리 중국어도 아니까 천천히 교육시켜 나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속한 게임단에 한정해서는 받은 돈값 빠듯하게 해줘도 될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 만남부터 완전히 틀어졌다.
같은 게임단에 속한 녀석들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뒷일 생각 안 하고 혼자 다 쓸어 담자.
부담따위 느낄 부분 하나 없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변해버렸다.
'사과도 받았고, 츠위에게 부탁 받은 것도 있고.'
나는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화면에서 나오는 내용은 어떤 게임단들의 스크림.
당연히 스크림은 외부 관전이 불가능하지만 난 내부 관전이다.
게임 시작부터 관전자로 들어가 살피고 있다.
쿠! 챠앙!
쿡야의 정글러 마파두부의 탈리반 3세가 깃창으로 진입했다.
닿기만 한다면 확실하게 갱킹 성공이다.
점멸이 있는 상대가 당해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이런 거 들어가지 말라니까 고치지를 못하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이득이다.
솔로랭크라면 다분 시도할 만한 행위가 맞다.
하지만 대회에서는 사고의 방식을 조금 달리해야 한다.
저 상황에서 만약 적팀의 정글러 리심이 역갱을 대기했다면?
깃창이 빠진 탈리반 3세는 반항도 못하고 끔살 당한다.
리심과 달리 음파로 들어가고 방로로 나오고 그런 게 안된다.
마파두부가 역갱을 당해 죽었다면 거기서 굴러가는 스노우볼.
아군 탑라이너 갈릭까지 다이브 당할 우려가 생긴다.
안 죽는다 해도 빅웨이브와 함께 1차 포탑이 손실되고 만다.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고작 점멸인데 반해 손해의 최대치는 탑라인이 터질 정도다.
설사 역갱이 아니더라 해도 마찬가지다.
봇라인은 현재 라인을 푸쉬하고 있다.
탈리반의 위치가 드러나는 순간 바로 갱각이 잡힌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그냥 상대가 못해서다.
'평생 저런 애들 상대할 거면 내 말 안 들어도 되지만 아니라면 들어야지.'
서로 수준대가 낮으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쟤네도 실수하고, 우리도 실수하고 하하호호 웃으면서 소꿉장난 하면 된다.
그러나 우승을 목표로 한다면 이 정도는 기본이다.
차근차근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게임을 가져오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차차 나아지고는 있으니 조금만 갈구자.'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한 것들이 바로 이 녀석들 기초 잡아주는 거다.
최소한 기초는 알고 있어야 대화가 통한다.
하나하나 이해 못해서 갸우뚱 해대면 어떻게 같이 게임을 하겠는가.
그 기초 작업은 차차 이루어지고 있다.
다가오는 LPL에서 같이 경기를 하게 될 녀석들.
쿡야-베이더스를 최소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것만으로도 쿡야는 중국 내 상위 게임단에 들 저력을 그럭저럭 갖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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