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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자고 일어나니 뒷골이 엄청나게 땡긴다.
거하게 마셨던 만큼 그 후유증이 대단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래간만의 숙취네.'
중국에 온 이후로 음주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다음 날의 아침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공허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깨닫게 된다.
아, 이곳은 한국이 아니지.
그때의 기분이 참 설명이 안될 정도로 묘하다.
되새겨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게 상당히 떨떠름하다.
때문에 한동안은 음주를 삼가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어젯밤은 정말 흠뻑 취하도록 마셨다.
그럼에도 이전처럼 묘한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어째서 일까.
이유는 간단하게 정리된다.
'우승 해버렸구나..'
마치 남 일인 듯 이야기했지만 알고 있다.
술이 덜 깨서 정신이 몽롱하기 때문이다.
그 우승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오던 날들.
침대에 누워 있자니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열 두시라니..!'
참 마법 같은 일이다.
딱 5분만 눈 감고 있어야지
응, 30분 지났어.
학창 시절 헐레벌떡 뛰어 학교 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어쨌든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토록 목표했던 것이 드디어 성과가 나왔다.
중국LPL의 우승.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참 쉽게 이룬 듯도 싶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팀원들을 어지간히 굴렸지 않았던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그러기를 잘했다.
상해LPL은 그렇다 치고 대표전은 힘들었을지 모른다.
갈수록 높아지는 선수들의 수준.
이에 따라오지 못했다면 뒤쳐질 뿐이다.
또한 대회의 기간이 길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속전속결은 안되는 거였어.'
만약 쿡야의 팀원들과 금이 간 사이로 지냈다면.
오랫동안 이루어진 대회 과정에서 분명 지쳤을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쿡야 애들은 더더욱이다.
이제 겨우 데뷔를 막 마쳤다.
그런데 팀원 한 명이 하드 캐리해서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간다.
만약 내가 테이커나 미역슨 같은 재능 덩어리라 승승장구만 했다면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정말 오랫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고.
기연을 얻게 된 후로도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렇기에 선수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
뭐, 블랙 홀스 같은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한순간에 떠버리자 자신이 뭔가 된 마냥 설친다.
만약 그렇게 반짝 뜬 거라면 나라도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정말 밑바닥 생활이 길었다.
과거를 잊기에는 너무 고된 길을 걸어왔다.
구태여 꽃길을 마다하고 중국에 온 이유.
돈을 벌기 위해서도 당연히 크다.
세상사 돈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
물질만능주의, 너무 속된 말 같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이 공감한다.
돈으로 안되는 게 뭐가 있겠느냐.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다.
'돈으로 안되는 것도 없지 않아.'
내가 중국에 온 이유는 돈 때문이다.
동시에 돈으로 안되는 것을 이루기 위함이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산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양심이 없지는 않다.
만약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가 나를 과거로 보내줬다.
그 의도가 정말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일까.
물론 무어라 귀뜸해준 것도 아니고 강제성은 없다.
그렇다 해도 생각 정도는 할 수 있다.
이를 행한 신에 준하는 존재가 있다면 무엇을 원할까.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선택된 이유.
나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중 하나로 늘 상상해 왔다.
'E-스포츠가 정말 많이 발전했지.'
의도해서 행동한 것도 분명 있다.
하지만 상당수가 우연이 겹쳤다.
이를 테면 핫숏이 나를 스카웃했다.
그리고 도씨 삼형제가 프로가 돼버렸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전자는 내가 받아들인 거지만 애시당초 그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까.
우연도 이 정도로 겹치면 필연이기 마련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거긴 해도..'
어쩌면 중국행도 그 연장 선상일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성공을 했으니 환원을 하자.
겸사겸사 돈도 벌어오자.
그간 중국은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외의 선수들, 특히 우리나라 선수들을 경멸시했다.
요상하게도 한국, 중국, 일본 이 3국은 사이가 좋지 않다.
그 여파가 E-스포츠에도 고스란히 묻었다.
내가 중국에서 당했던 것들은 예삿일이다.
그 이상의 어이없는 것들이 한국 선수들을 기다렸다.
지금이 아니라 내가 알던 미래의 일.
세간에 알려진 것들만 훑어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아예 상식을 벗어났다.
앞으로는 있지 않을 일들이다.
나의 행보가 그러도록 만들었다.
'뭐, 알아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거액 받고 중국에 간 한국 선수들이 무시 받고 천대 받고 어이없는 일을 당한다.
얼핏 생각하기가 힘든 일이다.
돈을 그렇게 줘놓고 왜 선수를 학대하지?
이곳 중국이란 나라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대륙의....jpg 인터넷 짤방들이 괜히 나도는 게 아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없을 미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내가 했지만 서도 만족스러운 현실이다.
똑, 똑.
방에 두 번 노크가 울렸다.
잠시 기다리자 같은 크기의 울림이 또 있었다.
대답을 할까 싶었지만 그만뒀다.
어젯밤 진탕 마셔댄 탓에 극심한 숙취.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
목이 걸걸 해서 당장 차가운 물 한 모금이 급하다.
끼익..!
내가 대답을 안 하니 자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살며시 문이 열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어온다.
눈을 살짝 떠보니 역시나 츠위였다.
츠위 말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둑일 테니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도 난처하긴 마찬가지다.
남자 혼자 사는 방에 무서운 것도 없나.
"쿠앙!"
"꺄아!"
나름 덜 놀라라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했는데 그게 안됐다.
숙취 때문에 목이 걸걸 해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듣는 입장에서 까무러칠 만도 하다.
발랑 자빠진 츠위가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분명히 엎어졌다.
깜짝 놀라 허리를 튕겨 일어나니 정말이었다.
투명한 액체가 바닥 가득 흘러 넘친다.
".......미안."
"…."
아무래도 츠위가 나를 생각해서 물 한 컵을 가져온 모양이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조금 심각하게 난처하다.
얼어붙은 공기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금방 닦을게요."
"아니, 내가 닦을게. 방 주인이기도 하고."
결국 일어나서 주섬주섬 행주를 챙겨 바닥을 닦았다.
액체가 끈적한 걸로 미루어봐 그냥 물은 아닌 듯싶다.
모르긴 몰라도 꿀물 비슷한 종류라 생각한다.
무엇인지 물어보기엔 차마 염치가 없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바닥의 물기는 물수건으로 닦아 마무리했다.
"꿀물인가..? 마침 목 말랐는데 타와줘서 고맙다."
"아뇨, 대추차에요. 그리고 어차피 엎어졌는데요 뭘."
"…."
점점 더 미안해져만 간다.
의도치 않게 하루의 시작이 배배 꼬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츠위가 먼저 말을 걸어와 주었다.
"열 시쯤 노크를 했는데 주무시나 해서 안 깨웠어요. 그리고 조금 전..... 아직 주무시는 거 같아서 들어왔는데…"
"..내가 미안해."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도 츠위가 신경을 써준 듯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일단 미안하다.
이 상황이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으면 하는 바램이다.
"식사 하실래요? 아니면 아직.."
"완전 배고프니까 빨리 나가자. 와~ 배고프다."
어제 술자리에 츠위도 있었다.
제법 마신 걸로 아는데 몸가짐이 반듯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보다 훨씬 제대로 된 어른일지도 모르겠다.
아침, 아니 아점도 아닌 점심 시간이다.
방 밖으로 나가자 맡기만 해도 칼칼한 향내가 풍겨온다.
이전에도 수 번 해주었던 북엇국이다.
한국 생활을 해보아서 그런지 한국 사람들이 무엇으로 해장하는지도 잘 아나 보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뭘요, 늘 하던 일이었는데요."
술을 마신 다음 날이다.
몸 움직이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닐 텐데.
북엇국은 절대 엎지 말자 다짐하며 흰 쌀밥과 함께 한 술 떴다.
'스며든다..'
이 익숙한 음식 덕분에 중국 생활이 정말 할 만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츠위의 도움은 백 번 감사해도 모자라다.
그만큼 노력해서 LPL의 우승, 따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많이 노력했지.'
그렇게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밥값을 했다.
나는 상 건너 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츠위를 향해 물었다.
"혹시 너도 아침이야?"
"아침은 여덟 시 즈음 먹었어요. 지금은 점심이에요."
정말 똑 부러진 아이다.
그러니까 회장님도 믿고서 큰 사업을 맡기신 거겠지.
완바라고 했었나.
그쪽 회사 아들내미 하고는 천지 차이다.
"그 사람도 그렇게 무시할 건 아닌 게 감이 좋아서 손 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하나 봐요."
나 같은 일반인들을 알 수 없는 재벌들의 세계다.
태도는 장난스럽고 가볍지만 투자의 귀재.
감이 굉장히 좋았고, 지금까지는 다 맞은 모양이다.
재벌 2세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저희도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다 말씀드리긴 뭣하지만.. 적어도 터무니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나름대로 선은 지키고.. 뭐, 나름대로 이지만요."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말꼬리가 흐려진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기억나는 바가 있다.
나를 스카웃 하려 했었지.
츠위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대로 밀어붙였을지 모른다.
'장사하는 사람한테는 억척스러운 면도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속된 말로 뻔뻔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절도를 지켜야 한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대강 알 것만 같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는 이야기지만.
"그런데 친구분들은 계속 만나세요?"
"아마 오늘까지는 만나지 않을까. 어제 하도 마셔만 대느라 따로 일정은 정하지 않았지만서도."
따로 약속을 잡은 건 아니다.
그저 기왕 중국까지 왔으니 적어도 하루로 끝나지는 않겠지.
딱 그 정도 떠올려서 말을 했다.
'어차피 뭐 별 일도 아니고.'
별 생각없이 조건 반사적으로 한 대답이다.
그런데 그것이 츠위에게는 무언가 고심 거리로 와 닿은 걸로 보인다.
츠위가 수저로 북엇국을 휘휘 젓는다.
잠시 망설이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역시.. 가고 싶으신가요?"
"뭐,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중국에서 목표를 달성했으니 한국에 돌아간다.
당장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확정이 된 이상 시원섭섭.
기쁨과 아쉬움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다.
어떤 기분일지는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계약한 건 계약 한 거고 저희도 재계약을 시도할 만큼 자금 사정이 넉넉하진 않아요. 쿡야도 그간 많이 성장을 했고 말이죠."
미련 따위 없다는 걸까.
츠위는 의외로 쿨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까지 들으면 조금 섭섭한 감정도 인다.
질질 끌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건 알고 있다.
그저 기분의 문제일까.
그리고 나와 츠위와의 인연이 어제로 딱 끝나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머무르기로 했었지.'
계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략 기억이 난다.
두 시즌 이내에 LPL의 우승.
약 반 개월 간 팀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 내용이 조금 모호해서 첫 시즌에 우승을 한다면 재차 조정을 하기로 이야기가 오갔다.
별 건 아니고 선수로 뛸지, 고문으로 있을지 정도다.
"저는 선수로서의 올마스터는 더 이상 쿡야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니, 있어서는 안된다가 맞겠죠."
냉철하게도 들리는 한 마디다.
이어진 츠위의 이야기는 다분 납득이 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확실히 옳다.
내가 있음으로서 쿡야는 강해졌다.
아니, 중국 내 최고의 팀이 되었다.
적수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무적.
LPL에서 쿡야는 무패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나갔던 경기는 전부 이겼다.
단 한 세트도 빠지지 않고 진 적이 없다.
일부러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러 했다.
내가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침대에서 숙취를 달래며 생각했던 중국 내 한국 선수들에 대한 무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방안이기도 하였다.
'조금 치사할 정도로.'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이다.
새로운 시즌을 맞아 대격변에 가까운 패치를 했다.
차후 미래의 시점에서 보면 당연하지만, 현재 사람들에게는 아예 다른 게임으로 생각될 정도다.
나도 당시에는 적응하느라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비유를 하자면 다른 선수들은 족쇄를 하나씩 차고 게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난 달려있던 족쇄 하나를 풀어버린 셈이다.
사실상의 전승 우승에는 그러한 사정도 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구단주로서 츠위는 그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다.
이래서야 한 선수에게 의지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구단주로서의 생각이고요.."
잠시 호홉을 고른 츠위가 말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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