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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자신은 있었으나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올라섰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다.
더욱이 앞으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의 선수들이 중국, 그리고 다른 나라의 E-스포츠판에 뛰어든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내 개인으로서는 상당히 허무할 수도 있다.
나야 미래를 보고 왔기 때문에 해외 선수들에 대한 차별 의식.
이를 알고 있었고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당연하게 다가올 것이다.
만약 누군가 헛소리를 한다면 단박에 타박을 받을 것이다.
그 당연함이 오히려 가슴이 벅차오는 일이다.
'공기의 감사함이라.'
사실 엄청난 개소리인 게 애초에 공기가 없었으면 사람도 없었다.
인류라는 것 자체가 진작 멸종을 맞이했거나, 만들어지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대충 의미 자체는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감사함을 내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면 보람이 있다.
나는 앞으로 걸어나가 단상에 섰다.
단상 앞에는 아니, 360° 전후좌우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만한 감상이지만 솔직하게 그런 느낌이 든다.
내가 이들의 중심에, 중국의 중심이 되었구나.
듣기로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 모인 관중들만 20만 명에 가깝다고 한다.
기나길었던 LPL의 마지막.
그리고 나 또한 놀랐던 아름다운 폭죽에 홀려 이 자리를 찾았다고.
어찌 됐건 정말 돈 주고도 볼 수가 없을 광경이다.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 나오며 기분이 고양된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 아 들리십니까?"
손에 잡힌 마이크에서 입을 떼는 데엔 시간이 조금 소요됐다.
그만큼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장소다.
그래도 어떻게 몇 마디를 뗄 수 있었다.
'나 중국어 꽤 잘하는 구나.'
처음 중국에 왔었을 적이 생각난다.
그때는 몇 마디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과거 중국어를 수 년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현지의 환경은 모른다.
처음 접하는 중국인들은 내심 무서웠다.
말을 하면 과연 알아 듣기는 하려나.
츠위가 없었다면 이렇게나 유창하게 말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쿡야의 애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서는 일은 힘들어졌을 것이다.
뭐,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은 인연을 사귀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들이 많은 추억이다.
"이 자리에서 경기를 치른 일, 올라오는 과정, 마주쳤던 모든 상대들. 전부 하나하나 기억해보고자 조금 늦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올마스터입니다."
나의 말에 관중들이 뜨겁게 호응한다.
별것 아닌 말임에도 주의 깊게 들어주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상상치도 못했던 관경이다.
순수한 호의.
언제나 그러했듯 프로게이머로서 경기력으로 팬들을 사로 잡았다.
사실 나조차 긴가민가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그렇고 그런 걸로 소문이 파다하지 않던가.
우승은 둘째 치고 차별 의식을 타파하겠다는 도전은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피부로 확실하게 느껴진다.
이들은 내 경기를 봐준, 좋아해주는 팬이구나.
<올마스터 선수, 그리고 쿡야 베이더스! 이 자리에 오기까지 IC, THEY, 로얄CN! 내로라하는 강호들을 꺾고 올라왔습니다. 그 과정이 고되었던 만큼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겠죠. 어떠십니까? 소감, 하실 말씀 있으면 속 시원히 부탁드립니다!>
내가 속 시원히 질러버린다면 그냥으로는 안 끝날 텐데.
이곳 베이징과 이번 대표전의 캐스터를 맡고 있는 카오야를 보며 환히 웃었다.
물론 이제 와서 구태여 일을 벌릴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섭한 노릇이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중국에 왔을 때는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중국 팬분들이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우시더라구요. 그 입맛에 맞추는데 정말 갖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야만 했습니다. 앞으로 오는 한국 선수, 그리고 다른 해외 선수들에 대해서 조금만 너그러운 입맛을 가져주신다면 제 개인적으로 많이 감사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폭탄 발언이다.
어지간한 자리도 아니고 이 자리에만 수십만, 시청자들을 포함하면 수천만.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로드 오브 로드 팬들이 함께하고 있다.
굉장히 민감한 문제이고 이를 공식적으로 언급할 기회는 앞으로 영영 없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한 마디다.
나의 말을 어느 정도 산정을 해두었는지 카오야가 매끄럽게 진행을 이어나갔다.
<중국 팬들의 입맛이 굉장히 까다롭긴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저만 느끼나요? 정말로 수많은 팬들이 이번LPL 내내 올마스터 선수의 경기를 기대했습니다. 이 넓디넓은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이 만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아직까지도 함께 해주시고 있는 이유! 설명이 필요 있겠습니까?>
카오야의 진행에 현장의 관중들이 호응한다.
원했던 이상 그대로는 아니지만 충분 만족스럽다.
어쩌면 나는 세상을 변화시킨 걸지도 모른다.
이와 반대되는 광경을 보며 올라온 만큼 감회도 남다르다.
나를 시작으로 나머지 쿡야의 선수들, 그리고 코치.
하나하나 인터뷰, 개인사, 묵혔던 말들을 쏟아낸다.
결승전이 짧게 진행돼서 그런지 선수들의 인터뷰 시간이 길게 할애됐다.
사실 이 자리까지 오는 길, 나의 독주와도 같았다.
결승전 직후 단상에서 비로소 저마다의 여정을 토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터뷰의 시간이 끝나간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시상식이 거행된다.
<로드 오브 로드 프로 리그, 그 영광스러운 우승을 맞이한 쿡야 베이더스에게 주어지는 상금! 300만 위안과 함께 앞서 들었던 순금 트로피가 수여됩니다. 축하드립니다!>
롤드컵을 제외한다면 가히 최대 규모가 아닐까.
세계 최고의 리그를 칭하는 주제에 조금 가볍기는 하다만 아무래도 일 년에 세 번 열린다.
한 해에 한 번, 세계적으로 개최되는 롤드컵보다는 여러모로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국 리그를 재패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나에게 있어서도, 앞으로 중국 리그에 몸담게 될 선수들에게도 말이다.
중국에서의 가장 큰 여정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게 되었다.
<아쉽게 지기는 했으나 지난 시즌의 우승자로서 뒤지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준 로얄CN입니다. 상금 160만 위안이 수여됩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관중들이 하도 많다보니 시상식이 참 흥이 겹다.
우승과 준우승의 수상이 끝났지만 나에게는 아직 차례가 남았다.
카오야 캐스터가 큰 목소리로 예정된 수상을 알린다.
<마지막으로 이번 LPL 대표전의 MVP! 이견이 갈릴 일이 없겠죠.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선수를 큰 목소리로 외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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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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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승전이 끝난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 주변 거리.
한 달이 넘게 이 주변 상가는 축제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그 난리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때문에 더욱 들떠 오를 수밖에 없다.
너도 나도 마지막을 불사르며 주위의 상가는 새벽이 되어도 불빛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현재 시간 오전 1시.
뒷골목의 흔하디 흔한 술집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조우한다.
"여기입니다."
테이블에 앉은 한 명의 젊은 남성이 손을 흔들다.
술집, 그리고 이 늦은 시간대임에도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그에 반해 남성을 향해 걸어오는 이는 발걸음이 위태위태하다.
"꽤나 취한 듯하네요? 괜찮겠어요?"
"..이야기 듣는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조금 어눌한 중국어.
현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단박에 티가 난다.
취한 쪽의 남성은 로얄CN의 미드라이너 차도리였다.
"오, 생각했던 것보다 중국어가 유창하셔서 다행입니다."
"중국에서 지내온 게 하루이틀은 아니니까요. 일단은 쉬러 간다 하고 나온 입장이니 용건만 간단히 해주시죠."
남자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가벼히 말을 놀릴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화가 성립되었을 때다.
또한 회식 자리를 중간에 째고 나온 만큼 차도리의 사정도 고려돼야 한다.
애시당초 태도는 별 상관하지 않는 듯 젊은 남자는 말을 이었다.
"제 용건은 간단합니다. 저는 드림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얼핏 가벼이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다.
드림팀이라는 게 뉘집 개이름도 아니고 쉽게 만들 수 있을 줄 아나.
선수들의 포섭에 드는 비용은 얼마이며, 그 전에 고개를 저으면 그만이다.
자신이 속한 게임단을 떠나는 일은 쉽게 결정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저를 그쪽 팀에 받아들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죠. 대답은 천천히 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오늘 밤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술에 약한 편 인지라."
때마침 점원이 내온 조그만 술잔과 술 한 병.
중국의 국민술이라 불리우는 이과두주다.
소주보다 두 배 이상 도수가 세 웬만한 성인 남성도 한 병이 힘들다.
그렇게 독한 술인 만큼 고주망태가 되는 것은 예삿일이다.
물론 순수하게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보내주신 제안은 봤습니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일단 관심은 있습니다."
"하, 그거 다행이네요. 다른 라인은 몰라도 미드는 흡족한 사람이 없어서 곤란했는데.. 그 올마스터도 단박에 거절해버렸고."
젊은 남성의 말에 차도리의 눈가가 순간 굳었다.
하지만 이내 나지막한 한숨을 뱉으며 호흡을 골랐다.
남자는 금전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결승전의 경기는 당연히 보았겠고, 첫 번째 스카웃 대상은 올마스터임이 당연하다.
명실상부 쿡야 베이더스의 우승을 견인한 슈퍼 에이스이며 이견이 갈리지 않는 이번 LPL의 MVP.
이미 중국 내에서는 헤이샤오와 동급으로 치부되고 있을 정도다.
그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에게서 인정을 받아냈다는 소리다.
지난 LCF에 이어 두 번이나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또한 경기가 끝나고 약간의 일도 있었다.
차도리가 표정이 떨떠름해진 것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하지만 게임단의 구단주 입장에서 더 나은 인재를 추구하는 건 바람직한 이야기 아닙니까?"
"..보통 본인 앞에서는 대놓고 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완바가 실력주의제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 것 같네요."
젊은 쪽의 남성, 완바 게임단의 구단주 완바린은 결승전을 아주 흥미 깊게 관람했다.
한 경기, 한 경기 엄청나게 화제를 낳은 만큼 굳이 완바린이 아니어도 그러하리라.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완바린은 그 일어난 흥미를 현실로 옮길 힘과 재력을 가지고 있다.
완바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맞습니다. 사실 제가 원래 로드 오브 로드를 즐기는 정도로만 했는데.. 알면 알수록 게임에 깊이가 있더라구요. 한 사람으로는 절대 최고의 게임단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차도리는 완바린의 이야기를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완바 게임단의 에이스는 오직 한 명.
조별 리그에서 광탈을 한 이유는 그 때문이 컸다.
사실 쿡야 베이더스를 만난 게 결정적이지만 그렇게도 해석될 만하다.
"하지만 말씀하신 올마스터는 혼자서도 잘 해내던 데요."
"역시 그렇죠? 그래서 저도 눈독을 들였지만 세상사 돈으로 안되는 일도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지만."
어차피 술 한 잔 마시면 잊어버릴 자리다.
때문에라도 오갔던 이야기는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제멋대로인 태도와는 별개로 준비성은 있는 듯 완바린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딱히 사무적으로 정리된 계약서 쪼가리는 아니었다.
"뭡니까? 계약서는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서두를 필요 있나요. 그보다 듣고 싶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드림팀. 꼭 반영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요."
고작 뒷골목의 술집에서나 오갈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켕기는 부분이 있는 화두다.
이미 게임단에 몸을 담고 있는 선수.
계약 기간이 남은 선수를 캐내려고 하는 구단주.
물론 실질적으로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다.
정말로 하룻밤이 지나면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뜨거웠던 베이징 올림픽 경기장에서의 날밤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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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가 거의 끝나 가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