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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언제나 하나
벨케트와 카센.
그 둘은 덴마크 출신의 형제 게이머다.
한 살 많은 건 벨케트 쪽으로 동생과 함께 프로게이머를 지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필연과도 같았던 부모님의 반대.
불투명한 인생 설계.
당장 잘 나가던 선수도 다음 시즌에 떨어져 나가는 프로의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가혹했다.
그래도 하나 다행스러운 일은 있었다.
E-스포츠 판이 나날이 커져 가고 있다.
이 흐름에 몸을 맡긴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세상 사는 일이 만만할 리 없었다.
두 형제는 서로를 의지한 채 프로의 세계라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했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떠내려갈지 모를 위험천만한 장소.
그러던 나날, 중국의 TCG라는 게임단에서 수십만 유로의 매혹적인 제안이 들어왔다.
'정말 행운이었지.'
벨케트는 반년 전의 그날을 회상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습을 마치고 보금자리에 돌아왔다.
그런데 출처를 알 수 없는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굉장히 어설프게 쓰여져 있는 덴마크어.
그 내용은 더욱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중국 게임단에서 자신들을 영입하고 싶다, 그런 제안을 보내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이 제시한 금액은 본래 자신들 연봉의 수 배를 가볍게 뛰어 넘었다.
"그때 받아들이길 잘했지?"
"나도 형의 선택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해."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 부스 안에서 두 형제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당황스러웠던 형제는 여러모로 귀찮은 절차를 걸쳐 알아보았다.
TCG는 중국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문구 회사였다.
100%는 아니여도 어느 정도 신용할 만했다.
물론 리스크가 있는 선택이다.
유럽에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입단 당시만 해도 2군에 불과했던 게임단.
윈터 시즌에 겨우 1군의 말석에 이름을 올렸다.
스프링 시즌에 4강이라는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슬슬 자신들도 인지도가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집어던진다.
어쩌면 ChadoRE라는 녀석처럼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지 모른다.
나름 1년 가까이 프로게이머 생활을 한 만큼 그 정도로 여파가 크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이적의 장소가 중국인 이상 구설수에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차피 저지를 바에는 차라리 웃으면서 가자.
동양의 문화를 동경해서 중국에 왔다.
완전히 날조라고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중국어는 모르지만 중국 문화에는 관심이 있잖아."
"이곳 생활도 나름 괜찮고. 식문화가 상당히 흥미로워."
SNS를 통해 팬들에게 강력히 호소한 결과 별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감안하지 못했던 한 가지 이유가 보태졌기 때문이다.
이래 봬도 덴마크는 유럽에서 프로게이머의 명가로 소문이 자자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드라이너 프로즌도, 이렐리아 장인으로 소문난 위크드도 덴마크 출신이다.
게다가 현재 북미에서 가장 잘나가는 프로게이머 중 하나라는 미역슨.
그조차도 덴마크 출신이라는 사실에 많은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니까 너희도 중국에 가서 유명세를 떨치고 와라.
적지 않은 팬들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응원을 해줬다.
두 형제로서는 그 팬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지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LSPL에서 팀을 우승시키고 본선 무대인 8강 자리에 무려 조 2위로 올라섰다.
"여유를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유럽에 비하자면 한참은 널널해서 참 좋아."
"팀에서 원하는 기대치가 높지도 않고. 무엇보다 중국어만 배우면 은퇴 이후 코치직이 보장된다잖아?"
받아들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달콤한 꿀과 같은 유혹이었다.
두 형제는 TCG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자리에 있게 됐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이상적이고 선수 생활은 탄탄대로.
불안하기만 했던 프로게이머 생활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중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생각지도 못했던 강적이 자신들의 앞을 막아 섰다.
모를 수가 없는 올마스터, 아니 서양권에서는 Unknown Error로 유명한 그가 무려 상대팀에 있다고 한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었지만 형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LCF때는 CLC소속이었던 탓에 위협적이었던 거고. 어중이떠중이 신생 게임단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우리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
"맞아, B조의 멤버가 무난해서 그렇지 A조에 있었더라면 쿡야는 4위도 간당간당했을 거야."
아무리 강력해도 혼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둘이서 충분히 마크해낼 자신이 있다.
Unknown Error에는 비할 바가 안된다고 하나 자신들도 유럽에서 제법 인정을 받던 몸이다.
팀의 평균 레벨 또한 이쪽이 높아 무조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결정적으로 올마스터의 솔로캐리 밑천이었던 마검사가 리워크됐다.
아니, 그것만이었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그는 리워크된 마검사로 무려 중국 솔로랭크의 삼관왕을 달성했다.
자신들도 중국 서버 솔로랭크를 하고 있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유럽 서버에 비할 바는 아니긴 해도 1서버 만큼은 인정할 만한 수준대였다.
그런데 그 1서버를 가볍게 즈려 밟으며 정점을 찍어버렸다.
하지만 그 마검사는 리워크에 이어 너프까지 돼버렸다.
한타 캐리력이 이전에 비해 반절도 안되는 수치다.
속된 말로 관짝에 못이 꽝꽝! 박힌 셈이었다.
"그래도 워낙 챔프폭이 넓은 선수니까. 그 정도는 문제되지 않겠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우리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잖아. 철저하게 승리를 목표로 함이 예의겠지."
밴픽 직전까지 잡담을 나누던 둘은 코치에 의해 제지되었다.
아무래도 덴마크어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머지 중국 선수들이 불편해 한다.
그들도 중국어로 이야기를 해대긴 마찬가지지만 여기는 중국이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듯 중국에 왔으면 중국 현지의 분위기에 맞추는 게 옳다.
이곳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배척이 강한지.
수없이 예를 봐온 두 형제는 조심하고 있다.
거슬리지 않도록 현장의 분위기에 맞춘다.
그리고 SNS등의 대외적인 활동도 빼놓으지 않으며 스마트하게 중국 프로 생활을 즐긴다.
그것만으로도 수십만 유로의 연봉이 굴러 들어오며 생활이 보장된다.
형제는 기회의 땅 중국에 발을 딛은 첫 세대의 프로게이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코치가 절대 방심하지 않고 사전에 이야기가 됐던 대로 착실하게 진행해달랍니다. 쿡야에 대해 상당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전혀 문제 없습니다. Unknown Error가 가지는 무게.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게임내에서의 구상도 완벽합니다."
코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통역사의 말에 벨케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중국어는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다.
아주 간단한 인사 정도 할 수 있는 게 전부다.
그것만으로도 좋아해주고 있으니 느긋하게 가도 될 테다.
게임 내 의사소통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웬만한 건 핑이나 사인을 통해 주고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마찰을 위해 팀 내의 운영 체제도 깔끔하게 갈고 닦았다.
탑과 정글 위주로 게임을 풀어나가며 미드와 봇 중 하나만 신경 써준다.
라인전이 끝난 이후에는 정글러인 자신이 팀을 이끌고, 탑솔러인 동생이 스플릿을 한다.
일련의 운영 방식은 그 효율성이 이미 입증되었다.
복잡하지 않으며 군더더기도 없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훌륭하게 최소화시켰다.
"듣기로는 60분 내에 끝낸다고 하던데. 신고식 좀 빡세게 해주자 동생아."
아무리 더우니 버빈이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리한테까지 화살을 돌린 건 아니지. 우리도 그 사람 싫어하니까 이해해주지 못할 건 아니지만."
올마스터가 단상 위에서 저질러버린 신랄하기 그지없는 발언.
기분 나쁠 것도 없다.
이는 그동안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던 두 형제에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더우니 버빈이 외국 출신 선수를 싫어하듯, 외국 출신 선수들은 더우니 버빈을 싫어한다.
그런 그에게 시원하게 막말을 쏟아낼 수 있다니.
자신들의 복수를 해준 것 같아 오히려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조금 신경 거슬리는 말은 했지만 그건 오늘 경기로 끝낸다.
승리를 가져가는 것으로 퉁쳐주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쿡야-베이더스와의 첫 번째 세트, 그 밴픽이 시작되었다.
"뭐야, 진심이야? 설마 너프된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기왕 연습했으니 써먹겠다.. 그런 거 아닐까? 단순한 팬서비스일 가능성도 있겠고.."
서양인 특유의 큰 코가 들썩이며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정상급 프로게이머답게 자존심이 세구나.
하지만 그 자존심이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올마스터가 가져간 챔피언은 얼마 전 너프되었다는 그 마검사였다.
.
.
.
* * *
팬들이 그렇게나 고대하던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LPL이 시작한 이후 눈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올마스터.
바로 그가 첫 번째 세트부터 출전했다.
또 간을 보면서 나머지 다섯 선수들만 경기를 치르게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이번에는 진짜였다.
아직 경기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선수석에 앉아있다.
실제로 밴픽을 진행하고 있는 선수명도 올마스터가 맞다.
그렇게 두근두근 기대감이 증폭되던 와중에 문제가 하나.
하필이면 올마스터가 해서는 안될 챔피언을 픽박고야 말았다.
여기에 대해 한 소리 하지 않을 더우니 버빈이 아니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솔로랭크에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챔피언이죠. 올마스터 선수가 굉장히 꿀을 빨았다. 모르시는 분들도 많지만 챔피언 선택에 있어 굉장히 약삭빠르기로 유명합니다. 그렇기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이 있는 자리는 세계 최고의 리그 LPL입니다. 팀원들 덕분에 쉽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너무 안이한 태도를 취하는 건 아닐까요?>
불과 10분도 되지 않은 일이다.
더우니 버빈을 향한 폭언에 가까운 막말.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도 그럴 게 외국 선수다.
어투는 유창하다고 하나 본래부터 말 짧기로 유명하다.
단어 선택에서 조금 미스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로 마이크를 건네주지 않으려고 했던 더우니 버빈은 반박할 수 없었다.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대는 속을 잠재우고서 경기를 진행해야 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비판의 색이 강해지는 건 필연이었다.
<버빈 캐스터의 말대로 챔피언 스펙이 엄청나게 사기였죠. 덕분에 솔로랭크에서 제법 성적을 거뒀다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너프 이후의 마검사는 한타에서 쓸모가 없어졌다는 평이 지배적이에요. 챔피언 선택은 선수의 의지에 따른 일이 맞지만 팀에게 피해를 준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번 경기에서 마검사의 선택이 실수로 작용한다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날카로운 설명이었습니다. 한타에서도 애매하지만 라인전 단계에서도 좋은 픽이 아닙니다. 그런데 팬들이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픽을 했다? 쿡야 베이더스의 코치진이 얼마나 고민이 많을지 제 3자인 저도 느껴지네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사회 생활은 타이밍인 법이다.
더우니 버빈의 양 옆에 있는 해설위원 중 한 명, 쥔차이가 올마스터를 까내리는데 크게 일조했다.
다른 한 명의 해설자 하오핑은 묵묵하게 밴픽창만을 주시했다.
모두가 더우니 버빈의 언변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다.
올마스터의 픽을 끝으로 밴픽이 완료된 쿡야-베이더스.
당연히 정글이라 여겼던 마검사가 라인 스왑을 하지 않았다.
<쿡야의 미드라이너인 아몬드와 교체 투입이 되었을 때부터 설마했습니다만 미드 마검사인 모양입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올마스터를 너무 쉽게 본 모양입니다. 시청자분들도 아실 테지만 리워크된 마검사는 주문력 아이템 선택이 불가능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팀원들과 담을 쌓고 사는 모양이군요!>
<그동안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이유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다소의 불화가 있었다면 확실히 그럴 만도 하네요.>
또다시 트집 잡을 거리를 찾아내 더우니 버빈이 진심으로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중계진으로서 문제가 되는 태도, 아닐 수 없지만 농담인 듯 수습하며 진행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빠지지 않고 올마스터를 은근하게 비아냥댔다.
상해 LPL을 유치하고 있는 관계자들은 더우니 버빈의 맹렬한 지지자라 카더라.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과연 연기가 날까?
똑같이 중계석에 선 쥔차이가 그의 눈치를 보는 것만 해도 대략의 사정이 엿보인다.
조롱, 불안, 기대.
세 가지 감정이 얽히고설키며 관심을 북돋는다.
쿡야 베이더스 대 TCG의 첫 번째 경기가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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