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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호랑이
이른 아침의 공항.
그럼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이곳 북경이 중국의 수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오, 사람 진짜 많다. 혹시 베이징이 상하이보다 커?"
"아뇨, 베이징보다 저희 상하이가 훨씬 크고 멋져요. 봐바요. 시설부터가 낡았잖아요."
츠위답지 않게 살짝 흥분해서 따져댄다.
나중에 들어보니 북경과 상해는 흔히 말하는 견원지간이란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도 지역 감정이라는 게 있는 듯하다.
그걸 모르고 말실수를 한 셈이니 츠위가 흥분할 만했다.
그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츠위네 일행과 헤어졌다.
아무래도 나는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이지 않은가.
공항 수속을 밟는 시간은 츠위네보다 조금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 기다렸지? 그런데 무슨 소란이야?"
"그게 설명하자면 사정이 긴데.. 우리 일은 아니에요."
수속을 마치고 다시 합류하니 주위가 시끌벅적하다.
공항 특유의 분위기가 원래 이렇기는 하다만 사유가 다르다.
어떤 일행과 일행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기도 한데..'
세상사 가장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란 소리가 있다.
시선도 주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섭한 노릇이다.
관심 없는 척 걸어가면서 슬쩍 바라봤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난 일행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어, 명진이 아니야?'
삼선 블루에 소속돼 있던 시절 팀의 정글러였던 명진이.
스프링 시즌이 끝나고 중국으로 갔다는 사실은 모를 수가 없다.
얼마 전에 까톡으로 연락까지 나눈 적이 있으니 더더욱이다.
아는 사이인 이상, 눈도 마주친 이상 못 본 척 가기에는 걸린다.
"어.. 시현씨?"
"아는 사람 일인 거 같아서 잠깐만 갔다 올게. 소란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나를 말리려던 츠위를 작게 타일렀다.
싸움이 나고 있는 장소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자 들려오는 소리가 명확해진다.
소음의 근원지가 누구인지도 알아챌 수 있었다.
떡대가 쩌억 벌어져 있는 거대한 몸집의 사내.
뒤에서 보니 오크라도 한 마리 서있는 느낌이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사건은 실시간으로 커져 가는 중이었다.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주위 사람들은 말리기 바쁘다.
잠자코 살펴보니 소란을 피는 사람은 남자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진정시키려고만 한다.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말이야 어?? 쥐꼬리 만한 연봉 받는 놈들이 허리가 아주 빳빳해?"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해준 덕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사라졌다.
남자는 유명 게임단의 소속으로 대표전을 치르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듯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지도가 높은 프로게이머인 모양.
그런 남자가 어째서 이 사람 많은 공항에서 소란을 만들고 있을까.
'일단 사정은 들어봐야겠지.'
아무리 지인의 일이라지만 무작정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
원래 사람이 흥분하면 다소의 말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다.
지척까지 걸음을 옮긴 나는 명진이에게 말을 걸었다.
"형! 여긴 어쩐 일로.."
"오랜만이다. 근데 무슨 일이야?"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추자 단박에 알아본다.
내 입장에서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다.
잘 보니 명진이는 물론 헬멧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인사를 주고 받기엔 상황이 영 마땅치 않았다.
"그게.. 저희가 인사를 안 했다고 저러네요.."
설명을 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떨떠름한 표정이다.
공항에서 다른 게임단을 만났고 그냥 지나가려던 도중 시비가 걸렸다라.
이게 참 어이가 없는 상황이긴 한데 묘하게 데자뷰가 인다.
철없던 고딩 시절에 겪어 본 듯한 이야기다.
"그런 인간들은 그냥 뭐 밟았다 생각하고 무시하는 게 상책인데.."
"저희도 당연히 그러려고 했죠.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자꾸 붙잡고 저러고 있어요."
명진이도 굉장히 난감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한 쪽의 입장만 듣고 판단하긴 뭣하지만 이건 좀 아닌 듯하다.
명진이네 코치로 보이는 사람이 좋은 말로 타이르고 있음에도 남자는 막무가내다.
"이제 막 데뷔해서 숟가락 얹진 놈들이 선배에 대한 예우라고는 눈곱 만큼도 없고. 어디서 못 본 척 지나가려고 해? 확!.."
상당히 흥분한 듯한 남자가 팔을 올려 손찌검을 하려 한다.
나도 모르게 남자의 내리치기 직전 손목을 붙잡고 말았다.
위치상 남자의 오른쪽에 있기도 했거니와 더 이상 두고 봐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먼저 데뷔하고 나이 좀 더 먹은 게 그리 자랑입니까. 적당히 하시죠?"
"넌 뭐야, 이 손 안 놔? 어? 어?.."
부여 잡힌 손목을 내치려는 듯 안간 힘을 써오지만 안된다.
내가 하루 이틀 운동한 사람도 아니고 완력에는 자신이 있다.
남자가 덩치에 비해 영 실속이 없는 탓도 크지만 말이다.
결국 내 손을 떼지 못하자 무안한지 팔을 내리며 소리를 쳐온다.
"어디서 운동 좀 했나 본데.. 너도 프로게이머 나부랭이냐?"
"댁은 뭐 얼마나 잘난 사람이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내 대답을 들은 남자가 피식댄다.
안 그래도 컸던 목청을 더욱 높여왔다.
"어디서 썩은 동태 같은 눈알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이 바닥에서 끝장나고 싶어?!"
기가 살았는지 나를 향해 삿대질을 드높여온다.
내 눈알이 아름다운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는다.
힘으로는 안되겠으니 자신의 위치를 활용하려는 듯 거들먹거린다.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내 알 바는 아니다.
"이 바닥에서 뭘 하던 그건 내 자유고 댁은 댁 앞가림이나 하시는 게 어떠신지?"
"이것 봐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돼?! 너 같은 건 내가 한 마디만 하면 어?.."
나 같은 건 뭐 어떻게 하려는지 고대하던 도중 말이 끊겼다.
남자의 뒤에서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선글라스의 사내가 대화를 중단시켰다.
둘이서 무언가 속삭이더니 남자의 낯빛이 숙연해졌다.
이윽고 태도가 180도 달라진 남자가 헛기침을 내뱉어왔다.
"후배들을 교육하던 참에 오해가 조금 생겼나 본데.. 크흠!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
조금 전까지는 세상 누구보다 한가해 보이던 남자가 무슨 심정의 변화일까.
마음 같아선 갈 때까지 가보고 싶지만 장소가 영 좋지가 않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남자가 일행들과 함께 헐레벌떡 내빼버렸다.
"형, 괜찮아요?"
"나는 괜찮긴 한데 너희들은?"
명진이와 일행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대여섯 명.
뒤에서 츠위와 함께 걸어오는 내 일행도 마침 대여섯 명.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의 이야기도 들을 겸해서 자리를 옮겼다.
.
.
.
* * *
이러저러 일이 있었던 탓에 숙소에 도착하는 일이 조금 늦어졌다.
숙소는 베이징 올림픽 시절 선수들이 숙박했던 선수촌을 그대로 빌려 쓴다.
작은 빌라 느낌의 아파트로 내부 시설은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한다.
시간은 몇 년 흘렀지만 당시 베이징 올림픽 선수촌은 시설 좋기로 말이 많았다.
'선수들만 사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넓디 넓었던 선수촌 대부분은 일반인들에게 분양되었다.
그래서인지 창 밖을 보니 어린 애들이 뛰어 놀고 있다.
중국 치고는 드물게 자연 환경 조성이 잘돼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 풍요가 인다.
'그래도 공기는 썩 좋지 않아서 창문을 열고 싶진 않네.'
중국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공기 오염도가 극단적으로 높은 베이징이다.
종종 뉴스에 나오곤 하는 황사 등이 이곳 북경에서 시작됐다고 하니 말 다했다.
환기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 참 눈물 겨운 동네다.
'한동안은 여기서 살아야 할 테니 적응을 하는 수밖에 없으려나.'
상해의 공기도 달갑진 않았지만 북경은 숨을 쉬기 힘들 지경이다.
오는 길에 봤는데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산소 마스크로 중무장한 시민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나도 하나 구입해두는 게 좋을지도.
무아지경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던 나의 눈에 한 번 낯이 익은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 그 녀석들인가. 선수로서 온 이상 당연히 여기 살긴 하겠지.'
공항에서 시비가 붙었던 오크 같은 덩치의 남자.
그와 일행들로 보이는 이들이 뚜벅뚜벅 공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블랙 홀스.. 전 TWA의 원딜러라 했던가.'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명진이네 애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 이번 대회에 너희들도 참가를 하게 된 건가.
아쉽게도 명진이네들은 준결승전에서 탈락을 했다고 한다.
베이징까지 오게 된 건 단순히 경기를 보기 위해서라고.
공항에서 어쩌다 시비가 붙은 건지도 자세히 듣게 됐다.
'E-스포츠의 판이 커지다 보니 참 별의 별일도 다 생기는구만.'
사실 스포츠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정말 흔하게 있는 일이다.
특히 체대 같은 곳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이야기 한 번쯤은 들어본다.
학번에 의한 상하관계.
비슷한 일이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E-스포츠 판이 커지다 보니 기존 선수들의 입김이 세졌다.
그래야만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고, 불합리한 일도 사라지니 긍정적인 이야기다.
문제는 이를 악용해서 텃세를 부리는 선수들이 의외로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단체든 꼭 그런 인간들이 한두 놈씩은 있는 법이니까.'
살짝 찔리기도 하는데 나는 다 선수들 잘되라고 해주는 갈굼이다.
군대에서 후임한테 찔린 상병장들이 변명하는 레파토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어쨌든 그런 인간들이 있어 명진이도, 헬멧도 중국 이적 초기에 조금 고생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미 다 적응을 했고 최근에는 외국 선수들을 바라보는 눈초리도 많이 개선돼서 살 만하다고.
대충 그러한 안부 인사로 시작해 저기 보이는 블랙 홀스에 대한 뒷사정도 알게 되었다.
<저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제가 활동하고 있는 광저우에 완바 게임단이라고 있는데요..>
중국의 열두 지역 중 하나, 광저우LPL에서 우승을 차지한 게임단이 바로 완바였다.
그런데 그 완바 게임단은 창단 배경이 조금 많이 특이하다고.
재벌 2세가 지지난 롤드컵을 보고 삘이 꽂혀서 게임단을 만들었댄다.
나 같은 서민들의 입장에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아니, 게임단 운영비가 한두 푼이 아닐 텐데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미래의 일을 몰랐다면 아리송한 나머지 츠위에게 캐물어봤을 것이다.
중동의 어떤 부자는 취미 삼아 축구 구단을 몇 개씩 인수했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알고 있던 미래에서 중국 E-스포츠판이 급부상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였다.
재벌 2세들이 로드 오브 로드에 반하는 바람에 게임단을 하나씩 가지고 싶어했다.
농담으로도 치부하기 힘든 일들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정말 투자할 만한 사업이 됐으니 판이 커져도 이상하지는 않지.'
그 광저우의 재벌 2세는 롤드컵에서 대활약을 했던 TWA의 원딜러를 영입했다.
구단주가 무려 선수의 팬.
게임단 내에서 블랙 홀스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셈이다.
<감독이 한 소리 했다가 역으로 퇴출 당했다는 괴담도 있고..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는 게 광저우 프로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에요.>
그래도 게임단 내부 일이다 보니 쉬쉬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 다른 게임단들한테까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공항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엔 그러한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같이 이야기를 들었던 츠위는 굉장히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러 몰상식한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만약 그쪽 구단주를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항의를 하겠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마 사과를 받는 게 고작일 거란 이야기도 덧붙였다.
'철없는 재벌 2세가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니 참 웃긴 노릇이네.'
현실은 어쩌면 드라마 이상으로 막장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답답한 일도, 손해 보는 일도 많이 생기지만 그 반대.
나는 핸드폰을 꺼내 다가오는 중국LPL의 대진표를 체크했다.
'이래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소리가 나오는 거구나.'
열두 지역의 대표들이 겨루게 되는 중국LPL.
A조부터 D조까지 각각 세 팀씩 나뉘어진다.
그리고 각 조에서 단 한 팀만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팀도 운만 좋으면 충분히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다.
반대로 운이 없으면 실력이 있음에도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듣기로는 지난 스프링 시즌에서 THEY가 그랬었다고 한다.
'이번 시즌에도 또 하나 운이 안 좋은 팀이 생길지도 모르겠구만.'
다가오는 조별 리그가 한층 고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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