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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할 줄 알고 있었소
단상에서 내려와 부스로 돌아왔다.
뻣뻣하게 굳었던 팀원들이 한숨을 내쉰다.
"후우.. 현장 분위기 장난 아니네요."
"저희는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인데.. 괜찮으세요?"
괜찮나, 괜찮지 않나 묻는다면 당연히 괜찮지는 않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딴 생각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숨이나 돌려. 이제부터는 숨 몰아쉴 시간도 없을 테니까."
글자 그대로 숨 막히는 혈전이 벌어진다.
웬만큼 신경이 굵더라도 이 자리에서 서게 되면 실수가 다반사다.
방금 전 관중들의 반응을 생각한다면 더더욱이다.
"그래도 올마형 덕분에 저희는 조금 숨통이 트인 것 같은데요?"
"살기가 다 올마형한테 쏟아지는 바람에.. 아!"
"설마 일부러..?"
낯 간지럽게시리 감탄스럽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인상 한 번 팍! 주니 알아서들 제 볼 일을 본다.
'제멋대로들 상상하긴..'
관심이 집중되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강렬한 한 판.
단순하게 잘하는 해외 선수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격차를 가졌는지 똑똑히 알려준다.
비웃음을 흘렸던 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선사한다.
중립의 입장을 가진 이들은 확실하게 매료시킨다.
오만한 중국인들의 콧대를 짓누르기 위해선 그 정도는 필요하다.
'쟤네들이 말한 것도 아예 생뚱맞은 소린 아니지만.'
나를 제외한 다섯 선수들은 무대 경험이 적다.
오늘 상대하게 될 IC라는 이름값과 현장의 분위기는 여태까지와 격이 다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경기를 펼쳐야 승산이 조금 더 확고해질 것 아닌가.
결국은 나 좋으라고 한 짓이다.
딱히 신경 써줄 목적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지.'
첫 번째 세트의 밴픽이 시작된다.
5전 3선승제로 치러지며 마지막 세트는 블라인드 픽이다.
준결승전과 마찬가지의 규칙이지만 다르다.
선수들이 게임에 임하는 각오가.
무대가 가지는 육중한 압박감이.
같은 조건에서도 전혀 다른 경기를 만들어낸다.
'따져야 할 변수가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야.'
다전제, 그리고 결승전이라는 여건부터가 어마어마한 심리전을 요한다.
때문에 첫 번째 세트는 중요도는 각별하다.
받아치는 쪽이 될 것인가, 밀어 붙이는 쪽이 될 것인가.
이번 첫 단추를 제대로 꿰매는 것이 승리의 열쇠가 된다.
"저희 밴픽 전략은.. 어떻게 하죠?"
"말했잖아. 상대하는 것 보고 인스턴트로 짤 거야."
"저번에는 저한테 임기응변은 안 좋다고 하신 게.."
"내가 너냐."
"힝.."
세상사 원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어설프게 하면 안 하니만 못하지만 그 반대.
완벽하게 할 수만 있다면 임기응변은 상당히 좋은 대비책이다.
말하자면 편의점 도시락과 수제 음식의 차이다.
요리 실력이 안된다면 그냥 사먹는 게 낫다.
반대로 요리 실력이 되면 해먹는 게 맛과 영양, 그리고 식비까지 고르게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충분히 되고도 남는 사람이다.
IC는 밴픽 전략이란 면에서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과 격을 달리한다.
해외 경험도 많아 어지간한 수는 다 꿰뚫고 있는 팀이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역이용할 찬스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지켜 봐야겠지.'
나라고 모든 것을 100% 예상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바는 있으나 밴픽 구도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즉석으로 판단해서 밴픽 전략의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카드는 이미 준비돼 있다.
상대의 첫 번째 밴이 눈에 들어왔다.
.
.
.
* * *
쿡야 베이더스의 부스 맞은 편.
IC의 선수들이 바쁘게 밴픽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실시간으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피드백을 해댄다.
"마검사, 자드, 그리고 순대로 밴한다?"
"상대 밴에 특별히 이상 없는 이상 세웠던 대로 가자."
세웠던 전략이라 함음 다름이 아니다.
이미 준결승전 당시 인터뷰에서부터 스포일러가 됐다.
올마스터에 대한 집중 견제.
그가 주로 다루는 챔피언들을 밴해버린다.
"챔피언 폭이 넓다고 해도 혼자서 캐리가 되는 건 이 정도겠지."
"하드 캐리형 챔피언만 주의하면 돼. 특히 스플릿 되는 자드 같은 거."
"올마스터의 자드는 정말.. 내주기라도 하면 야단 난다."
IC는 중국의 롤유저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강팀이다.
그럼에도 대회 준비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꾸준하게 성적을 내며 기복이 적다는 것.
단순히 잘하기만 해서는 이룰 수가 없는 일이다.
이번 결승전은 더더욱 빠듯하게 준비해왔다.
중국에서만 활동한 게임단들은 올마스터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IC는 해외 무대에서의 경험이 적지 않다.
해외팀들에 대한 관심도 많으며 실제로 전략 등도 많이 참고한다.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올마스터 그가 얼마나 한 기량과 변수를 가진 선수인지.
적당한 대비로는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낳게 될 정도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분석해서 철저하게 마크하면 된다. 이 소리잖아?"
"실수만 하지 말자, 실수만. 그러면 무조건 이기니까."
과거 IC는 한국의 강팀 얼밤을 준수한 밴픽 전략으로 격퇴한 적이 있었다.
오늘 사용하게 되는 전략은 당시의 응용판이다.
밴카드 세 개를 소비해 한 선수를 견제한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그 선수를 말리기까지 한다.
이런 전략을 쓰게 되면 보통 나머지 네 팀원들이 미쳐 날뛴다.
로드 오브 로드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닌 만큼 말도 안되는 악수다.
하지만 이 악수가 오늘의 경기에서는 승리를 향한 지름길이 된다.
"오, 상대도 제법 밴 좀 하네. 초반 스노우볼 견제하려고 강챔들만 잘랐어."
"배티, 거미여왕, 이블퀸..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구만. 그렇게 해주면 오히려 우리는 나쁠 게 없지."
IC는 여러가지 전략을 준비해왔지만 뼈대가 되는 것은 하나였다.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의 승부를 노린다.
선수들의 평균 기량이 훨씬 뛰어남에도 어째서?
이기려 한다는 건 질 수 있다는 리스크도 함께 깔려있기 때문이다.
간혹 유명한 강팀들이 듣도 보도 못한 약팀한테 깨지는 경우가 있다.
독특한 전략을 사용했다든지, 방심을 했다든지, 실수를 해버렸다든지.
그런 건 어디까지나 자잘한 원인이고 크게 보자면 이유는 하나다.
초반에 게임을 너무 말린 탓에 주도권을 잃어버려서다.
운영으로 뒤집는다면 좋겠지만 꼭 좋게만 풀리리란 보장이 없다.
실수가 실수를 낳으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게임이 비벼지면 역전은 불가능하다.
"천천히 라인전 넘기고 한타 싸움으로 가면 질 수가 없잖아?"
"좀 그렇기는 하지만 뭣하면 풀템전 가도 되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생각해두는 것은 찬성이지만."
요컨대 라인전에서 뭔 일만 안 일어나면 된다.
한타와 운영 구도로 가면 자신들이 무조건 유리하다.
스플릿이라던지 골 때리는 경우는 사전에 방지한다.
그것을 위한 세 개의 저격 밴.
마검사, 자드, 리픈이라는 스플릿 챔피언을 잘랐다.
이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인데 상대가 변수 만들기 좋은 챔피언을 밴해주기까지 했다.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 밴픽 구도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낭보가 겹쳤다.
"탈리반과 쇈이 남았네.. 쇈 가져 간다?"
"그래, 안정적으로 갈라면 역시 쇈이지."
"탈리반 뺏어도 어차피 또 킹트록스 할 테니 그게 낫겠다."
가져가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인 쇈.
프로 무대에서 탑솔러의 완전체라 칭송될 정도다.
라인전 안정적이고, 라인 스왑에도 좋고, 글로벌 궁극기까지 존재한다.
탈리반 3세 또한 그에 준하는 카드지만 역시 고르자면 쇈이 맞다.
"그리고 여기에 필리언까지 가져가면 조금 심하게 안정적인가?"
"안정감이 더해져서 나쁠 건 없지. 조합은 충분히 괜찮고.. 밴픽부터 이미 게임이긴 거 아니야?"
"그래도 방심하지 마. 그 올마스터니까."
장기전으로 간다면 질 수가 없다.
뼈대가 되는 전략을 완벽하게 행할 수 있는 밴픽 구도가 성립됐다.
과연 올마스터는 이를 어떻게 받아칠지.
관심이 이는 가운데 먼저 의아함을 자아낸 건 다른 챔피언들이었다.
.
.
.
* * *
밴픽만으로 승패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던가.
솔로랭크에서도 아군 조합 어지간히 따지지만 대회는 당연히 더하다.
양 팀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밴픽 싸움은 정말 치열해진다.
<절대 강력한 픽 내주지 않겠다는 쿡야 베이더스! 리심과 탈리반을 동시에 가져갔습니다?>
<쇈을 뺏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리심과 탈리반을 둘 다 가져가면 나름대로 선방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되면 팀에 AD의 비중이 너무 높아지는데요?>
올AD는 정말 마법 같은 단어다.
10대0으로 지고 있는 게임도 상대 올AD다!
왠지 역전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꾸게 만드는 한 마디다.
<쿡야의 생각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남은 픽이 미드든 탑이든 AP를 가져가면 충분히 구색을 갖출 수 있겠고요. 문제는 IC의 생각이 쿡야와는 정반대라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 짚어주셨습니다! 필리언과 이즈레알을 가지고 갔어요? 두 챔피언 모두 최소한 20분 이후의 중후반을 바라보는 픽이거든요. 너희 라인전 강챔들 밴할 거면 해! 우리는 한타로 이길 거다! IC가 아주 지능적으로
상대의 전략을 역이용하고 있네요!>
해설위원 쥔차이의 외침에 관중석이 떠나가라 호응한다.
솔직히 이해 못한 사람이 태반이지만 어쨌든 IC가 잘하고 있다는데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이곳 상해에서 IC의 기반이 얼마나 두터운지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다.
<미드 필리언.. 올마스터가 준결승전에서 보여주었던 카드죠. 뺏어오는 효과까지 있기 때문에 이거는 이미 승패가 6대4로 기울었다! 저 더우니 버빈이 단언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미드 필리언이 아니에요! 서폿 필리언에 미드 코리아나. 상대가 어떤 도박수를 꺼내오든 상관이 없다. 정말 안정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조합을 구축했습니다. 저는 7대3 예상하겠습니다!>
여전히 짝짜꿍이 정말 잘맞는 더우니 버빈과 쥔차이의 듀오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확실히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진행된 밴픽 구도를 보자면 IC가 많이 유리하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 쿡야와 달리 IC는 전혀 싸울 생각이 없다.
그렇게 무난무난 게임이 흘러가면 유리한 쪽은 어디겠는가?
리심도, 탈리반도 초중반에 재미를 못 보면 한타에서 썩 웃어주는 픽은 아니다.
그에 반해 IC는 챔피언들 하나하나가 한타 좋기로 유명한 픽들이다.
<이즈레알 얼음 장갑 나오면 리심, 탈리반으로는 절대 못 잡습니다. 기동성도 기동성인데 단단하기까지 하거든요!>
<설사 잡아도 필리언이 부활시켜 주죠. 정말 산 넘어 산입니다. IC가 오늘의 경기에 얼마나 한 노고를 쏟았는지 게임이 시작하기도 감이 잡힙니다.>
한 번 된통 당한 탓에 닥치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내가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다.
기회를 잡자마자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올마스터를 까내릴 수는 없지만 IC를 띄워주는 건 괜찮지 않겠는가?
실제로 현장의 반응은 이 이상이 없을 정도로 좋다.
이러저러 해서 IC가 유리할 것 같다.
한 마디 꺼내면 아주 자지러진다.
<마지막 쿡야의 픽 종료되는 것으로 밴픽 마무리지어지겠는데요. 여기서 대체 어떤 픽이 나와야 그나마 쿡야가 할 만해졌다. 가능성이 있을까요?>
<올마스터가 그렇게나 잘 다루기로 소문난 자드나 아니면 이번 LPL에서 뛰어난 활약 보여주었던 마검사.. 아, 둘 다 밴이 됐었지요? IC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기승전 IC의 찬양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시간은 흘러간다.
이윽고 3초, 2초, 1초 쿡야의 밴픽이 종료되었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카드는 최근 기세가 많이 죽었다는 챔피언이었다.
<이거 유물이 나와버렸군요..? 반년이 조금 안되었던 스프링 시즌에 반짝 유행했습니다. 제임스, 럭키, 트페 등과 함께 포킹 메타의 주를 이루었던 미달리! 하지만 이제는 먹히지가 않죠?>
<포킹전에서는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핵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맞으면 겁나게 아픕니다. 문제는 그런 포킹 구도가 나오려면 최소한 2코어, 가능하면 3코어 이상 나와야 하는데 IC가 그때까지 기다려줄 팀이 아닙니다. 이런 한물 간 챔피언보다 최근에 핫한 파사딘 같은 걸 꺼냈으면 올마스터 특유의 캐리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나.. 아쉽지만 밴픽은 종료되고 말았네요.>
어떻게 보면 올마스터를 까내리는 소리지만 결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미달리는 솔로랭크에서조차 꺼려지지 한참은 된 챔피언이다.
메타에 맞아서 아주 잠깐 반짝한 적은 있지만 금새 가라앉았다.
IC가 만만한 팀도 아니고 어딜 감히 3코어, 4코어 장기전을 노리겠는가?
밴픽 싸움부터 완전히 IC의 의도대로 놀아났다.
중계진들도 사실상 IC가 이긴 거나 다름없다는 분위기다.
기세가 더욱 더 등등해진 수만 관중들이 광기 어린 듯 IC를 외친다.
과연 길고 짧은 쪽은 어느 쪽이 될지.
결승전 첫 번째 세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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